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변과 자살

"노동계에게 꼭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고용의 유연성을 좀 풀어주지 않으면 실업 또는 준실업 상태에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것이 여러 요인이 있지만 해고가 어렵기 때문에 정규직을 채용하지 않으려는 측면이 있죠. 해고가 조금 쉬워지면 많은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구조에 있습니다. 때문에 노동계에서도 확고한 직업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는 쪽에서 근본적으로 양보해줘야겠습니다. 해고의 경직성을 노동계 스스로가 좀 풀어서 일부 노동자만 보호를 받을 게 아니라 골고루 정규직의 혜택을 넓게 받을 수 있도록 결단이 필요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의 주옥같은 말씀이시다. 경향신문사와 지난 22일 대담을 통해 밝힌 노무현의 생각이다. 말씀은 주옥같은데 내용은 궤변이다. 해고요건을 완화하면 정규직이 늘어난다? 그렇지 않아도 정규직 없애고 비정규직으로 채워넣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는 기업이 해고요건 완화되면 거꾸로 정규직을 늘린다? 도대체 머리 속에 뭐가 들었냐...

 

대통령의 궤변이 주옥같은 문장으로 꾸며져 가판대에 배포되고 있었을 27일 새벽, 한진중공업에서 일하고 있던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진중공업에서도 비정규직이 죽었다는 것을 알면 현재 근무하고 있는 비정규직은 좋은 대우를 해주겠지"라는 저주스러울 정도로 소박한 소원과 함께 "다시는 이러한 비정규직이 없어야 한다. 비정규직이란 직업이 정말 무섭다"는 서러운 한탄을 남기고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목을 매단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저 몰지각. 그리고 그 몰지각이 정당화되는 순간에 발생한 모순의 폭발. 대담을 하면서 웃고 있던 노무현의 얼굴 위로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한 노동자의 지친 얼굴이 스쳐간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

 

노무현의 궤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다. 현장에서 기름밥 먹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저 말이 가지고 있는 허무맹랑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무현의 저 말이 노무현 개인의 머리 속에서 어느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전경련, 경총을 비롯한 기업인들의 입에서, 청와대 경제관련 브레인들의 입에서 계속 튀어나오던 이야기니까. 하지만, 적어도 인권변호사를 했다고 자칭하는 대통령이 저런 이야기 이렇게 쉽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넘의 인권은 자본가의 인권이었냐? 돈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인권은 그렇게 쉽게 한 마디 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냐?

 

결국 2004년의 끝자락에서 또 한 노동자가 이렇게 죽어갔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애를 유서에 절절히 남기고 그렇게 사라졌다. 노무현, 더 이상 노동자들을 약올리지 마라. 노동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마라. 목을 매단 노동자의 절절한 이야기가 들려오지도 않는가?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춘봉씨의 유서 일부(프레시안 기사 중 발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다음 생에서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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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 15:04 2004/12/2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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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은 여기저기 블로그에 이 얘기가 많네요.. 요즘 국가보안법폐지 농성장에 앉아있으면서 참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이 들어요. 추운데 있다 이제야 들어왔더니.. 손이 곱아 오늘은 이만 총총..

  2. 김대중 노무현으로 오면서 사람들이 더 정치인들에게 실망하는거 같죠. 오히려 전두환 노태우보다 더 나쁜 인간들 같아요. 사람들을 속여 먹는 거 보면...

  3. 아마도 저런 식의 궤변은 상층관료 + 전경련 + 기회주의적인 대학교수들이 야합해서 만든 논리일텐데, 아마도 그들 모두를 비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얘기를 한다면 펄쩍 뛸까요? 고용시장 유연화과 그렇게 좋다면 저들보고 먼저 본을 보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나쁜노무 시키들...

  4. 대통령 해고요건을 완화하자고 이야기를 해야할 판입니다. 대통령이라는 직은 일단 한 번 수행을 하고 나면 전관으로서의 예우가 현직에 있을 때랑 거의 비슷하거든요. 즉, 퇴직을 해도 그 직에 있는 것과 같은 강력한 고용효과가 있는 겁죠. 대통령 해고요건 완화시키자고 운동이라도 해야할 판입니다. 쩝...

  5. 행인님의 글은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그넘의 인권은 자본가의 인권이었냐?"
    이 부분에서 시원스레 웃을 수 있게되는...
    언론인들과의 만찬인지에서 놈현은 이라크방문에서 찍혔던 사진을 선물받으며 웃던데..속이 어찌나 울컹울컹하던지...이제쫌..

  6. 공무원 노조 파업이 임박했을 때 소위 '진보'라 자처하는 제 친구가 목소리를 높이더군요. "쯧쯧, 배들 부르니까 공무원들이 파업이나 하려고 하지." 그 친구를 붙들고 일장 언설을 쏟아내긴 했지만...노동자들의 평균 수준보다 훨씬 잘 사는 사람들이 노동자들 앞에서 이렇게 당당한 시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친노동자적 정부를 만나 노동자들이 살 판 났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친노동자적 정부라는 착시현상에 빠진 국민들 때문에 노동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살 판 났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