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계급투표를 이야기하기 전에...

인산(H3PO4)이라는 화합물이 있다. 비료의 원료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화합물인데, 이 외에도 식품의 향신료나 세제 등 화학제품을 만들기 위한 원료, 탄산음료 첨가물이나 치과치료용 물질 등으로 널리 사용된다. 주로 인산염의 형태로 암석상태에서 채취된다. 이 인산염으로 유명한 나라 중의 하나가 '토고(Togo)'다. 토고는 총수출의 거의 절반 정도를 이 인산염 수출로 해결하고 있다.

 

2006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토고라는 나라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나라였다.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본선에 진출한 토고는 그제서야 한국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프리미어리그를 즐겨보는 팬들은 월드컵 직전 AS모나코에서 아스날로 이적한 아데바요르를 통해 토고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축구의 변방이자 가난한 제3세계 국가인 토고는 이렇게 세계의 이목을 집중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한국과 본선리그 1차전에서 맞붙었던 토고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엄청난 뉴스를 만들고 있었다. 출전수당과 관련하여 감독과 선수가 경기 자체를 보이콧 할 수도 있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토고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오토 피스터는 경기를 불과 며칠 앞두고 잠적까지 하는 괴이한 행동을 보였다.

 

월드컵 원정전에서의 1승에 목말랐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적전분열을 보이고 있는 토고 대표팀의 자중지란이 내심 반가웠을 수도 있겠다. 일부 언론에서는 토고 국가대표팀에 대해 젯밥에 눈이 멀었다거나 조국의 명예조차 돈으로 대체하려는 파렴치한 집단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물론 이후 토고의 사정, 그리고 토고 대표단의 사정과 토고 축구협회의 사기질이 밝혀지면서 이러한 비판은 쑥 들어갔지만...

 

1차대전 이전까지 독일의 식민지였던 토고는 1차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재차 식민지배를 겪게 된다. 노예수출 거점 중 하나였고, 열강에 의해 식민지배를 당하고 2차 대전 후에는 국제연합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가 1960년에야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이 토고의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는 않았다.

 

연이은 암살과 쿠데타로 정정은 불안했고 1967년 냐싱베 에야데마가 쿠데타에 성공하여 대통령이 된다. 에야데마는 대통령과 국방장관을 겸임하였고, 1969년 토고 유일정당 '토고 인민당'의 당수가 되었다. 반대파를 수도 없이 투옥하거나 암살하였고 온갖 부정부패가 판을 쳤으나 1979년 국민지지율 99.9%라는 득표를 얻으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무려 38년 간의 철권통치 후 에야데마 냐싱베는 2005년 2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런데 에야데마가 사망하고 나자 이번엔 그 아들 파우레가 대통령직을 인계한다. 전형적인 세습왕조의 모습이다. 대통령 유고시 60일 이내에 차기 대선을 치루도록 되어 있는 토고의 헌법규정도 무시한 채,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판바레 나차바는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영공폐쇄조치로 입국조차 하지 못했고 군부를 등에 업은 파우레는 안정적으로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토고국민들은 이러한 대통령 승계에 반대하면서 죽음을 무릅쓴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부정선거를 통해 파우레는 선거에서 승리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이후 토고의 내정은 혼미한 상태로 빠지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과 군부가 충돌해 계속되는 유혈사태를 낳게 된다.

 

철권통치 독재세습왕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관계의 주요 요직을 대통령의 친인척이나 친분관계에 있는 자가 맡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수당문제를 야기시킨 록 냐싱베 토고 축구협회의 회장은 현 대통령의 동생이다. 록 냐싱베 휘하의 토고 축구협회는 국제적으로도 부정부패와 독직 등의 행위로 악명이 높다.

 

토고 축구협회는 국제축구연맹 FIFA로부터 연간 25만달러에 달하는 최빈국 축구보조금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돈은 토고의 14개에 달하는 축구클럽 어디에도 지원되지 않았다. 토고 축구협회는 이 외에도 스포츠 마케팅을 통해 연간 수십억원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고 냐싱베 형제가 소유한 방송사의 축구중계를 통해 상당한 수익을 보고 있지만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모두 냐싱베 형제나 축협 관계자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토고 축구협회의 난맥은 월드컵 본선이 시작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표출된다. 1인당 GNP가 연간 1675달러라는 IMF의 2005년 통계가 있음에도 실제 국민들의 생활은 훨씬 더 열악한 수준이라는 토고. 이 토고에서 아데바요르처럼 빅리그에 진출하지 못하고 국내리그에 남아 있는 프로 선수들은 월 10만원 안팎의 월급을 받아가면서 선수생활을 한다. 아직까지도 부족사회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주민 절반 이상이 전통적인 정령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선수들은 그 알량한 돈을 가지고 주렁주렁 딸린 식구(라기보다는 부족의 일원들)들을 먹여살려야하는 처지에 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선수들에게 지급되기로 했던 수당은 단지 선수 개인이 먹고 살기 위한 돈이 아니라 자기 뒤에 딸린 식구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그런데 토고 축구협회는 지급하기로 하고 이미 배정까지 마친 이 수당에 대해 완전히 꿩 궈먹은 자세로 일관하면서 선수들의 불안감을 야기한다.

 

결국 감독과 선수가 월드컵 본선 보이콧을 선언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부랴부랴 축구협회에서는 간부들을 보내 지급을 약속했고, FIFA 역시 수익금에서 토고 축구협회에 지급할 돈을 선지급하겠다는 등의 약속을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러한 조정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FIFA가 선지급했다는 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결국 선수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된다. FIFA는 만일 토고대표팀이 본선리그를 보이콧할 경우 토고가 상당기간 동안 FIFA가 주관하는 A매치에 출전하지 못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최빈국에게 지원되는 축구기금 역시 제공하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생존이 달려 있는 돈은 내보여주지 않은 채 "Show me the money"를 주장하는 선수들을 달래기 위해 달려온 토고 축구협회 관계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되는 "조국의 명예"를 들먹이며 일단 본선리그를 마쳐달라고 요구한다. 한국판 버전으로 이야기한다면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돈은 잠깐 잊고 "전사"가 되어 그라운드를 누벼달라는 요청이었다.

