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치기의 추억
3학년 1학기가 거의 끝날 즈음이었다. 여러 곳에서 취업의뢰가 들어오고 있었고, 입사지원서가 날아왔다. 행인에게 온 것이 아니라 학과로 온 것인데, 이렇게 되면 빨리 나가는 녀석들은 고3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기 전에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행인은 그 때까지 입사지원서 한 장 받아보질 못했다. 음... 쪽팔리지만 그것은 순전히 성적때문이었다.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성적이 잘 나올리가 있나? 암튼 이 기회를 빌어서 그나마 어거지로 졸업이라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행인의 앞자리, 뒷자리, 양옆자리 같은 반 친구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여러분들의 크나큰 도움이 없었다면 어찌 답안지 한 귀퉁이라도 채워넣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쓸데 없이 자신의 답안지를 가리거나 정답확인의 주문을 거부한 의리없는(?) 넘덜도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다 용서한다. 흠흠...
나른하고 무료한 학교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뭔가 활력소가 필요한 때였던 거이다. 해서 죽이 잘맞아서 잘도 같이 돌아다니던 L이라는 친구넘과 작당을 했다. 조회가 끝나자마자 짝지에게 이야기해서 "나 학생과 갔다고 해라"하고는 교실을 빠져나왔다. "학생과 갔다"는 말은 각 교과목 선생님들께서 들어오셔서 출석을 부를 때 가장 효과적으로 빈자리를 변명할 수 있는 말로서, 이 말이 나오면 그냥 출석한 것으로 해결된다. 물론 행인과 같이 거의 수시로 학생과에 끌려가서 체육선생님이나 교련선생님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만 이 말로 만사를 해결할 수 있다. 범생이가 "학생과 갔다"고 하면 그 때는 난리난다. "아니, 걔가 왠일이냐?" 부터 시작해서 "어떤 넘이 갸를 괴롭혔나?"라는 전혀 연관성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사실확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암튼 이넘과 교실을 빠져나와서 행인은 바로 담을 탔다. 건물 바로 옆 담을 탔는데, 이넘의 담 높이가 약 3m 쪼금 못되는 정도가 된다. 행인의 짧은 기장으로는 점프해서 담에 손을 걸치기가 꽤나 어려운 높이였다. 좀 낮은 곳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선생님들이나 수위아저씨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을 택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마침 같이 담타기에 나섰던 L은 키가 2m에 육박하는 큰 키를 가지고 있는 넘이었다. 해서 이넘이 행인을 담 밑에서 밀어올렸고, 행인은 여유있게 담을 넘어 학교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영등포로 갔다. 오전 10시 좀 넘은 영등포 시장은 상가가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물품들이 들어가고 전시되고 하는 통에 엄청 북적거린다. 시장으로 향한 이유는 일단 이 시장이 먹거리가 많기도 하거니와 그 값도 싸서 부담이 적고, 학교 다니지 않고 마찌꼬바에서 일하던 넘들 일터가 가까와서 쉽게 만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막 가게 문을 연(사실 가게문을 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먹자골목 순대집으로 들어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두어병 가볍게 제끼고 나니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해서 도림동 쪽으로 슬슬 걸어가 마찌꼬바 골목 언저리 구멍가게에서 또 소주 한 병을 깠다. 점심시간이 되자 우리의 호프 공돌이들이 밥먹으로 기어나온다. 아는 넘 몇 넘이 어슬렁 거리고 나오기에 아주 아주 반갑게 인사를 하고 그넘들 밥먹는데 끼었다. 갸들은 근무시간이므로 밥을 먹고 우리는 쏘주를 마셨다. 주로 철공소에서 일하는 이넘들은 언제나 몸에서 쇠냄새가 났다. 용접할 때 나는 묘한 냄새 아니면 꼭 쌍코피를 터뜨렸을 때 나는 그 비릿한 냄새가 갸들 몸에서는 언제나 흘러나왔다. 행인과 같은 나이또래의 십대, 그 나이에 이넘들은 이미 살덩어리 속에 쇠기운을 심고, 십장이나 사장에게 몽키스패너로 주어 터지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허구헌날 야간근무에 잔업에 철야에 조출에... 그리고는 한 달에 기껏해야 10만원 정도의 임금을 받아가는 넘들이었다. 그넘들 등을 쳐서 쏘주잔 좋이 뺏어먹은 행인이다. 뭐 나중에 술 많이 사주기는 했지만서두...
암튼 이렇게 야들한테 쏘주 뺏어먹은 담에는 근처 술집으로 가서 이넘들 이름 대고 외상술 먹는다. 그 때만해도 술집 외상인심이 후해서 얼굴 몇 번 보고 돈 받을 구멍이 있다고 판단되면 외상술 펑펑 내주던 시절이니까. 거기서 한 잔... 그리고는 다시 영등포 시장으로 와서 본격적으로 장사시작한 먹자골목 떡볶이 집에서 오뎅국물을 해장국 삼아 소주 한잔 빨면 시간이 후떡 지나간다. 어지간히 퍼먹고 부랴부랴 종례시간에 맞춰 학교로 향했다. 그렇게 학교 가서 담치기를 딱 하면 담임선생님이 종례하러 들어오시기 직전에 교실 책상 앞에 앉아있을 수가 있다.
