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쩜셋을 기다리며...

책을 놓아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마침 후배녀석이 인조벽돌로 짠 책장이 그럴싸 하다고 이야기하는 통에 거금을 들여 인조벽돌로 책장을 짰다. 소위 조립식 벽돌이라고 하는 것인데 절대 돌이 아니라 플라스틱으로 벽돌 흉내를 낸 것이다.

암튼 일단 해놓으니 뽀다구는 나는데, 책장 칸칸이 놓아둔 합판이 책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어들어갔다. 이게 날이 갈 수록 정도가 더 심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날이 갈수록 책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요 며칠사이 아무래도 불안해서 이번주 일요일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책장을 분해해서 규모를 줄이고, 책꽂이를 더 장만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이 새벽...

불행인지 다행인지, 책장 바로 앞 잠자리에서 잠을 자려다 말고 티비를 보기 위해 현관쪽에 마련된 휴게실로 향했다. 흠흠...휴게실이라... 행인의 방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암튼 거기서 여자 핸드볼을 시청했다. 브라질과의 8강 경기였다. 브라질 선수들이 그렇게 썩 잘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후반들어 브라질 골키퍼가 신들린듯이 슛을 막아내며 점수차가 급격히 좁아지기 시작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행인은 졸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경기는 끝났고, 다른 경기가 진행중이었다. 아, 이젠 자야겠다. 이렇게 마음먹고 그냥 그 자리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우지직 하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린가 싶어서 귀를 기울이는데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자려고 하는데 다시 그 기분나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한번으로 그치질 않고 계속해서 우직 우지직 우지지직 하는 소리가 났다. 덜커덕 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해서 쥐가 들어왔나 싶었지만 까짓 쥐 쯤이야 먹을 거 없으면 그냥 나가겠지 싶어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우찌끈, 우당탕, 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가 마치 바닥이 내려 앉는 듯한 굉음이었기 때문에 놀란 마음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불을 켜자 방안은 완전히 폭격맞은 팔루자처럼 되어 있었다. 이런 줸장... 그런데 컴퓨터는 어떻게 저절로 켜진걸까??? 이넘의 컴퓨터가 지가 알아서 구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가관이다...

책꽂이는 인조벽돌이 깨져 나가 방바닥에 어지러이 튕겨져 있었고, 책들은 엎어지고 자빠진 상태로 방바닥에 겹겹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널부러진 책들 위로 광기가 슬쩍 보이는 눈초리의 푸코가 기분나쁜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가따리와 기가막힌 듯 담배를 쥔 손으로 마빡을 더듬고 있는 네그리가 보였으며, 어느 주간지 껍데기에 멍청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이명박이 보였다... 아 그리고 이 난장판 속에서도 의연하게 먼 곳을 응시하며 무표정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체 게바라의 잘생긴 얼굴도 섞여 있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이걸 어떻게 수습한단 말이냐, 이 오밤중에...

열받은 김에 당장 시공업체에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이넘의 영수증을 어디다가 팽개쳤는지 알 수가 없다. 우짜랴...

대충 정리만 했는데 암담하다... 넘 암담하니까 잠이 온다... 참 희한한 신경구조다.

자면 못일어나는데... 출근 못하는데...

이렇게 날 새고 가야하나... 그러자니 눈 앞에 보이는 이 난장판이 정말 어이가 없다.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위로해야겠따. 올림픽 안 보고 그냥 그자리에서 잤으면, 아마 행인은 책더미 아래 깔려서 놀라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뭐 그럭저럭 재수 좋아서 봉변을 면했으니 그러면 된 거 아닌가... 라고 애써 위로해봐도... 아 쉬파, 이런 줸장할 일이 있나... 우야면 좋노? 우야면 좋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