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섞다

말걸기님의 [하인즈 워드의 복수] 에 관련된 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이야기. 혈연적 유대관계의 강력한 흡착력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만, 피가 물보다 진하기 위해선 그 안에 물과는 달리 많은 물질들이 녹아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순수한 물은 H2O, 즉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한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일 뿐인 물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물질을 녹일 수 있는 용매이기도 하다. 피는 단순화합물이 아닌 복잡한 혼합물이다. "순수한 피"라는 것은 그래서 화학적 또는 물리적 표현이 될 수 없다. 오직 관념적 언사일 뿐이다.

 

"화냥년"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환향녀(還鄕女)", 즉 어디 멀리 갔다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여인이라는 이 한자어는 "화냥년"으로 발음되는 순간부터 일정한 터부를 내포한다. 피의 순결성을 더럽힌 여인. 가족 또는 마을 공동체로부터 불결한 무엇으로 취급받게되는 것이다. 몽고의 침략을 비롯하여 중원을 장악한 패권국가의 침탈에 공물처럼 내어준 여인들은 끌려간 곳에서도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돌아와서조차 이방인이 되어야만 했다.

 

"화냥년"의 대를 잇는 단어, "양공주". 주로 미군부대 근처 속칭 기지촌에 거주하면서 성매매를 수단으로 생계를 영위하는 여인들에게 붙여졌던 말. 그러나 어디 그들만 "양공주"였나. 외국인들에게만 개방된 클럽 등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물론이려니와 외국인과 연애를 하고 있는 여인들조차 질시어린 한국 뭇 남성들의 시선은 그들을 "양공주"로 인식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도...(지금은 그럼 뭐 좀 나아졌나??) 이 여인들이 이처럼 욕설과 마찬가지인 "양공주"라는 소리를 들어야하는 이유 역시 "순수한 피"의 환상을 깨버렸다는 것. 물질의 본질은 관념에 의해 재단되는 법이다.

 

"화냥년"이나 "양공주"를 손가락질 할 사람들이 과연 누가 있을까? 예컨데 아직도 정신대할머니들을 "화냥년" 취급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들의 인식수준은 과연 어느 시대에 머물러 있는 걸까? 그녀들에 대한 손가락질은 오히려 그 손가락질 하는 손가락을 가진 자들의 도피행위가 아니었던가? 그들을 지켜줘야할 자들이 그들을 내줌으로써 자신의 삶을 보장받고, 돌아온 그들을 받아주기는 커녕 그들을 내치는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그 정당성 확보의 기재로 "순결한 피"를 요구하는.

 

"화냥년"과 "양공주"가 낳은 자식들. 그/그녀들은 말 그대로 "혼혈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혼혈인, 피가 순수하지 않은 자들. 그/그녀들의 혈관에는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색깔, 똑같은 성분의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골격의 차이와 출신배경의 차이로 인해 또는 피부색깔로 인해 피가 다름이 인정되어버리고, 손가락질을 하는 자들로 구성된 집단의 피보다 불순한 무엇인가가 더 섞여 있다고 규정된다. 그래서 "혼혈인". 혼혈인이라는 말은 그래도 양반이다. 그/그녀들은 혼혈인이라는 말보다 더한 "튀기"라는 말을 듣고 살아야 했다.

 

"튀기"들에게는 "화냥년"이나 "양공주"인 모친의 아픔이 고스란히 유전된다. 그/그녀들 역시 그/그녀들의 어머니들처럼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국 아버지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는 현상. 그러나 아버지들이라고 이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렇게 피의 순수성을 의심받는 자들은 어디에서고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이방인이 어느날 성공을 거두고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 상황은 돌변한다. 그/그녀를 배척했던 집단은 더러워진 피 어느 한 구석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자기종족의 혈통적 특수성을 내세워 그/그녀가 해당집단의 구성원임을 또는 구성원이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하인즈워드, 수퍼볼의 영웅이 된 그에게 쏟아지는 이 땅의 찬사와 열광은 그래서 낯설고 계면쩍다. 난리법석을 연출하는 언론사들, 물어보고 싶은 건 이거다. 니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순혈주의를 우습게 알았는데?

 

민족정론, 민족언론, 민족지... 반만년 역사의 단일민족을 강조하던 이들에게 그동안 "튀기"들의 삶은 투명인간의 삶이었다. 아예 신문 이름에서부터 "한겨레"를 이야기하는 소위 "진보" 언론사가 있는 마당에 뭐 더 할 이야기가 있겠는가? 민족은 지상최대의 지고한 선이었고, 여기에는 피의 순수성 이외에 다른 이야기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마치 게르만민족의 위대함을 위해 순수한 게르만민족의 피를 찬양했던 히틀러치하의 독일처럼.

 

불현듯, 영국 언론사가 한국에서 벌어진 하리수 현상을 보면서 과연 한국이 트렌스젠더와 같은 이질적인 사건을 받아들일만큼 변화하였는가를 다뤘던 기사가 생각난다. 잡설 제하고 그 기사의 결론만 보면 이거다. "한국에서는 이쁘면 다 용서된다"...

 

하인즈워드를 보면서 느낀 것. "한국에선 유명해지면 다 용서된다"...

 

정치인들이고 뭐고 난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혼혈인 차별금지법과 혼혈인 복지증진법을 만들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웃기고 자빠졌다. 지금 있는 법이나 제대로 지켜라. "혼혈인"이라는 용어도 좀 없애고... 열우당에서 "혼혈인" 대신 다른 말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하던데, 그거 뻘짓이다. 그따위 수작 하지말고 인종차별에 대한 대책이나 빨리 만드는 것이 좋다. 한국에 인종차별이 어딨냐고 항의하는 분들이 있긴 한데, 여기 그 사례가 버젓이 존재한다. 관념적 "피의 순수성"을 이렇게 강조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딨나?

 

반만년 단일민족의 환상이 깨지지 않는 한, 그 관념적 웅변이 지고한 가치로 승화되는 코메디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하인즈워드 백명이 나와도 이 쪽팔리기 그지없는 어색한 이벤트들은 끝나지 않게 된다. 하인즈워드가 칙사대접을 받는 이 현상 자체가 그만큼 우리 사회의 인식수준이 아직도 원나라의 지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던 고려시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이다. 다시 한 번, 쪽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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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7 14:48 2006/04/07 1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