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폐인의 길

지난 번 포스트의 댓글에서 '말걸기'님이 기냥 공 날라다니는 거 잼나게 보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셨는데, 거기에 축구 폐인이 되는 5단계에 대해 간단히 답글을 남겼었다.

 

(행인식 축구폐인과정 : 공 날라다니는 거 보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은 축구를 좋아하게 되는 1단계. 선수들을 분석하기 시작하면 2단계 돌입. 응원하는 클럽이 생기고 그 클럽에 대한 역사와 인물들을 확인하게 되는 단계가 3단계. 축구에 얽힌 이야기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하면 4단계. 자나 깨나 축구만 생각하고 축구만 보고 축구만 하는 단계는 폐인단계)

 

물론 그 5단계라는 거이가 축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인데, 특히 기록의 경기라고 일컬어지는 야구의 경우 마지막 5단계에 돌입해서 사는 사람들 숱하게 봤다. 생각해보니 재밌는 것은 축구폐인들은 아직 한 명도 본 적이 없다는 거다. 거 참 신기한 일 아닌가? 게다가 행인 스스로 생각해봐도 행인은 아직 축구폐인의 단계에 올라선 것같지는 않다. 3단계에서 4단계 사이라고나 할까...

 

K리그에서도 서포터즈라는 팬들의 집단은 '12번째 선수'라는 별칭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히 메니아들의 집합체라고 보기에는 이들의 열정과 참여는 대단한 것이다. 국가단위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붉은 악마'도 있다. 이들 역시 국대에 대한 열정과 참여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될만하다. 행인은 글쎄... 서포터즈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참 대단하다고 평가하지만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그 집단적 획일성은 어쩐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응원에 신경쓰다보면 경기 자체에 집중하질 못한다고 할까, 그런 면이 있다.

 

그 서포터즈들 중에서 자나 깨나 축구만 생각하고 축구만 보고 축구만 하는 단계의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행인이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는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직업적으로 축구와 연관된 사람들은 제외다. 그 사람들은 당연히 자나 깨나 축구만 생각하는 것이 취미가 아닌 '일'일테니까. 뭔가 하나에 재미를 붙이고 거기에 자신의 열정을 바친다는 것은 말이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축구폐인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에 대해 매우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은 이런 거다. "그런 사람들은 욕구불만이 되고, 여자들과 사귀지 못하며, 변변치 못하고 야만스러운 소리나 지껄이고,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며, 자녀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그러다가 외롭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이다."

 

자전적 축구광의 이야기 "피버피치(Fever Pitch)"에서 닉 혼비(Nick Hornby)가 한 말이다. 이 정도 수준이 되면 말 그대로 "폐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왜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기냥 모든 것이 축구 아니면 연관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심지어 연애질까지도 축구와 연관을 짓게 된다. 축구가 빠지면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하게 되고, 리그 경기가 없는 날이면 우울해지거나 공황에 빠지게 되며, 응원하는 팀이 졸전을 펼치다가 경기를 망쳐버리는 날이면 성질이 풀릴 때까지 다른 사람을 괴롭히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행인의 주변에는 축구때문에 이런 현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없다. 그런데 야구때문에 이러는 사람들은 종종 본 적이 있다. 그건 남한 사회에서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가지고 있는 비중의 차이때문일 수도 있다. 국가대표 축구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기장은 만원이 되고 TV마다 난리 굿을 한다. 지난번의 한 평가전은 세상에나, 방송 3사가 전부 몇 시간씩을 할애해서 국대평가전을 보여준 바도 있다. 축구를 누구보다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행인이지만 이런 꼴 보면 축구고 뭐고 신경질부터 난다.

 

그런데 이 방송사들, 야구경기만큼의 비중으로 K리그 경기를 보여주는 것 같지는 않다. 국내 리그 경기를 공중파에서 보여주는 것도 그닥 흔한 일은 아니지만 방송사들의 이런 경향은 축구에 대한 관심 자체를 형성해주지 못한다. 예컨대, 행인의 경우가 그렇다. 행인은 1989년 일화프로구단이 출범한 이후 천안에서 성남으로 연고를 옮긴 지금까지 천마의 펜이다. 물론 행인은 통일교와 전혀 관계가 없으며 천안이나 성남하고도 지역적인 관련이 전혀 없다. 그러나 그 팀의 칼라가 좋았고, 그 팀의 선수들이 좋았다. 그래서 펜이 되었고 지금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펜이라고 해서 일화의 홈경기를 내내 찾아가서 보는 것은 고사하고 원정경기는 말할 것도 없이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 먹고사니즘의 절박함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본질적으로는 행인의 축구에 대한 열정이라는 것이 위의 1단계 내지 2단계 초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TV를 돌려보지만 그걸로는 한계가 있다. 그게 뭔가 하면 바로 일관된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거다.

 

선수들의 기량이라는 것은 경기 때마다 다르다. 물론 기본적인 선수들의 독특한 스타일이 존재하지만 날씨, 경기장의 위치, 잔디의 상태, 경기일정, 부상, 경고나 퇴장, 감독의 작전스타일 등의 요인에 따라 어떤 선수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때도 있고, 어떤 선수는 백업멤버정도로 여겼었는데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실력을 발휘하는 날도 있다. 그러다보니 그때 그때의 변수들을 고려하면서 경기를 파악하는 것도 축구를 보는 맛이 있는 것인데, 이게 영 여의칠 않게 되는 거다.

 

토트넘이 아스날과의 혈전을 벌였던 어제. 1대1로 비기긴 했지만 두 팀의 경기는 예전과는 상당히 다른 맛을 보여주었다. 앙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토트넘의 페이스. 평소 아스날의 미드필더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아기자기한 경기운영은 별로 없었고, 아데르바요에 의존하는 중앙돌파만 간간히 눈에 띌 정도였다. 그러나 앙리가 등장한 이후 경기의 내용은 욜 감독으로 하여금 킹이 빈자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게 할 정도로 토트넘의 우왕좌왕이 보였다. 그런데 이런 분석을 하기 위해선 적어도 그들의 경기를 계속해서 볼 수 있어야 가능하다. 멘유와 토트넘 전문채널이 되어버린 MBC ESPN의 덕분이겠지만 바로 이 점에서 K리그에 대한 축구펜들의 관심이 왜 이렇게 낮은가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주변에 축구 폐인이 없다는 점에 대해 불만은 없다. 오히려 아직 폐인의 단계에 들어서지 않은 입장에서, 아니 폐인이 될 마음이 별로 없는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뭐 폐인이 있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게 될 것 같지도 않다. 가끔은 그런 사람과 함께 챔피언스리그 8강 경기 올림피끄 리옹과  AC밀란의 경기 후반전 인저리타임때, 골키퍼까지 제친 세브첸코가 사각에서 슛을 성공시킨 것을 가지고 신나게 떠들 수 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 어제 아스날과 토트넘 전에서 보여준 앙리의 오른발 아웃프론트 토킥이 멋지게 토트넘의 골대 안으로 빨려들어갔던 것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닥 나쁜 일은 아닐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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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3 20:50 2006/04/23 2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