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이 좀 쉬워졌으면...
일전의 토론회에서, 김민웅씨가 제헌의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하여 화들짝했더랬다. 베네주엘라 사례를 꺼내가면서 헌법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더라.
난 좀 당황스러워서 이렇게 거창한 주제의 토론회인지 모르고 왔다는 말로 발제를 시작했다. 제헌을 하자는 건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건데, 소소하게 지역정당 입법론이나 들고나와 계면쩍다, 이렇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사람은 기본적으로 제헌의 의미 자체에 대해 그다지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것 같다. 질의응답 시간에 들어본 바로는, 중언부언 현 상황이 어쩌고 저쩌고 하니 이러쿵 저러쿵 해야 하는데 그걸 헌법에 집어넣자, 뭐 이런 이야기였던 거 같다.
김씨는 헌법개정의 예시라면서 전문을 이렇게 바꿨으면 좋겠다는 안을 들고 나왔다. 국가주의를 탈피해야한다고 발제시간엔 강조를 하던 사람이 들고나온 전문은 시작부터 단군조선을 들먹이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전문만큼의 분량에 거의 비슷한 논리전개를 구사하는 그 헌법 전문의 예시는 지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고 떠들어대는 자의 대표적 사례로 박제삼을만 하다. 물론 이건 그냥 자기 생각이고 앞으로 논의를 거치면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게 그냥 그렇게 갈리가 없고.
발제 중에, 진보정당이 민주당계와의 차별성 부각을 위해 민주당 때리기하면 지지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다 착각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 뭐 역시나 결론은 버킹검,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지지, 통큰 단결, 구동존이, 통일전선의 한길로가 어디 가겠냐... 암튼 제헌이라는 말에 아주 걍 훅 갈 뻔 했다만.
최근 국회의원불체포특권때문에 이게 개헌사항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이 좀 불거지는 것 같다.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은 제헌당시부터 규정되어 있었던 사안이다. 제도설계의 취지라든가 하는 건 논외로 하고. 제도 존속의 의의가 있느냐, 또는 이재명 방탄국회 가느냐 마느냐 하는 따위의 논의는 다른 사람들이 박터지게 하고 있으니 그냥 난 좀 딴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이런 류의 규정은 국가의 존속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인 규정이라고 할 수도 없고, 국민의 기본권과 직결되는 내용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헌법에 명확하게 규정된 사안에 대해 법률로 함부로 바꿀 수도 없다. 문제가 계속되는데도 이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은 오로지 헌법을 개정해야만 하는 거다.
하지만 우리 헌법체계상 개헌은 몹시도 어렵다. 87년 헌법이 만들어진 이후 그걸 만든 자들조차도 개헌을 해야 한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성공하질 못했다. YS나 DJ나 의원내각제 개헌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고 구라를 치면서 JP를 엮어 정권을 잡았지만, 개헌은 개뿔이고 그나마 있던 자민련 얼룩 빼느라 진저리를 쳤고.
노무현 대통령도 책임총리제니 원포인트 개헌이니 하면서 개헌을 이야기했지만 그냥 물 건너 갔고, 이명박과 박근혜는 개헌이야기를 하고는 싶은데 할 타이밍을 번번히 놓치면서 또 물 건너 갔고, 문재인 정권은 뭔가 거창하게 제헌에 준하는 전면적 개헌을 하겠다고 의욕적으로 하는 거 같더니만 도대체 개헌할 생각이 애초부터 있었던 건지 알 수 없게 건성건성하다가 국회에 대충 한 번 찔러보고 종쳤다.
이 어려운 개헌도 모자라 제헌씩이나 하겠다는 김민웅 류를 보면 그 치기가 가상하...다기보다는 가당치도 않고. 하긴 개헌과 제헌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뭘 기대하겠냐만은.
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렇게 헌법 조문 하나 바꾸는 게 국가의 운명을 건 중대사가 되어버리니 헌법 규정 중 낡아서 이제는 더이상 헌법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규정을 없애거나 바꾸고, 혹은 그동안 세상이 변하면서 새롭게 헌정질서 안으로 편입해야 할 어떤 사회적 현상이 있으면 그 내용을 헌법에 삽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게 쉽질 않다.
사실 헌법이 법 중의 법이라고는 하지만, 국체를 규정하는 부분이나 기본적 인권을 규정하는 부분 외에 국가기구를 구성하는 각 규정 중 상당수는 법률의 개정보다 약간 타이트한 방식만으로 얼마든지 개정해도 괜찮은 규정들이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런 규정이 헌법에 규정되어야 할 정도로 사회적 의미가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이정도로 강하게 국회의원의 신분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국가권력에 의해 민의의 대표자가 날아가버릴 수 있었던 시대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 시대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이정도로 신분보장을 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국회의원이라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누구나 법앞에 평등하다는 헌법의 원칙을 솔선하여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럴 경우 이 규정을 법률의 개정보다 조금만 까다로운 정도, 예를 들면 재적 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보다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 찬성과 같이 조금 강화된 의결기준을 두어 개정을 쉽게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거다.
상당히 많은 나라들이 이런 방식으로 헌법을 개정한다. 예를 들어 독일이 그렇다. 다만 앞서도 말했듯이 국체와 관한 규정이라든가 기본적인권의 내용에 관한 규정에 대해서는 전 사회적 의견의 수렴과정과 전체 주권자의 의사결정과정이 있어야 하겠지만.
난 그동안 제헌까지는 아예 논외로 하고, 주권자들이 직접 개헌을 요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전면적인 개헌조차도 일부 정치권의 이해타산만으로 추진될 수 없다고 이야기해왔다. 지난 2016-2017 촛불을 주권자가 개헌을 하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그것은 개인적인 지향에 따른 추론에 불과하며, 촛불 내내 주권자들이 개헌을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어떠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촛불은 박근혜가 제거된 87년 체제의 존속을 주장한 것이었다고 판단했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큰 틀에서 변화가 없고.
그런데 이렇게만 보자면 현행 헌법은 나라가 한 번 뒤집어지기 전까지는 조문 한 구절 바꾸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이야기했던 게 국민발안, 국민투표만을 규정하는 원포인트 개헌이었고, 그 개헌 이후 헌법 총강과 기본권의 장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기구구성에 관한 각 규정은 법률의 개정보다는 조금 더 까다롭지만 현재의 개헌절차보다는 훨씬 쉽게 개헌이 가능하다는 규정을 신설하는 개헌을 하고, 그 개헌이 이루어진 후에는 국가기구 구성 등에 대해서 정리할 건 좀 정리하는 개헌을 했으면 어떻겠느냐는 거였다.
물론 그렇게 되면 정권 잡은 정당에서 허구한날 개헌한다고 국회를 개판으로 만들 위험이 존재하긴 한다. 만일 지난번처럼 위성정당까지 동원해 물경 180석이나 의석을 만든 더불이 이렇게 개헌이 가능한 상태에서 국회에 있었다면면 무슨 짓을 저질러렀을지 아찔하기깢까지 한 거다. 이런 거 생각해보면 국가기구구성에 관하여 개헌을 쉽게 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겠다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굴 것까진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