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결혼

그 때가 언젠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 무척 바쁜 시간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입사한지 한 1년쯤 되어 가나 하던 시기였는데, 정신없는 회사생활 속에서 나름대로 짬밥이 쌓여가던 그런 시기였다.

 

꽤나 재미있는 선배가 있었다. 7년 선배였는데, 이 형은 평소 재기발랄하고 엽기무쌍한 일들을 많이 해서 주변 사람들이 무척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특히 술자리에서 펼쳐지는 온갖 오바질로 인해 언제나 이 형이 있는 술자리는 즐거움이 가득한 그런 술자리가 이어지곤 했다.

 

행인과도 죽이 잘 맞아서 빈번하게 술을 같이 퍼마시기 일쑤였다. 간혹 조용히 혼자 쏘주잔을 비우고 있을라치면 난데없이 나타나 함께 말술을 퍼마시기도 했다. 그저 재미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쩌다 한 번씩 심각한 사회이야기를 할 때면 아, 이 사람이 이런 생각도 하는구나 하고 감탄할 때도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 형이 하루는 하루 종일 말도 없고, 시무룩 한 것이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소같으면 에이, 형 왜그래? 하면서 장난이라도 칠 것이었지만 그날따라 왠지 그러면 안 될 것같은 심상찮은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전날 술을 많이 마셨나, 아니면 집에 무슨 일이라도 났나... 영 께름칙 한 기분이라 괜히 나까지 우울해지는 묘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시무룩한 얼굴로 아무 말도 없이 일을 했는데,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게 된 걸 빌미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넌즈시 물어봤다.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본 이 형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더니 아무 소리 없이 밥숟가락만 달싹거렸다. 뭐 더 물어볼 수도 없을 것 같아서 그만 두고 밥만 열심히 퍼먹었는데, 평소 먹성 좋게 식판 한 가득 밥을 퍼 와 쓱싹 비우던 이사람이 그날 따라 밥도 제대로 먹질 않는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가보다 하고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평소에 별로 말도 없고 조용하던 사람이 그러면 잘 느끼질 못하는데, 평소에도 시끌벅적하고 마치 자기가 연예인인 것처럼 행동하던 사람의 태도가 갑자기 변하니까 슬슬 호기심이 걱정으로 바뀌기 시작한 거다.

 

영 어색한 일이라서 행인 역시 다른 사람들하고만 이야기를 하다가 하루가 갔다. 퇴근을 위해 야간반과 교대를 하고 기숙사로 향하는데, 이 형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오늘 술 한 잔 같이 하지 않겠냐고 한다. 평소같으면야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올시다 하고선 얼른 따라나서겠지만, 이런 날 술 잘못 마시면 영락없이 사고가 발생하는지라 왠지 선뜻 그러마 하고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래, 머뭇거리고 있는데, 이 형이 매우 슬픈 눈으로 계속 쳐다보고 있는 거다. 더욱 대답하기가 곤란해지고 있는데 결국 이 형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떨구고 만다. 아, 거 참 사람 진짜 답답하게 하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을 못들어주겠냐 싶어서 같이 술 한 잔 하자고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퇴근버스를 타고 동인천으로 나가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부르자니까 극구 만류를 하고 단 둘이서만 술을 마시자고 하길래 결국 둘이 술을 마시게 되었다. 평소같으면 소주잔에 술 따르기도 전에 온갖 이야기를 다 풀어냈을 사람이 도통 말이 없다. 이거 사람 환장할 노릇이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말이 없고, 뭘 물어봐도 대답이 없고, 그저 술잔이 빌새라 술을 채우고 알콜 증발할 새라 마시기 바빴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길래, 또 물어봤다. 그런데도 대답이 없다. 미칠 노릇이다. 도대체 왜 같이 술 마시자고 한거냐고 약간 언성을 높여봤는데, 대답은 없고 또 한숨이다. 어이구 심장이야... 에고... 답답해라...

