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정당 허용 요구에 경실련이 앞장서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과거 기초의원선거 정당공천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일 때 공천제폐지에 앞장선 조직은 지자체장협의회처럼 기초의회와 부딪치는 경험을 많이 한 공직자들 중심의 조직들이었다. 그런데 공천폐지를 주장하는 조직 중에는 경실련이 껴있었다. 경실련은 정당공천제를 없애자는 주장을 매우 강하게 제기하던 축이었다.
경실련은 공직자들이 주축이 된 단체가 아니라 시민단체였고, 게다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이름값이 높은 조직이다. 현장에서 직접 경험을 한 공직자 출신들의 조직과 이런 네임드 시민단체가 함께 하니 공천폐지 주장이 매우 힘을 얻었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공천폐지 주장은 상당히 인기 있는 정치개혁안 중의 하나다.
당시 경실련의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을 상당히 강하게 제기했었다. 진보신당의 정책라인에 있었음에도 당시 이미 지역정당이 대안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민주당에서조차 공천폐지를 당론으로 하니마니 하는 헤프닝이 있었고, 거기에 날서게 반대하기도 했다. 여론보다는 주로 전문가들을 조직해서 대응했는데, 어쨌거나 정당공천폐지는 흐지부지 되었고 정당공천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단체들의 입장을 보면, 경실련이 지역정당을 허용하라는 주장을 강하게 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 주장은 아예 꺼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매우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24년 총선이 이제 1년 하고 한달 정도 남았다. 그래서겠지만, 현재 정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치개혁론은 천편일률적으로 선거법 개정에 대한 이야기 뿐이다. 중대선거구제 도입이냐, 도입하면 몇 명 선거구로 할 거냐, 비례성 강화는 어떻게 할 거냐, 비례의원을 늘릴 거냐 줄일 거냐, 패스트트랙 이전으로 선거법을 돌리자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비례고 나발이고 싹 정리해서 의석을 반으로 줄이고 시작하자는 발정스러운 주장도 제기된다.
그런데 이거 다 보수 양당이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자리를 갈라치기할 것인지로 이야기가 흘러갈 뿐이다. 비례성 강화하고 5인 이상 선거구를 늘려서 보수양당 이외의 정치세력이 등장할 문을 열어야 한다는 말이야 당위론일 뿐이고, 어차피 칼자루를 쥐고 있는 보수양당은 정의당 등 그 외 정당을 들러리 세운 채 지들의 기득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선거법 개정을 논의하는 중이다.
겉으로야 그럴싸하게 양당구조타파 운운하면서 뭔가 방법이 있는 것처럼 개정안도 내놓고 있다만, 독식할 수 있는 곳은 계속 독식하고, 양분할 수 있는 곳은 양분의 틀을 견고하게 만들고, 뭔가 빈틈이 있는 곳은 그 틈새로 양당 외의 다른 정치세력이 비집고 들어올 수 없도록 구멍을 막아버리는 그런 식의 선거법 개정논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논의를 87년 개헌 이래 지금까지 하고 있다만, 결과는 보다시피 견고한 양당구조의 구축으로 귀결되었다. 지금의 논의는 다를 것인가? 별반 다를 바 없을 거라고 보고. 다당제가 실현된다는 것은 어느 한 당이 패권을 휘두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지금 상황에서 제3세력에게 의석 몇 석 건너간들 양당이 정기적으로 패권을 주고 받는 틀에는 변화가 없을 거다.
선거법 개정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 알량한 몇 석이라도 양당이 아닌 정치세력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나 가능성은 남게 된다. 하지만 그 가능성만을 지난 수십 년 동안 붙들고 있어봐야 아무 것도 바뀐 게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은 가능성을 넓힐 수 있는 방안을 다양하게 시도해야 한다는 거다. 그 방안 중 하나로 제시한 게 바로 지역정당이고.
마치 이 나라의 정치현실을 혼자 다 걱정하고 있는 듯한 정치권의 인사들이 정당체계의 변화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는 게 지금 상황이다. 일부 의원들이 정당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있지만, 예를 들어 윤호중 의원의 안처럼 그래서 뭘 하자는 건지가 분명하지 않은 정당법 개정안이 나오기도 하고, 이상민 의원이나 윤호중 의원처럼 이렇게 의원들이 중구난방으로 법안을 내는 동안 이들이 속해 있는 더불에서는 당론을 만든다든가 의원 안들 사이에 어떤 검토를 한다든가 하는 당적 차원의 액션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하는 게 지구당 부활 같은 거 검토한다던가.
국힘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정의당조차도 지역정당에 대해선 지극히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지금 정당법 체계 하에서 선거법만 바뀌면 언젠가는 국힘과 더불에 어깨를 견주는 제3당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인가? 전국적으로 자당의 영향력을 골고루 높일 수 있거나, 아니면 국힘이나 더불처럼 어느 한 지역의 패권이라도 장악한다는 장기플랜이 있는 걸까?
오래전부터 이야기해왔지만 아직까지는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선거법 개정하는데 들이는 힘의 100분의 1만 들여도 정당법 개정은 충분히 할 수 있고, 정당법이 개정되어 다양한 정치세력의 정당결성과 정당활동이 보장되면 현재의 보수양당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을 거라고 해왔다. 이건 예측에 불과한 게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될 거라고 장담한다.
이제 선거법은 물론 정당법도 개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있다. 그 이야기를 앞장서서 하는 조직이 경실련이라는 것에 만감이 교차하기도 하고. 언젠가는 같이 이 이야기를 하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공천폐지 때는 서로 반대 입장에서였지만, 이번에는 같은 입장에서 한 번 이야기해보는 것도 재밌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