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당과 세 번째 권력의 동질성
총연맹 집행부가 '장미당' 창당 기획을 만들며 장밋빛 꿈에 젖어 있던 시간에, 또다른 한 구석에서는 '세 번째 권력'이 출범하고 있었다.
총연맹이 실효적 방향을 탈각시킨 채 내용 없는 노동중심성을 내세우는 동안, 세 번째로 집권세력이 되어보겠다는 그룹은 노동중심적 계급정치를 시대착오적 역사의 유물 취급을 하며 사회운동으로부터 퇴출시키려 한다.
이 양방향의 움직임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탈계급적 자유주의 운동의 프레임이 매우 강고하게 한국의 사회운동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 탈계급적 자유주의 프레임을 깨는 전망과 실천노선이 아니라 기껏해야 그 프레임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발버둥만 남아 있는 현실이 암담해진다만.
총연맹의 장미당 기획은 상향식 사회운동을 정치영역으로 승화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성의 정치세력에 총연맹의 하향식 영향력을 확장하겠다는 기도에 불과하다. 그 영향력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장미당 기획안의 대미를 장식하는 건 노동중심성이지만 정작 노동중심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기획안은 함구한다. 민주노총 핵심이 끼어 있는 집행부가 구성되면 노동중심성이 관철되는 것이라고 보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다.
'민주주의 세대'의 정치를 선언한 세 번째 권력이 상정하는 세력분할구도는 철지난 세대론에 기대고 있다. 이들이 아예 세대론을 전면에 배치한 용기를 치하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수식어들을 모두 제하고 나면, 이들이 구획하는 정치적 지형은 노동이 중심이 된 구세대의 '진보정치'와 자신들이 중심이 된 '민주주의 세대'의 미래정치로 나뉜다. 그런데 이 구조의 실질이라는 건 그냥 난무하는 온갖 세대론 중 정치권 판형에 불과하다.
이 양자의 운동에는 계급운동의 전망이 없다. 한쪽에서는 내용 없는 노동중심성을 이야기함으로써 계급운동의 지향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다른 한쪽에서는 계급운동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노동중심성이라는 의제를 자본과 정권이 말하는 노동시장의 상품으로 대체시켜버린다.
노동중심성의 기치를 명확히 하고 그것이 대중적 지지와 신뢰 속에서 운동의 방향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정치방침을 만들었어야 할 총연맹은 게을렀거나 무지했다. 그 결과 세 번째 권력으로부터 '노동조합의 당면한 이익을 수호하는 데만 그치는 노동중심 정당'이라는 비난으로부터 '노동중심 정당'을 방어할 어떤 수단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러한 오류는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예컨대 기후위기 문제와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정의로운 전환'은 노동계급의 이해를 관철하는 노동중심적 운동의 의제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문제는 기후위기활동가들에게 그들의 역할로 맡겨지게 되었다. 지난 4.14에 벌어졌던 '파업'으로 명명된 항의운동은 노동자들에게 연차를 내고 참여하는 행사일 뿐이었다.
하루 연차를 내더라도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 없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그 하루 연차를 낼 수 없는 노동자들은 배제된 '파업'에 총연맹의 정치방침이라는 건 없었다. 총연맹이 모든 조합원에게 기후위기에 대응하여 노동자들의 전면적 정치투쟁을 종용하면서 한날 한시에 모든 사업장의 전원스위치를 내리자는 정치방침을 내는 건 지금 상황에선 불가능한 기대다.
이러다보니 기후위기로 다 죽게 생겼는데 무슨 정의로운 전환이며 평등이 다 무슨 얘기냐는 볼맨소리가 튀어나온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노동중심적 해석과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 민주노총은 계속해서 연차휴가를 파업으로 이야기하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다.
무엇이 노동중심성이 되어야 하는지를 총연맹이 확인해주지 못하는 이 계급운동의 공백이 장기화되는 과정에서, 결국 노동중심성이라는 건 무망한 이야기며 기껏해야 조직 노동자들의 이익확보에 급급한 조합주의를 계급운동으로 과장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탈계급적 자유주의 시민운동이 새로운 변혁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 번째 권력'이 등장한다.