 

1차를 그렇게 건성 마치고, 솔직한 심정으로 더 술마실 기분이 안난다고 이야기하고 기숙사로 돌아오려는데 그래도 2차는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벅벅 우긴다. 까짓거 여기까지 왔는데 그거 못해주겠냐는 생각이 들어 또 2차를 갔다. 갔는데, 역시 1차와 마찬가지로 묵묵부답에 입만 꽉 다물고 있다. 입을 벌리는 경우는 딱 두 가지. 술이 입으로 들어갈 때와 한숨을 쉴 때. 뭔 한 숨을 그렇게 퍽퍽 쉬는지. 안주라도 먹으면서 술을 마셔야 하는데 이 인간이 안주도 안 먹고 술만 퍼마신다.

 

짜증이 솟구칠대로 솟구쳐서 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하고 소릴 버럭 질러버렸더니만 이 형님이 난데 없이 너 누구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물어본다. 줸장... 행인이라고 좋아하는 사람이 없겠냐. 그렇다고 이 분위기에 저 사실 누구 좋아하는데요 어쩌구 이런 이야기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말이다. 말문이 막혀 뭔 소리를 할지 고민하는데, 이 엉아가 하는 말씀이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꽉 잡으란다.

 

아하... 이제야 감이 잡힌다. 이 인간이 누굴 좋아하는데 채였거나 아님 뭐 딴 일이 있거나 그런 거구나... 여기까지 감이 잡힌 행인, 드뎌 이야기할 껀수가 생겼다는 심증을 굳히고 형님 분위기 풀기 작전에 돌입했다. 아, 형, 그런 얘기라면 진작 얘길 하시지 그랬어여, 그게 누구에여? 내가 낼부터 작전 개시할께. 이러면서 온갖 감언이설로 유도심문을 펼쳐봤지만 이 사람, 다시 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도대체 누굴까? 생산1과의 그녀? 총무과의 그녀? 매점의 그녀? 아 쒸 도대체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형은 그동안 회사 내에서 어느 여사원과도 썸씽이 없었고 감을 잡을만큼 연분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할만한 여사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모르는 사람인가? 외부의 그 누구? 추리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 형님, 저 먼 남녘 어디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업해 지금까지 여기서 일하는 사람. 허구헌날 12시간 맞교대에 일 끝나면 술마시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인천 어드메에 아는 처자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아냐, 아냐. 단정은 금물. 혹시 아냐? 이 재치만점의 핸섬가이(우웨...)에게 잘 어울리는 형수감이 따로 있었을지도...

 

이렇게 벼라별 생각을 다하고 있는데, 3차를 가잔다.... 12시가 넘었는데 또 어딜 간단 말이냐... 하지만 뭐 더이상 어찌할 도리도 없었다. 그래서 3차를 갔다. 3차를 가서도 그넘의 침묵은 계속 되고... 거의 폭발 직전까지 몰려갔다. 나 이제 갈라우 했더니 이 냥반이 오늘만은 좀 같이 있어달란다. 그 음성에서 묻어나오는 처절함... 거부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나 그런 모양새로 그 형님과 새벽까지 같이 있게 되었다. 이냥반이 이제는 거의 만취가 되어서 몸도 제대로 못가누는데 막차를 가잔다. 즉, 4차를 가자는 거다. 신새벽에 말도 없이 술자리를 계속 해야하는가 하는 회의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르는데, 불쌍한 인간 뭔가 중대사가 있었겠지, 위로나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주안역 앞 포장마차까지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단골로 가던 그 포장마차 분위기도 영 어색했다. 내 기분이 지리지리 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느날과는 생판 다른 축 쳐진 분위기였다. 꼼장언지 뭔지 아무튼 안주 간단한 거 하나 시키고 소주를 시켰는데, 소주 한 병 비우는 동안에 이 형님이 한숨을 백번은 쉰 거 같다. 드뎌 환장하던 분위기가 폭발하고 말았다.

