사장님

가끔 순복음교회 앞에 나타나 구걸을 하는 노인이 한 분 있다. 다 펴지지도 않는 손을 들이밀며 도와달라고 사정한다. 그분의 멘트는 이거다. "배가 고파요. 도와줘요."

 

날씨가 쌀쌀한데 오늘 또 이 할아버지가 나와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하나 없이 혼자 지나가다가 딱 걸렸다. 다른 말은 모르겠는데, "배가 고프다"라는 말은 정말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소리였다. 마침 주머니에 한 2주 동안 모아두었던 동전이 수북히 있었다. 한 주먹 꺼내 그냥 드렸다. 아마 몇 천원은 될거다.

 

별 말 없이 돌아서는데, 이 할아버지가 고맙다며 치사를 한다. 계면쩍어서 그냥 계속 걸어오는데 이 할아버지의 한 마디가 뒤통수를 때렸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다 낡아서 찢어진 청바지에 몸에 맞지도 않는 커다란 청자켓을 입고, 씻지도 못해 부시시한 몰골의 행인. 나나 그 노인네나 외양으로 봐서는 사실 누가 구걸을 할 사람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동전 몇 개 꺼내준 행인은 졸지에 "사장님"이 되었다. 난 그 할아버지에게 노동의 댓가를 지불했던 것일까?

 

그리고는 갑작스레 떠오르는 어떤 기억...

 

 



사실 행인은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선뜻 돈을 꺼내주지 못한다. 어떤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 앞에는 술집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이 술집들에 거의 출석부 찍듯이 도장찍고 돌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몇 년 간이나 술 마실 때마다 만나게 되는 할머니가 있었다. 이 할머니, 작은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그 가방은 각종 껌이 들어 있는 껌가방이었다. 한 손에는 껌을 들고 어깨는 90도보다 더 아래로 구부러진 호호백발의 작은 몸을 가진 이 할머니는 술꾼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었다.

 

별로 껌 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행인이지만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거의 빠짐 없이 껌을 사드렸던 것 같다. 손주들 때문에 고생 많이 하시다가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뵙는 것 같기도 해서 더 그랬다. 어떤 날은 자리를 옮기는 곳마다 이 할머니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럴 때는 참 난감하기도 했던 그런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은 때가 있었다. 첨에는 그 사실을 별로 깨닫지 못하다가 문득 이 할머니가 상당한 기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는 술집마다 주인들에게 물었는데, 이 할머니가 어디 사는지조차 아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고, 이 할머니가 왜 나타나지 않는지를 아는 사람 역시 한 명도 없었다. 영업구역을 바꿨는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이 이야기 하기도 했다. 혹시 돌아가시지나 않았나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거진 한 달이 지났을까? 예외 없이 그 날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 할머니가 나타났다. 여전히 껌을 손에 든 채로 말이다. 반가운 마음에 껌 한 통 사면서 그동안 어디 계셨길래 통 뵙질 못했느냐고 물었더니 이 할머니 파안대소를 하시면서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를 하신다.

 

미국엘 다녀왔단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혼자 신나서 이야기하시는 할머니의 미국 방문기는 대충 이런 것이었다. 집도 절도 의지할 곳 없는 이 할머니, 껌팔아서 버는 돈을 매일같이 교회로 가서 헌금을 했단다. 물경 몇 년 간을 그렇게 했는데, 교회 목사님이 감동을 한 나머지 미국 관광을 가는데 동참을 시켜주었다고 한다. 그 교회에서도 '선택'받은 몇 명만이 이 미국관광길에 동행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이 할머니였던 것이다.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극심한 혼란. 그 목사는 할머니가 껌팔아서 번 돈을 교회에 다 갖다 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참으로 감사한(?) 맘으로 미국방문을 시켜주었겠지. '주님'의 은총으로 미국구경까지 하고 온 할머니, 은총에 하염없이 감사하면서 오늘도 껌을 팔러 나왔다. 또 몇 년 지나면 목사는 할머니에게 유럽 순방을 시켜줄라나? 할머니의 미국방문은 하나님의 은총이었나, 아니면 할머니가 갖다바친 돈의 위력이었나???

 

암튼 그 사건은 참 벼라별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그리고 오늘 또 "사장님" 소리에 상당히 심각해진다. 난 과연 뭘까? 왜 "사장님"소리에 이렇게 갑갑해지면서 아득해지는 걸까.... 도통 그 이유가 명확하게 떠오르질 않는다.

 

길거리에는 지금도 전경들이 도열해서 손에 손에 공무원 노조원들의 사진복사물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낼 아침에 수요예배를 위해 몰려드는 순복음교회 성도들의 편의를 위해 그 할아버지는 또 다른 곳으로 쫓겨날 것이다. 하늘에 영광, 땅위에 평화... 줸장맞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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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6 15:22 2004/11/1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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