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쩜셋을 기다리며...

암튼 청운의 뜻을 품고 사회생활의 첫 발걸음을 뗀 역사적 사업장으로서 마이크로는 행인에게 각별한 추억을 안겨주었다. 세상이 얼마나 야박하고 더럽고 치사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 고마운 회사였던 거다. 행인은 회사 입사하면서 무척이나 기대에 가득 찼었더란다. 월급 받으면 이제 눈치 볼 것도 없이 술을 퍼마실 수 있겠구나. 선배사원들이 후배들에게 맨날맨날 쏘주 사주겠지. 이런 생각에 부풀었단 말이다. 그러나 그 꿈은 참으로 가당찮은 것이라는 것을 업무 시작하자마자 바로 알게 되었다.

출근은 아침 7시까지 해야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저녁 7시까지 근무가 이어진다. 야간조와 교대를 하는데 야간조 역시 12시간을 그렇게 일한다. 휴식시간은 오전에 10분, 오후에 10분. 대신 점심시간이 40분이다. 합이 1시간. 작업량이 많아서 쉬는 시간 이외의 시간에 화장실을 간다거나 하는 일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정규 근무시간이 12시간이었지만 이 정규근무시간이 제대로 지켜진 적은 거기서 일하는 동안 거의 없었다. 야간 잔업이라는 것이 따로 있었다. 저녁 7시 이후 10시나 12시까지 작업을 연장하는 것이 야간 잔업이었다. 야간조가 근무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 없다. 재수 없으면 철야를 한다. 말 그대로 꼬박 새우는 거다. 그런데 24시간을 일하고 나서 취침시간을 주지 않는다. 철야에 걸리면 그야말로 36시간을 내리 일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건 그나마 어린 나이니까 버틸만 했다. 그런데 조기출근이라는 것은 정말 쥐약이었다. 아침잠이 무쟈게 많은 행인은 새벽 6시, 심하면 5시에라도 출근을 해야하는 것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주야간 맞교대가 이루어지는 방식은 이렇다. 주간반은 일요일 아침에 출근을 해서 월요일 아침까지 철야를 한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7시에 퇴근... 그러면 그 전주에 야간을 했던 조는 일요일 아침에 퇴근하여 그날 하루를 보내고 월요일 아침부터 주간반으로 출근을 한다. 엄격하게 말해 휴일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더 골때리는 것은 야간반도 주간반과 똑같이 잔업이 있다는 거다. 잔업 걸린 날은 아침에 퇴근을 하지 못한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것도 모자라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 계속 일을 하는 날이 있는 거다.

이렇게 쌔가 빠지게 일을 하면 월급이라도 많이 줘야하는데 첫 날 일을 하다가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월급이 3개월 이상 미지급되고 있다는 거다. 3개월은 최소한이었고, 반장급은 벌써 반년, 과장급 이상은 무려 1년 정도 월급이 나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골때리는 거는 이렇게 임금이 지급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충청도 어디에 제2공장을 짓는데 거기에 돈이 다 들어가서라는 거다. 회사사람들이 불만이 높아지니까 순번을 돌아가면서 월급을 지급하는 것 같았는데, 그 수가 많지도 않았다.

이 회사에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행인에게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사람이다. 같은 인쇄파트(볼펜 등 필기구에 회사로고나 주문처가 요구하는 문구 등을 실크스크린으로 찍는 일)에서 일하던 여공이었다. 나이는 16살... 경북 어느 산골짜기에서 올라온 친구였는데, 이 회사에서 일한지 4년이 넘는 베테랑이었다. 4년... 그렇다면 이 여공은 12살 때부터 이 무지막지한 일을 해왔던 거다. 약간 말을 더듬고, 눈이 사시였는데 항상 밝게 웃고 매우 적극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친구였다. 이 여공이 받는 월급이 한 달 약 14만원 남짓...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기숙사비 50000원과 식비25000원(30000원이었던가?)를 빼면 8만원이 채 못되는 월급을 수령한다. 이 착하디 착한 친구는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에서 꼬박 꼬박 5만원씩을 집으로 부친다. 그리고 나름대로 나머지 돈에서 상당한 금액을 저축한다. 한달에 용돈으로 쓰는 돈이 약 1만원 정도... 16살의 여공이다. 그 또래의 다른 여자애들이 한참 중학교 다니면서 고등학교 입시를 걱정하고 떡볶이며 순대를 찾아먹고, 희한한 악세사리에 눈이 갈 그런 나이에 이 친구는 이 공장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던 거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취직해서 술 많이 퍼먹는다는 것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회사사정(?)으로 인하여 역시 행인도 월급을 받지 못했다. 3개월을 그렇게 지나갔다. 추석이 다가왔는데도 보너스는 커녕 귀향할 차비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어차피 행인은 이 회사에서 뼈를 묻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관리자들과 치고 박기 일쑤였다. 야간근무할 때마다 같이 입사한 친구넘과 밤 새도록 고래 고래 노래를 불러제꼈고, 그 덕분에 노래실력이 급상승하는 효과마저 누렸다. 처음 노래를 시작했을 때는 관리자들이 와서 뭐라고 했는데, 몇 차례 성질을 내고 뒤집어 엎었더니 나중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친구넘과 돌아가며 한 곡씩 주고 받았는데, 당시 유행하던 유행가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뽕짝은 물론 타령까지 나오게 되었고, 이게 그나마 인기를 끌어서 같이 일하는 다른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노래를 불러 제끼는 통에 야간근무 들어가면 밤마다 노래자랑이 펼쳐졌다.