 

아, 말을 해봐요, 말을. 이거 원 답답해서 술 취하지도 않네. 버럭 소리를 지르자, 주변의 사람들이 죄다 쳐다본다. 죄송함돠, 죄송함돠 하고 사과를 하고서는 머쓱하게 앉아있었다. 그러자 이 형이 취한 눈빛으로 행인을 그윽하게 쳐다보더니,

 

"야 쉑꺄... 너 엉아가 왜 이러는지 알고싶냐?"하고 입을 떼었다.

"말을 해봐요. 대체 왜 이러는 거에요?"

"후~~~"

또 한숨을 쉬더만 소주 한 잔을 그대로 들이켰다. 잽싸게 술을 따라주는데, 이 형이 술을 다 받고 나서는 다시 나를 쳐다본다. 그런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갑자기 마음이 짠~~해 지는 것이 괜히 나까지 눈물이 날 뻔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이 형님의 한 마디에 행인,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녀가 시집을 갔다."

아... 그렇군. 근데 누구 말인가? 도대체 누구 말인가??

...

...

...

...

...

...

...

...

...

...

...

...

...

...

"전인화가 시집을 갔다... 에효...."

"???????"

 

아니, 뭐여?? 그 탈렌트 전인화? 유동근하고 결혼한다던 그 전인화??? 그 전인화가 시집갔다고 오늘 하루 종일 이 짓을 한거여? 아니, 이런 쉬바스러운 일이...

어이가 없었다.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장장 10시간 가까이 퍼마셨던 술이 확 깨는 그런 기분이었다. 이걸 뭐 어떻게 표현해야하나? 지금 내가 위로를 해줘야 하나? 아님 승질을 부려야 하는 건가? 아, 제기럴, 이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센티멘털리즘에 어떻게 호응을 해줘야 하는 건가???

 

이렇게 어이가 없어하며 앉아 있는데, 갑자기 옆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 하나가 소주병과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

"댁두 그래서 마시는 거유? 에효... 같은 처지끼리 한 잔 합시다..."

그러더니 마치 자원방래한 붕우들처럼 술잔을 주고 받는다.

 

아... 적응이 되지 않는 이 신기한 사람들이여...

세상엔 벼라별 희한한 사람들이 다 있구나... 그런 걸 절실하게 느끼던 새벽이었다. 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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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9 01:25 2004/12/29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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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하하 ... 이거 웃어도 되는 거죵 ... ^^;

  2. 이런... 이렇게 황당스러울 때가 있나...
    그런데 이제는 제 주변에서 임수정을 두고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되었답니다. 드라마 폐인은 무서워~~~ ㅡ.ㅡ;

  3. 오니카와/ 웃어야죠~~~ ㅋㅋㅋ 울면 이상하잖아요~~ ^^
    자일리톨/ 제 친구 중에는 이선희 시집갔을 때 며칠씩 무단 결근 했던 넘도 있습니다. 이선희 왕팬이었거덩요... 암튼 신기하기도 하지만 어쩔 때는 왜 내겐 저런 감수성이 없는걸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흠흠...

  4. 정말 감정이입100%로네요^^
    현실계와 상상계를 넘나드는건 AB형이 최곤데...하지만 연애인과의 결혼은 범접하기힘든 상상계이군요^^;; 이런 시바스런일이~ 쿡쿡(난 이말땜에 넘어갔는뎅~)

  5. 전 예전에 신하균이 배두나랑 헤어졌단 기사보고는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전 저 선배가 이해되는데요, 후후~

  6. 전 최근에 브래드피트가 부인이랑 사이가 안좋단 기사 보고 기분이 좋았었는데.....그래도 윗분은 넘 웃긴다..푸하하

  7. 캬캬캬캬...나도 신하균 배두나 결별 기사보고 좋아했는뎅..^^

  8. ㅎㅎ...저 웃어도 되요? ㅋㅋㅋ 갑자기 제 친구가 생각나서요...가수 이승환 어머니가 별세하신 날 제 친구가 이승환 불쌍하다고 밤새 저 붙잡고 울었습니다. 제가 어찌나 당황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