이름부터가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을 연상시키는 이 부류는 젊은 정치인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자신들이 바로 미래권력임을 과시한다. 물론 정봉주 팬클럽이었던 미래권력들과는 전혀 다른 마스크이지만, 실제 이들의 출범선언문의 내용은 영국의 신자유주의를 왼쪽에서 뒷받침하게 된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이미 몇 차례의 파국을 경험하면서 현실적인 적실성이 없는 탈색된 이념적 지향임이 확인된 구세대 제3의 길의 오류를 자칭 미래세대가 반복하는 이유는 확장성이 보이지 않는 노동중심적 계급정치보다는 여전히 어떤 방향에서 이야기하든 의제에 따른 일정한 효과가 담보되는 기후, 젠더, 연금, 그리고 노동 내부의 격차 같은 이야기들이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이들이 이러한 퇴행적 사고를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이들을 성장시켰던 진보정치가 노동정치에 대한 자기방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정작 이들은 진보정치의 적극적 후원을 통해 현실정치의 한 일원이 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노동과 평등이 중심이 되는 진보정치를 벗어나 민주주의 세대를 앞세운 '미래정치'를 주장한다.
특히 '노동 내부의 격차'를 노동운동이 자체적으로 정리할 수 없는 문제로 돌려 세우면서 노동계급 내부의 적대적 투쟁구도를 설정하면서 외과적 수술을 종용하는 일부 활동가의 전도된 발상이 이들 세 번째 권력의 출범 선언문에서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는 걸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로써 세 번째 권력은 매우 당당하게 진보정치의 옛 세계관과 결별하자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미 자신들을 낳아준 그 진보정치의 세계관은 계급정치 내부에서 벌어진 정체현상과 충돌에 대해 어떤 방침도 방향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빈 틈에서 탈계급화를 새로운 지향으로 내세우는 자신들의 정당성이 확보된다.
이렇게 보면 총연맹의 집행부와 세 번째 권력은 다른 사회를 지향한다는 알리바이를 앞세운채 매우 편하게 정치를 하려는 퇴행적 활동양식이라는 점에서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전자가 내세우는 다른 사회는 오래된 미래가 도래한 사회이며 후자가 내세우는 다른 사회는 스스로가 미래가 된 사회다. 전자는 자신들의 세력을 밑천으로 기존 정치세력을 추동함으로써 힘을 발휘하고자 한다. 후자는 자신들을 키워준 배지를 썩은 물로 치부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참신한 세력임을 강조하면서 힘을 과시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바닥에서부터 새로운 지형을 형성해 사회변혁의 동력을 기본에서부터 다져놓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말로는 근본적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이 두 운동은 모두 무엇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할지에 대해선 갈피를 못잡고 있다. 대신 자신들이 하면 된다는, 자신들이 하자는 대로 하면 된다는 오만함과, 어려운 길은 피하고 될 수 있는 한 쉽게 가자는 편의주의만 팽배하다.
물론 이 퇴행들의 배경엔 사회운동 전반의 침체와 진보정치, 노동정치의 정체가 깔려 있다. 이 답답한 상황을 해소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기에 이런 퇴행들이 줄을 잇게 된다. 누가 대신 대안을 내놓을 일은 아니고, 이 양 당사자 역시 대안을 낼 주체들이긴 한데, 아무튼 이들이 내놓은 대안은 이러하다. 그게 이들의 한계겠지만.
난 내 나름의 대안을 현실로 만드는 일에나 몰두해야겠다. 아주 거창한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것이 아닌지라 겸연쩍긴 하다만, 그래도 비합전위정당을 만들어내고 제도개혁운동으로 승화하는 것이니 아주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거다. 뭐 저들에 대한 나의 비판만큼 내가 하는 운동에 대해서도 그게 뭔 퇴행이냐는 비판이 나올 수는 있겠다. 저들이 비판을 감수하듯 나도 감수해야 할 비판일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