잔업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잠을 자야 하는데, 공장 바닥에 보루박스를 깔고 그냥 잔다. 기름과 물이 축축한 공장 바닥, 바로 옆에서는 기계가 돌아가고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지만 잠은 기가막히게 잘 수 있었다. 야간근무할 때는 잠을 잘 수가 없기 때문에 노래라도 불러야 잠이 달아날 수 있었다. 이렇게 일을 하던 와중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는데, 일부 사원들이 쟁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이 탄로나면서 죄다 경찰에 붙들려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첨에는 비밀리에 준비했던 일이었는데 어용노조 간부가 자신들이 돕겠다며 끼어들어 상황을 파악했고, 이것을 경영진에 알리고 경영진은 경찰에 알려 일이 그렇게 되버린 거다. 분신사고가 터진지 불과 1년 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라서 경영진과 경찰의 대응은 매우 신속했고 강력했다.

이 꼬라지를 보다가 행인은 도저히 견디질 못하고 사표를 썼다. 물론 그 안에서 조직화를 하고 투쟁을 전개할 수도 있었겠지만 행인은 그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생양아치에 불과했다. 노조고 쥐랄이고 그런 거 모르고 밀린 월급이나 받아갈 욕심으로 허구헌 날 사무실을 쳐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겨우 받은 것이 한 달치 월급이었다. 나머지는 회사 정상화된 후에 주겠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받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받을 수 없을 거다. 회사 망했으니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 고생을 하면서 받은 돈이 98,000원이었다... 10만원 약간 넘는 돈이었는데 그 알량한 월급에서도 세금떼고 밥값 떼고 하니까 손에 떨어진 돈이 10만원도 안 되었던 것이다. 남아 있던 친구들에게 나머지 월급은 니들이 타서 쏘주나 마셔라 하고서는 그 한달치 월급만으로 끝을 내기로 했던 행인이었다. 그나마도 더럽다고 안 받을 수도 있었지만 지랄 발광을 하면서 그나마라도 받아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부모님 때문이었다. 취업했다는 아들넘이 그래도 직장 다녔던 표는 내야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사회생활 한 기념으로 월급 쪼개서 빨간 내복이라도 선물해야 면목이 서지 않겠는가 말이다.

암튼 그렇게 받아낸 돈으로 같이 공장생활을 하다가 같이 그만 둔 친구넘들과 시장엘 갔다. 외할머니랑 어머니 드릴 내복 한벌씩, 그리고 아부지 드릴 술 한병 사고 나니 달리 뭐 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나머지 돈 죄다 모아서 쏘주집으로 향했다. 빨간 진로를 도열시키고 지지고 볶고 먹고 마시고, 그러면서 비싸게 치룬 사회생활의 첫 경험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떠들었다. 쏘주집 한 곳에서 1차 2차 3차를 했다. 테이블 위로 소주병이 꽉 차면 다른 자리로 이동해서 또 테이블 위에 소주병을 꽉 채우고... 그렇게 대여섯 명이서 쏘주집 한 곳의 소주를 다 비우고 나왔다. 그런데 행인도 그렇지만 그 날 술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간 넘은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술이 쌔서가 아니었을 거다. 앞으로 살아나갈 걱정, 세상에 대한 희망과 절망,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런 것들로 인해 술이 핏속으로 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로공단에서 지낸 3개월의 그 짧은 시간. 비록 생각했던 것만큼 많은 술을 마시진 못했지만 분명했던 것은 지나온 세월동안 보았던 세상과 앞으로 부딪치게 될 세상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행인에게 각인시켜주었던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 분기점을 기준으로 이전의 행인과 앞으로의 행인이 또 달라졌던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