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하나와 절망 하나
인간만사가 다 그렇다.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폭은 기쁨과 슬픔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듯 하다. 기쁜 맘은 잠시, 슬픈 마음은 오래... 그래서였던지 중국 속담에 "좋은 소식은 만나기 어렵고 나쁜 소식은 겹으로 온다"고 했나보다.
울다가 웃으면 X구멍에 털난다는데 현재 행인의 몸 상태를 볼 때 행인은 지난 세월 동안 울다가 웃기를 무쟈게 많이 했던 것 같다. 상상하지는 마시라. 쬐께 지저분하니끼니...
암튼 오늘 오후, 2 가지 뉴스가 한번은 절망을, 한번은 희망을 주었다. 또 울다가 웃게 되었던 거다. 털 더나게 생겼다...
1. 정말 젓같은 소식
헌법재판소가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과 제5항에 대해 합헌 판정을 내렸다.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와 이적표현물에 관한 죄가 여전히 헌법에 합치한다는 것이다.
일단 이번 사건, 고백하자면 우리 동생들이 제기한 헌법소원이었다. 작년 7월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난 우리 동생들... 바로 그 사건과 관련된 헌법소원이었다. 사실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헌법재판 자체가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 구조가 헌법의 정신에 합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법구조만으로 판단을 하더라도 이번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헌법재판소의 주된 판단기준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목적으로 (이적표현물을)소지한 경우"이다. 그런데 표현물을 소지, 배포하는 경우 그것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함으로써 사회전복의 위험성을 가중한다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가 "매우 긴박하고 위협적이며 구체적일 것"을 필요로 한다. 소위 '긴절한 위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현재 국가보안법의 규정은 이러한 구체적인 구성요건을 전혀 결여하고 있다. 다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목적"이라는 주관적 구성요건만을 적시하고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국가보안법의 이 규정은 구성요건이 명확하지 않은 채 자의적인 적용을 통해 형벌을 가능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형법의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을 정면으로 파괴하고 있는 악법조항이다. 그런데 이 조항이 지난 91년 개정을 통해 자의적이고 광범위한 적용의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판단하는 것이 이번 헌법재판소의 태도이다. 이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취하려다보니 헌법재판소는 여전히 어정쩡하고 추상적인 이유 하나를 덧붙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남북대치상황이라는 특수상황이다.
지난 시기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모든 헌법재판에서 이 이유는 단 한번도 빠진 적이 없다.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물론 헌법 자체가 바로 이 특수한 상황을 규정하고 있기는 하다. 즉, 헌법 전문이 그렇고 헌법 제3조와 4조가 그렇다. 이러한 규정은 바로 남북의 특수한 상황이 전제가 되어서 나오는 조문들이고 이 조문들은 실상 남한사회의 법률구조를 왜곡시키는 현상의 원천이 되어왔다. 대표적인 예가 남북교류협력법과 국가보안법의 관계다.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법체계가 이상한 헌법의 구조로 인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법체계의 왜곡은 둘째치고, 문제는 표현의 자유 또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라는 특별한 관계에서 보장되어야할 기본적 인권으로서 우리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데, 이러한 기본적 인권이 "긴절한 사유"도 없이 헌법의 일부 규정, 특히 헌법 제3조에 의해 왜곡되고 파괴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헌법 제37조는 기본권의 제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기본권이 특별한 상황에 의해 제한될지라도 본질적 내용을 침해해서는 안 됨을 명백하게 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같은 헌법규범구조 내에서 "긴절한 사유"도 없이 기본권 조항이 다른 조항으로 인해 본질적 내용까지 침해되는 현상을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번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이러한 원칙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고, "긴절한 사유" 없는 본질적 내용의 침해조차도 우리 헌법구조 내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국가보안법에 대한 판단기준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지독한 일관성이다. 그런데 그 일관성은 사실상 똥고집이다. 그나마 과거의 판결에서는 일부 반대의견이 개진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 한 명의 반대의견도 없이 전원일치의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기가막힐 노릇이다. 역사를 거꾸로 돌려가는 사람들...
2. 그나마 희망적인 소식
환경부가 천성산에 대한 "환경전문가 공동조사"에 합의했다고 한다. 사실상의 환경영향평가 재실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58일간 계속되고 있는 지율스님의 단식이 중단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기존 환경영향평가에 오류가 있었음을 정부가 시인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판단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만큼의 인정을 받아내기 위해 한 사람이 치루어야했던 초극적인 인내의 고통은 범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감내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2003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환경운동의 화두는 삼보일배였다. 새만금에서부터 서울까지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며,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는 동시에 인간의 욕심에 대한 참회의 대속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 세 명의 성직자들 역시 자기 몸에 극한의 고통을 부여하며 사람들의 가슴속을 울렸다.
지율스님이나 삼보일배를 한 그분들이나 어찌 보면 참으로 위험하고 너무나 무모한 방식을 선택했음은 분명하다. 죽음이라는 것을 옆구리에 끼고 사는 것이다. 지율스님의 경우 다시 곡기를 취한다고 해도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칫 잘못하면 몸을 상하게 될 수도 있다. 삼보일배하신 분들, 그 과정에서 수경스님 거의 죽다 살아났고, 나머지 두 분도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이번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 합의를 계기로 지율스님이 단식을 푸시기를 간구한다. 물론 만족스럽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해왔던 단식만으로도 지율스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요는 앞으로의 일인데, 앞으로 또다시 문제가 재발할 경우 지율스님이 아니라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힘을 모아 대처를 해야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저 또다시 잊혀진 사건이 되었다가 그래서 또다시 지율스님 혼자 단식하다가 매번 그랬던 것처럼 또 한 사람이 죽어나가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되는 그런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이다.
희망과 절망은 항상 교차한다. 그 교차의 지점에서 절망의 끝자락에 걸친 희망을 건져 올리고, 희망의 목덜미를 잡는 절망의 쇠사슬을 끊어낼 수 있어야겠다. 그리하여 희망은 현실로, 절망은 희망으로 전환시키는 지혜를 발휘한다면, 그리 된다면 우리 사는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한마디로, 어이없다. 난 적어도, 과거 위헌소원의 결정을 볼때 한정합헌 판결과 함께 소수의견으로 국가보안법 제7조 1항과 5항에 대한 위헌판결을 기대했었다. 위헌판결은 아니더라도, 국가
시험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