 

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토고 축구협회와 토고 국대의 갈등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예선 3경기를 토고는 내리 졌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인 토고에서 온 선수들은 끝까지 그라운드에서 자신들의 열정을 불살랐다. 그들 중 일부는 빅리그에서 러브콜을 받을 수 있겠지만 거의 2/3 이상의 선수들은 다시 월급 10만원 정도를 받으면서 자국 리그를 뛰게 될 것이다.

 

토고 국가대표들에 대해 "돈 밖에 모르는 파렴치한"이라거나 "조국의 명예조차도 돈으로 바꿀 인간들"이라는 욕지거리를 퍼붓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정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정을 몰랐다고 할지라도 프로선수, 즉 생계를 운동에 맡기고 뛰는 선수들의 입장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아마 이렇게 개념 버로우한 말들을 내뱉지는 못했을 거다. 뭐 "조국과 민족"이라면 갑자기 눈에 핏발이 서는 사람들 입장에서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지만서도...

 

지난 5.31 지방선거를 마친 후 어떤 이들은 왜 우리 노동자들은 계급투표를 하지 않는 것일까, 또는 계급투표를 일구어내기 위해선 어떤 대안이 필요한가 등등의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매우 미안한 이야기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가 형식적으로나마 공고화된 지금, 계급투표 운운하는 이야기는 매우 추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 아닌 말로 남한 내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노동자라는 계급적 각성을 하지 못해서 계급투표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분들 전혀 계산하지 않고 있다는 거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위치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한다. 그러나 그들이 선거시기에 "노동자의 대표"들에게 자신들의 표를 무작정 헌사하지는 않는다. 내가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대표에게 표를 준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내가 노동자라 할지라도 내 표는 내게 "이익"이 되는 대표에게 던질 것이라는 확실한 자기 포지셔닝을 하고 있는 거다.

 

다시 말해서 민주노동당이 지방선거에서 쓴 잔을 마신 이유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자성을 각성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되는 "이익"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국의 영광" 이전에 자신의 손만을 바라보고 있는 식구들에게 뭔가 들고 갈 것이 필요했던 토고의 국가대표 선수들.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면 "계급투표"를 하지 않은 노동자들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다.

 

보다 분명한 것은 "계급투표"를 이야기하기 전에 진정으로 당의 정치활동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비전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아야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비록 자신이 노동자라는 인식을 하고 있을지라도 당장 노동자의 대표를 찍는 것이 자신의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할 때는 언제든지 그 외의 대안에 눈을 돌리게 되어 있다. 그 이익을 한나라당이 준다고 판단한다면 한나라당을 찍을 수 있는 거고 열우당이 준다면 열우당을 찍을 수 있는 거다.

 

물론 이번 선거과정에서 나타난 민심의 동향은 노동자건 농민이거 서민이건 간에 희망을 줄 수 있는 대안을 택했다기 보다는 절망을 안겨준 자들에 대한 반감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뭐 언제는 안 그랬냐고 할 사람들도 있다. 물론, 구체적 대안을 검토하고 표를 행사하는 유권자보다는 언넘이 미운지, 그래서 미운넘은 찍지 않겠다고 하는 유권자의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더불어 자신의 모습이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을지라도 자신이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사람에게 대리만족의 표출로 표를 던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 역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들을 극복해내기 위한 시간은 아직 많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도 고민해야만 한다. 시민들의 힘이 미력하게나마 현실정치의 과정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 불과 30년도 채 되지 않은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서구사회가 200년이 넘게 진행해왔던 과정을 30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동안 이루어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가 50년 또는 100년 후의 미래를 구상하면서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줄 무엇인가를 차근차근 만들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당장의 표 몇 장을 더 벌기 위해 선무당 사람잡듯 기성 우익정당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야할 때이다.

 

국가대표 축구선수고 노동자고 간에 그들도 역시 가장 약한 인간의 단면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자. 토고 국가대표선수들을 민주투사로 비약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재로 점철된 자국의 정치상황과 족벌세습체제로 이루어지는 관료집단들의 횡포 속에서 침해당하고 있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스트라이크로 토고선수들의 보이콧 선언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오바일 것이다. 그러나 왜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에게 마음놓고 그라운드를 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해볼만 하다.

 

그 연장선상에서 "계급투표"를 하지 않는 노동자들을 어떻게 각성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생뚱맞은 모습보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우리를 지지할 수 있게 할 것인지를 숙고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덧 : 오토피스터는 사실 선수기용이나 전술구상에 있어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다. 반대로 아드복은 선수기용이나 전술구상에 있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별로 활용하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선택의 폭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던 토고는 비록 3패를 하였지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최대한 보여주었다. 반면 선택의 폭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남한 대표팀은 1승1무1패라는 성적을 거두면서 토고와 함께 짐을 쌌다.

 

당은 지금 어떤가? 선택의 여지가 원천적으로 그리 많지 않은 포지션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정체되는 것인가, 아니면 선택에 대한 선구안이 없어서 허다한 선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정체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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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4 21:36 2006/07/14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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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렇군요 >_< 역시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확실히 절망에 반하는 표 말고, 희망을 주는 표가 되어야 할 듯 >_< 에궁... P.S. 한국대표팀 좀 그래요 >_<:

  2. 동감하는 바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