그런데 그 날은 술을 좀 과히 먹었던 모양이다. 날은 무진장 덥고 제대로 안주도 없이 술만 줄창 먹고 오다보니까 담을 타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밑에서 L이 계속 궁둥이를 밀어 올리는데도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이러다가는 종례시간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루트를 변경하기로 했다. 약간 담이 낮아지는 곳. 더구나 그 담을 넘으면 바로 담 앞에 옥외 화장실이 있다. 물론 푸세식인데 외관은 그래도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다만 금속과 교사실 창문이 바로 그 앞에 나있어서 선생님들에게 들킬 우려가 많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어쩌랴... 거기가 낫겠다. 그래서 장소를 옮기고 다시 L이 행인의 궁둥이를 밀어 올렸다. 낑낑대고 겨우 화장실 옥상에 올라탔다.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아무도 없다. 교사실에도 선생님들이 안계신다. 그래서 얼른 L에게 넘어와도 된다고 이야기를 했다. L이 성큼 뛰어올라 담 위에 손을 얹고 끙차 하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때...
"이넘덜~~!!"하는 불호령 소리가 들리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금속과 핸섬맨 선생님이 쇠파이프를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앗, 분명히 아무도 없었는데??? 그러나 분명히 선생님은 달려오고 있었고, 손에 들린 쇠파이프는 잠시후 인마살상용 무기로 전환될 태세를 갖추고 있음이 명료했다. 이건 아닌데... 별 수 없다. 막 상반신을 담 위로 올려놓은 L의 마빡을 발로 밀어버렸다. 털푸덕 소리가 났다. 그리고 번개같은 동작으로 행인도 담 밖으로 뛰어 내렸다. 그러다가 그만 발목을 삐고 말았다. 너무 아프니까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담 안에서 선생님의 얼굴이 불쑥 솟아 올랐다. 이 냥반이 담 넘어서까지 쫓아올려고 하나...
아픈거는 둘째 치고 튀기가 바빴다. "야, 이넘덜아, 거기 안서? 니들 얼굴 봤어~~!!" 아 시파 봤으면 어쩔건데, 현행이 아니면 선생님이라고 뭐 별 수 있겠냐고 씨부렁 거리면서 쌔가 빠지게 뛰기 시작했다. 골목길로 들어가 후다닥 피했는데, 다행히 쫓아오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장소나 또는 그 장소 근처에 이 선생님이 잠복근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담치기를 포기하고 학교 정문이 열릴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종례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기어코 학교 정문은 열리고야 말았다. "닫힌 교문을 열며" 수위아저씨가 우리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고, 그 눈초리를 온 등뙈리로 느끼면서 가방 가지러 교실로 들어갔다.
쩔룩거리는 다리를 끌며 교실로 올라가 가방을 챙기는데, 꽈짱넘(이넘은 고딩 입학 기념으로 술을 가르쳤던 바로 그넘이다)이 다가왔다.
그넘 : 야, 쉬파쉑귀야, 하루 종일 어딜 쳐 돌아다녔냐?
행인 : 몰라서 묻냐?
그넘 : 어느 정도껏 해야쥐, 담임 야마 빡돌아가지고 졸라 뭐라 하면서 나갔거덩. 넘 마 낼 주겄써...
행인 : 죽이라고 해라~~
그넘 : 이 쉑이 하루 종일 지 땜에 고생한 거 모르구...
행인 : 니가 먼 고생을 했는데?
그넘 : 3교시까지는 학생과 갔다는 말이 통하더란 말이지... 그런데 말여...
행인 : (흠칫 놀라며) 근데?
그넘 : 4교시가 교련시간 아니었냐...
행인 : 앗차!(교련선생님은 학생과 선생님이었다...)
그넘 : 니 짝지가 학생과 갔다고 이야기할라는 거 같길래 내가 너 학교 행사준비때문에 문예부실 갔다고 했지
행인 : (엄지손가락 쭉 내밀어 주며) 어 쒸, 넌 역시 잔대가리 짱이야~~!!
그넘 : 그런데 오늘 5교시 수학선생이 학교를 안 왔지 머냐...
행인 : 푸하하하하핫! 그거 끝장이네??
그넘 : 그게 아념 마! 그래서 그 대신 교련선생이 다시 들어왔어 쫘샤~!!
행인 : 허걱.... 아 쉬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넘 : 아직 안들어왔다고 했지
행인 : 그랬더니?
그넘 : 암말 없더군...
행인 : 휘휴...
그넘 : 클라이막스는 종례시간이었어
행인 : 아 쉬파 또 먼데? 담임이 머라 그래?
그넘 : 담임이 오늘 다른 선생들하고 무슨 일이 있었나 보더라고.
행인 :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넘 : 딴 선생들이 울 담임한테 너 반에 행인이라고 있쥐? 이 쉑기는 어떻게 하루에도 몇 번씩 학생과 갔다고 하고, 학생과 아니면 무슨 써클룸(동아리방) 갔다고 하고, 그것도 아니면 출석은 되어 있는데 오리무중이고 그넘은 도대체 머냐? 어쩌구 온갖 썰을 다 풀었나보더라구...
행인 : 아니 머 그런 $*&^%%*($&#$*$%* 가~!!!!
그넘 : 그래서 담임이 말여...
행인 : 머??? 머랬는데???
그넘 : 낼부텀 학생과로 등교하래...
행인 : 에이, 난 또 머라고... 조또 아니잖어??
그넘 :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행인 : 그럼 머가 중요한 건데???
그넘 : 너한테 입사지원서 안준대더라....
행인 : 끄어어어어어.......
발목 아픈 것이 완전히 잊혀지는 순간이었다....
행인님 입담의 끝은 어디일까... 참 궁금합니다.
입으로 담치기! 뭐 이정도까지 되지 않을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