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주의의 원류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소리를 뷁스럽게 여기기까지 그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던가? 30대 중반을 넘어선 사람들 중 일부는 시험시간에 이 현란한 생명탄생의 비밀을 외워서 적어내야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만일 이 출생의 비밀을 제대로 적어내지 못하면 출생때 겪었던 아픔과 비슷한 아픔이 엉덩이나 기타 신체부위에 발생했던 일도 있었다. 그 철저한 각성의 결과, 그만 우리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철석같이 믿어버리고 만 사람들도 상당수 된다.

 

사실, 뭐 우리가 그런 "역사적 사명" 씩이나 띠고 태어났겠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그런데, "한민족" 구성원들의 출생의 비밀을 밝혀주고 있는 이 "국민교육헌장"이라는 시대의 선언은 독특하게도 구구절절히 집단주의적 교양작업에 충실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창시절, 장기자랑시간에 애국가를 뽕짝으로 불러제끼다가 뒈지지 않을 정도로 두드려 맞은 아픈 전력을 가진 행인. 그나마 "역사적 사명"에 충실하고자 한 보람이 있어 이 국민교육헌장을 줄줄이 외웠던 바, 글쎄 그게 지금까지 죄다 기억난다는 거 아닌가? 그리하여 이 나른한 오후에 도대체 이 감격스러운 문장으로 점철되어 있는 고금 유래없는 글이, '토황소격문'을 능가하는 박력을 가지고 있는 이 글이 뷁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인지 살펴볼란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 뭐, 그렇다는데 별 수 있나? 그러려니 해야지. 그런데 정말 그러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올시다다. 아닌 말로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를 가지기 위한 원재료 믹싱작업을 할 때, 그 작업의 결과물로 민족중흥을 이뤄보자는 굳은 결의 함께 다지며 작업을 하셨단 말인가? 그로부터 10달 후 우리가 태어날 때, 감격에 겨운 부모님이 "드디어 민족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라고 환호하며 만세삼창이라도 불렀단 말인가? 솔직히 얘기해서 내 주변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 들어본 바도 없고, 나 또한 그런 거 본 적도 없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이다.

→ 뭐 좋은 이야기다. 다만, 살리려면 조상의 빛난 얼만 살릴 것이 아니라 조상의 쪽팔린 역사 역시 살펴야 한다.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구성된 이 구절에서 "개인"이 끼어들 자리는 없음을 지적할 수 있지만, 그거야 어차피 "헌장"의 내용을 다 들여다보면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이므로 패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 기대된다. 우리의 나아갈 바가 과연 무엇일까나??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 브라보~! 이 뷁스런 헌장의 각 구절 중 유일무이하게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은 딱 요부분이다. 얼마나 좋은지 전율이 흐를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등등등을 길러서?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고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며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정신을 북돋운다.

→ 자, 학문과 기술을 배워서 소질 계발하고 정신무장까지 했다. 그 다음 해야할 것은 자기발전이나 뭐 이런 것이 아니다. "공익과 질서"가 중요하다. 마빡에 먹물 좀 들었다고 인권이니 권리니 이런 거 이야기할 때가 아닌 거다. 상부상조 하고 협동하는 정신, 이게 중요하단다. 딴 거 필요 없고 상부상조 협동 이거 하잔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

→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란다. 정말 그럴까?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된지 벌써 30년이 흘렀다. 그동안 나라 엄청나게 "융성"했다. 원래 뿌리(근본)가 "융성"하면 가지고 잎이고 꽃이고 다 "발전"해야하는 것이 정상.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근본은 융성해졌는데 사람들은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진다고 아우성이다. 노동자들의 눈물은 갈수록 더 "융성"해지고 못가진 사람들은 발전 커녕 당장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책임과 의무를 다 했는데 어떻게 된 조환지 자유와 권리가 그만큼 존중되지는 않고 있다.

 

게다가 국민정신이라뉘... 도대체 이 국민정신은 어떤 정신인가? 제 몸이 깨지던 말던 국가를 위해 "국가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이 국민정신인가? 거 참 신기한 일이다... 춘원이 조선민중의 정신개조를 요구했던 바, 그 다른 말이 국민정신이었던가??

 

이게 국민정신의 내용이라고 한다면 그런 국민정신 갖추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는 표현과 정 반대의 표현이 있다.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공동체" 아실 분들은 다 아시지만 공산당 선언 마지막 문장의 한 부분이다. 개인들의 끊임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집단주의 정서, 공산당 선언에 따르면 이러한 정서가 바로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모습이다. 이거 좋은 거냐?

 

반공 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 국민정신의 본질. 투철한 애국애족. 그게 바로 삶의 길. 그런데 이게 "자유세계의 이상"과 무슨 상관?? 사실 "자유세계의 이상"이라는 것은 문장 앞부분, "반공민주정신" 이거다. 즉, 빨갱이는 사정없이 때려잡아야한다는 것. 행인이나 행인보다 더 빨갛게 물들어 있는 일부 빨갱이들에게는 공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문득 드는 의문. "자유세계의 이상"은 왜 사상의 자유를 거부할까? 왜 반공하는 게 "애국애족"일까?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역사를 창조하자.

→ 조국, 국민, 민족, 역사... 아무튼 앞에서 열거된 그 수많은 노력들은 결국 "~창조하자"라는 구호를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이 문장들을 죄다 엮어서 한 번 보자. 결론이 뭔가? 오로지 조국, 오로지 민족이다. 인류공영은 민족중흥의 반사적 효과. 민족중흥이 되서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면 좋은 거고 이바지 못해도 본전이다. 이 와중에 인권이나 기본적 권리나 각자의 행복추구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원흉이 된다.

 

요샌 학교에서도 이 헌장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이 헌장을 상기하면서 박정희의 치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웹 서핑하다가 발견한 어떤 까페의 글... 국민교육헌장의 세례 듬뿍 받고 지성으로 민족중흥을 위한 마음을 올곶게 유지하면서 새역사 창조를 위한 줄기찬 노력 계속하고 있는 이분들. 이분들 덕분에 오늘도 블로그 한 페이지에 채울 글을 쓸 수 있었다. 감사하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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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6 15:14 2006/04/06 1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