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한 시대의 마감

한달간의 대장정이 끝났다. 유로 2000의 재판이 될 것인가, 승부차기의 악몽을 끊어낼 것인가로 흥미를 자아냈던 결승전이 축구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면서 끝났다. 그리고 행인의 축구이야기가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무슨 이야긴지 궁금하시면 눌러주사와...)

 

축구가 재밌는 이유는 수십가지, 아니 어쩌면 수백가지가 될 수도 있다. 화려한 선수들의 묘기와 같은 공 다루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이유들 중 가장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호나우딩요나 크리스티안 호날두처럼 화려한 개인기를 보는 것은 행복하다. 그러나 이것만 있다면 11명이 뛰는 축구의 진정한 맛은 느낄 수 없다.

 

베컴이나 카카가 찔러주는 면도날 같은 크로스를 보라. 수비수 사이에서 상대를 흔들며 뒤에서 돌아들어오는 선수들에게 귀신처럼 흘려주는 호나우딩요나 지단의 힐패스는 또 어떤가? 발끝의 각도만으로 사각이라고 여겨질만한 구석에서 골인을 만들어 내는 앙리나 호비뉴의 슛은 '아름답다'는 감탄이 흘러나올만도 하다. 대포알처럼 터지는 또띠나 포돌스키의 강력한 중거리 슛은 막힌 가슴을 뻥 뚫어줄만한 것이다.

 

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머리로, 가슴으로, 무릎으로, 등으로... 필드 안에서는 손을 쓸 수 없지만 드로우인을 할 때의 손쓰는 기술, 골키퍼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정확한 송구 역시 공을 다루는 기술이다. 아무튼 온통 공 안에 쏟아지는 선수들의 집념과 자신만의 기술이 11인 11색으로 빛나는 것이 축구일 것이다.

 

축구에서 공을 잘 다루는 선수는 일단 주목받는다. 여기에 더해 경기를 읽고 해석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까지 있는 선수라면 그는 축구 팬들에게 영웅으로 승격된다. 더 나가 경기가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직접 그 경기의 흐름을 풀어나가는 능력까지 갖추게 되면 그는 곧 전설(legend)이 된다.

 

축구 역사상 명멸해간 무수한 전설들이 있다. 골키퍼의 전설 '레프 야신(Lev Ivanovich Yashin)'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전설 중의 전설이다. 월드컵 경기 중 가장 뛰어난 선방을 보여준 골키퍼에게 주어지는 야신상이 이 레프 야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상이라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거미손'이라 불리웠던, 또는 에우제비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기의 골키퍼'라고 불리웠던, 그리하여 전 세계 축구팬들로부터 '골키퍼 중의 골키퍼', '골키퍼의 신'이라 불리고 있는 야신은 축구가 낳은 전설 중 한명임이 분명하다.

 

Edson Arantes Do Nascimento라는 긴 이름을 가진 사람. 그러나 본명보다는 우리에게 '펠레(Pele)'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전설의 선수가 있다. 근래에는 당대의 뛰어난 실력보다는 '펠레의 저주'로 더 잘 알려진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3회에 걸친 우승으로 줄리메컵을 영구소유하게 된 브라질 대표팀의 최고 선수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행복을 전해준 사람이었다. 펠레의 플레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린 아이였을 때도 '축구'하면 '펠레'라는 등식이 고정관념으로 박힐 정도로 살아서 전설이 되어버린 선수다.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는 또 어떤가? 86년 월드컵 당시 잉글랜드와의 8강전. 키 188cm의 잉글랜드 골키퍼 피터 실튼과 정면에서 맞붙게 된 166cm의 단신 마라도나는 그 유명한 '신의 손' 사건을 일으킨다. 분명 마라도나는 손을 사용했고, 이후 인터뷰에서 "그 골은 신이 넣은 것이다"라는 묘한 말로 의혹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논란의 골만 있었다면 마라도나는 속임수를 쓴 선수 정도로 남을 뻔 했다. 마라도나는 후반 중반, 하프라인에서부터 6명의 잉글랜드 선수를 제끼면서 혼자 치고 들어가 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아르헨티나에 두번째 우승컵을 안겨준다.

