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과 희망

당직선거의 결과는 솔직히 말하자면 예측대로였다. 다만, 선거 막판에 투표참여율이 예상을 훨씬 넘어설 정도로 높았고, 특히 당권자가 지난 선거에 비해 두 배 가량 늘었다는 점에서 혹시 예측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하지만 이변은 없었다.

 

어차피 최선도 차선도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선거였다. 다른 당원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랬다. 비전과 함께 구체적 정책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은 최선일 것이다. 둘 다는 아니지만 어느 한쪽이라도 분명히 보여줄 수 있다면 차선은 될 터였다. 문제는 이번 선거에서 이 두 가지 모두를 보여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보여주는 사람 역시 극히 희소했다는 점 역시 문제였다.

 

80년대까지의 민주 반민주 구도 하의 투쟁에서 딱 정지되어버린 사고방식의 구호가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지금이 21세기인지 의심이 든 적도 있다. 계급문제가 가지고 있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음을 인정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까지도 소비에트혁명의 틀거리에서 찾는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갑자기 포스트모던을 들고 나오던 90년대 지식인의 모습에서 변절의 냄새를 맡았다면, 교조적 사고방식의 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곰팡내나는 구호들을 들어야 하는 것은 또한 얼마나 난망한 일인가.

 

개인적으로 이번 선거는 당원들의 피같은 당비로 활동비를 받아가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로서 과연 스스로가 당원들에게 희망을 주었는가라는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다. 전임 지도부의 난맥상에 대한 당원들의 비판이 있었고 이를 극복해야한다는 열의도 높았지만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그건 그 열의가 폭발되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할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리라. 그리고 그 책임을 져야할 사람 중의 하나로 나 자신의 무능력함이 있었을 것이고.

 

이처럼 무수한 실망이 밀려오는 선거였다. 자신에 대해서건 당에 대해서건. 그러나 그 와중에 희망적인 무언가가 있었다는 점 역시 평가를 해야할 것이다. 우선 당직선거에 대한 당원들의 높은 관심과 참여였다. 애초 이번 선거는 투표기간이 5일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원 과반수 참여율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선거인명부가 각 선거운동본부에 전달되거나 투표하지 않은 당원에 대한 집중적인 투표참여요청(전화나 문자메시지)이 이루어지는 등 비밀투표의 원칙이 훼손되는 일도 있었다.

 

과정상의 문제점은 개선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문제점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번 선거의 참여율은 예상 밖이었다. 무려 당권자의 70%가 넘는 당원들이 투표에 참여한 것이다. 물론 이같이 높은 참여율의 근저에는 당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당원들의 위기의식이 한 몫을 차지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는 위기가 아니었던가? 진보세력들에게는 언제나 서 있는 그 자리와 그 시기가 위기의 장소이고 위기의 시간이다. 당 역시 마찬가지다. 새삼스레 절체절명의 위기가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높은 참여율에 어떤 원인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혹자는 투표시스템의 개선이 참여를 유도했다고 하기도 한다. 사실 이번 선거과정에서 특히 인터넷 투표방식은 그동안의 인터넷 투표방식에 비해 진일보한 시스템이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인터넷 투표방식의 개선이 가져 오는 효용성은 투표에 참여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을 때에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즉, 그 방식의 차이가 투표율을 높이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번 선거에서 높은 투표율이 나타난 것은 바로 소위 말하는 '평당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 덕분이라고 판단한다. 정파조직은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가능한 한 최대한의 조직표를 형성할 수 있다. 이번 선거 역시도 그 조직표들이 나올만큼 나온 선거였다. 하지만 소위 '무정파'를 표방하면서 후보로 나선 사람들의 득표를 보면 당 내에서 정파조직의 의도와는 별개로 새로운 당의 모습을 원하는 당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파조직이 가지고 있는 폐해에도 불구하고 정파활동이 가지고 있는 일정한 기능을 전면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재 당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정파의 폐단은 그들의 구호가 일반의 상식을 담아내기보다는 정략적 기호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상식이 통용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상식이 통용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파적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보편적 관점을 가진 평당원들이 많이 늘어나야만 하고 이들이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해야 한다. 이번 선거가 보여준 희망은 바로 상식적 평당원들의 참여가 눈에 띌 정도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또한 이번 선거의 특징 중 하나는 후보들의 얼굴을 보고 표심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을 보고 판단하려는 움직임들이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늘었다는 점이다. 누가 어느 정파라더라 하는, 그 사람이 우리 편이라는 이런 식의 기준이 아니라 그 사람이 들고 나온 정책은 무엇인가, 그것이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에 부합하는가, 그 정책이 구체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꼼꼼이 들여다보는 당원들이 늘어났다. 이건 매우 중대한 변화의 조짐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앞으로 있을 모든 당직선거에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후보들이 엄청난 고생을 해야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말빨 좋은 사람들이 몇 번의 유세과정에서 당원들에게 호감을 사거나, 쪽수 많은 특정정파가 밀어준다는 이유만으로 일정 지분만큼을 먹고 들어가는 현상이 온전히 유지되기 힘든 상황이 가능하게 된다. 결국 후보들은 보다 구체적이고 선명한 비전을 제시해야만 하고 그로 인해 생산적인 논쟁의 장으로서 선거가 역할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희망보다는 실망이 많은 때이다. 하지만 수다한 실망스런 현상들 속에서 보여진 이 두근거리는 희망의 싹을 소중히 간직하고 키워야할 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잘 가꾸어진 희망의 나무들이 무럭 무럭 자라나면 언젠가는 차악이 누군가를 찾는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고 최선과 차선이 무엇인지를 찾는 시기가 도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인민에게 복무하는 당의 모습이 제대로 갖추어지기 시작할 것이고.

 

너무 조급한 마음이 앞섰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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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27 13:18 2006/01/27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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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래도 두가지 희망이라도 있다고 평가하시니 다행이네요.
    산오리는 두발쯤 멀어졌고, 또 멀어지고 싶으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네요..ㅎㅎ
    설 명절 잘 보내시길..

  2. 행인님 귀한 활동비에 일조한다는 생각에 후원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발견한 희망을 믿고, 인민에게 복무하는 몸과 신념을 믿고 함께 할께요. ^ ^

  3. 산오리/ 당에서 멀어지고 싶은 분들이 많더라구요. 민주노총과 전교조 등도 선거가 있는데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갑갑해지네요. 그래도 희망이라는 것을 항상 붙들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좀 편하잖아요 ^^;; 설명절 잘 보내세요~~~

    보라돌이/ 그래서 더욱 미안합니다. 더 열심히 뛰어서 당에 대한 보라돌이님의 후원이 아깝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언제나 함께 해주실 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설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