 

악동으로 소문이 나기도 했지만 마라도나의 경기를 본 사람들에게는 그 단신의 다부진 몸매를 자랑하는 검은 머리카락의 선수가 공을 몸에 붙이고 다니는 모습이 기억 속에 박히게 된다. 지금도 인터넷 곳곳에 떠도는 마라도나의 경기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는 경기장 안에서도 전설이었고, 경기장 밖에서도 전설이었다. 이번 월드컵 기간 중 아르헨티나를 정렬적으로 응원하던 마라도나를 보면서 추억에 잠긴 축구팬들 부지기술 거다. 등번호 10번이 해야할 역할의 교과서였던 마라도나...

 

어디 이 사람들 뿐인가? 오렌지군단 토탈사커의 핵이었던 요한크루이프, 아트사커의 정점이었던 미셸 플라티니, 경기장 어디나 그가 있었다고 칭송되는 파울로 로시, 전차군단의 초특급 리베로 프란츠 베켄바우어... 이런 선수들의 플레이를 바라보며 열광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다음 세대들에게 구전할 전설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전설을 직접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다음 세대들에게 부러움을 사게 된다.

 

오늘 새벽, 2006 월드컵 결승전에서 후반 6분, 뢰블레의 지주 지단은 경기장에 나와있던 월드컵을 뒤로 한 채 쓸쓸히 퇴장당했다. 생애 마지막 경기를 레드카드로 마감한 지단. 마테라치가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상황에서 지단은 갑자기 마테라치의 가슴을 머리로 들이받아버렸다. 마테라치가 뭐라고 했는지는 아직 뉴스에 나오지 않고 있다. 어쨌든 지단은 퇴장 당했고, 프랑스는 승부차기 끝에 이탈리아에 패배했다.

 

마테라치를 들이받는 지단... 도대체 뭔 일이???

 

지네딘 지단. 이미 20살 무렵에 미셸 플라티니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던 지단. 1998년 월드컵에서 펠레로부터 가장 주목해야할 선수로 지목된 지단. 유벤투스에서 보여줬던 그 화려한 플레이는 1998년 월드컵, 유로 2000에서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진면목을 선사하게 된다. 98월드컵과 유로2000을 기억하는  축구팬이라면 프랑스의 모든 플레이가 지단의 발끝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을 상기할 것이다. 그는 진정한 그라운드의 지휘자였다.

 

2002 월드컵에서는 한국과의 평가전에서 김남일과 부딪쳐 얻은 부상으로 인해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었고, 지휘자 지단을 잃어버린 프랑스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해 16강에도 못가는 불행에 빠지게 되었다. 연봉 90억원에 이르는 지단이 치료비를 요구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내 연봉에서 까라고 해"라고 했던 김남일의 대찬 답변이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지단이 가진 능력은 사실 어느 누구와 비교하기 힘들다. 그는 경기를 읽을 줄 알았고, 매듭을 어떻게 풀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이 있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브라질과의 8강전은 지단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 가장 적절한 예였다. 브라질은 감독의 어처구니없는 전술상의 판단미스와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호나우두의 발걸음이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마저 둔화시키는 등 기대치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하나 지단이 풀어나가는 필드의 마법은 은하계 대표급의 브라질 선수들마저도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승전. 퇴장당하기 직전까지 지단은 98년 월드컵과 유로 2000에서 보여줬던 그의 능력을 다시 한 번 과시하고 있었다. 대표팀 은퇴까지 했다가 나락에 빠진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고, 초반의 경기력 난조로 인해 지단이 없는 프랑스팀을 만들었어야 한다는 둥 늙은 닭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는 둥의 비판까지 받았던 지단. 그러나 그는 그 모든 비판을 무색하게 하면서 결승까지 올라왔고 전반에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면서 생애 마지막 경기를 화려하게 장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전적'으로 수비능력을 갖춘 이탈리아의 선수들은 지단이 공을 잡을 때마다 두 명 세 명씩 몰려들었지만 지단은 이들의 발끝을 무기력하게 만들면서 여러 차례 찬스를 만들어 냈다. 34세라는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담당한 축구선수로서는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단은 그의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태우고 있었다.

 

연장전반 14분경 그의 머리는 한 순간 빛나며 오른쪽 윙에서 올라온 공을 골대 안으로 돌려놓았다. 한 마리 새처럼 날아올라 공을 건드리는 그의 헤딩 폼은 한 폭의 그림이었고, 헤딩은 이렇게 해야한다는 교과서였다. 그러나 그 슛은 현역 세계 최강 골키퍼라고 불리는 부폰의 오른손끝에 걸쳐지면서 골대 위로 솟구쳐버렸다. 가장 화려한 공격에 가장 화려한 방어였다. 사실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새벽에 일어나 축구를 본 보람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경기가 끝난 후 감격에 겨워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는 이탈리아 선수들 옆에는 허무함에 움직일 줄 모르는 프랑스 선수들이 있었다. 페널티킥을 실축한 트레제게는 동료들의 위로를 받았지만 그 얼굴엔 슬픔과 자책과 아쉬움이 모두 드러나고 있었다. 골대 앞에 주저앉은 바르테즈는 넋이 나가 있었고 마켈렐레는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걸음으로 그라운드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지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피파컵을 뒤로 한채 그라운드를 빠져나가던 지단.

 

하지만 생애 마지막 경기에서 빨간 딱지를 받았다고 해서 지단의 명성이 내려앉을 것같지는 않다. 그가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우리는 모두 행복했다. 그의 발 끝에서 밀려나간 공이 상대선수들이 경악하는 순간 동료의 발에 닿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환호했다. 멀리서도 확연하게 다른 선수들과 구별되는 그의 머리를 볼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기대에 젖었었다. 이제 많은 축구팬은 그의 다음 세대들에게 지단의 화려했던 모습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가 행복했다면 우리 다음 세대들은 지단이라는 전설 하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07/10 11:37 2006/07/10 11:37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hi/trackback/555
  1. ㅎㅎ 월드컵 끝나기가 무섭게~~ 쏟아내시는군요. 재미난 얘기 계속 기대할께요! 그간 참으시니라 힘들었겠어요..ㅋㅋ

  2. 그래도 축구는 별로 재미 없어요.. 골대 좀 넓히기 운동을 하면 어떨까요? 두시간동안 한골도 안들어가는 걸 무슨 재미로 보고 있대요? 그래도 두어시간 경기하면 한팀에 7, 8점 쯤 골이 나면 재밋을거 같은데...ㅎㅎ

  3. re/ 헉... 지송함돠... 그만 참다 참다... 생각날 때마다 포스팅 하나씩 업뎃 하죠. 많은 응원 부탁드림돠~~!! ^^

    산오리/ ㅎㅎㅎ 골 가뭄 덕분에 축구가 전반적으로 재미없어지는 것은 맞습니다. 국가대항전에서뿐만 아니라 요즘은 빅리그에서도 전력투구보다는 지키기가 대세인지라...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한 이탈리아는 오히려 변색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게 되었죠. 싸이클이 있는 것 같더라구요. 언젠가는 또 공격적이고 골이 많이 나오는 게임이 대세를 이루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ㅎㅎ

  4. 수비 축구라도 이탈리아는 멋있었다고 봐요 >_<;

  5. 에밀리오/ 이탈리아축구가 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역시 그닥 재미있는 축구를 한다고 하긴 좀 그렇구요. 다만 이번 월드컵에서 이탈리아팀을 생각하면 깐나바로가 바로 머리에 떠오르죠. 이번 월드컵은 누가 뭐래도 깐나바로의 월드컵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