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알아?

낮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모 언론사였는데, 주민등록번호와 관련한 인권위원회 진정이 준비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낼라고 한단다. 어떤 내용의 진정이며, 진정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지를 알려달란다.

 

극비리에(?) 준비하고 있었던 프로젝트가 어떻게 벌써 알려졌을까 내심 궁금하면서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고마웠다. 사회적인 관심사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좀 더 빨리 이러한 일이 진행되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을 번호로 '관리'하는 것이 그렇게도 중차대한 인권침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행인은 주저없이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어릴 때부터 누군가에게 통제당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싫었던 성격탓도 있지만, 내 정체성이 숫자로 표현된다는 사실 자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거부감을 들게 만드는 여러 가지 경험 탓도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날. 동사무소에서 발급받은 주민등록증을 들고 학교로 간 첫날이었다.

교실문을 힘차게 밀어젖히고 행인은 이마빡에 민쯩을 떡 붙이고는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쫘샤들아! 민쯩 까~!!" 몇 몇 어린 중생들은 잽싸게 지 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지들 마빡에 붙였고, 아직 민쯩을 못받은 넘들은 한없는 부러움의 눈초리를 행인에게 보내고 있었다. 실제상황이었다.

 

그랬던 행인이 지금 악랄하게 민쯩 안만들고 다니는 이유는 별게 없다. 그 뭣도 아닌 것때문에 사람이 사람취급 못받는 현실이 더러워서다. 더러우면 만들면 되잖냐고? 그래서 만들면 행인이 아니다. 더러운데 왜 만드나? 암튼 이 "민쯩 까!"라는 말은 동네 시정잡배들의 쌈질터에서는 물론이려니와 고명하시다는 학자들 간에서도 튀어나오는 것을 본 바 있고, 더 골때리는 것은 낼 모레 병풍 뒤에서 향내맡을 노인네들이 장기두다가 장기판 엎으면서 외치는 것을 목격했던 일이 있었을만큼 우리 사회에서 참으로 흔하게(!) 듣던 말이다.

 

얘네들 민쯩 깠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 중)

 

민쯩 까면 도대체 뭔 일이 있기 때문일까? 민쯩 복판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주민등록번호때문이다. 이넘만 있으면 나이로 구라를 깔 수가 없다. 그리하여 저 유명한 "민쯩 까!"라는 구호는 그 이면에 연령에 의한 위계를 인정하라는 권위주의적 발상이 녹아 있었던 것이며,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넘은 한 살이라도 더 어린 넘의 민쯩을 뒤비면서 "나이도 어린 쉑기가"라며 한껏 우쭐 할 수 있었던 거다. 동방예의지국의 혈통을 이어받아 장유유서의 전통을 지켜나가던 우리들은 거의 대부분이 "민쯩 까~!"라는 한 마디에 자신의 위상이 어디에 결정될지를 확연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민쯩까지 깠는데 나이 어린 넘에게 주어터지면 더 쪽팔린 거는 사실이다...

 

행인도 몇 차례 민쯩 까고나서 절라게 후회한 적 많다. 후밴줄 알고 갈구고 있다가 이 쫘샤가 민쯩까라는 말에 이게 뒈질라고 이러나 하고 민쯩 보여줬다가 알고보니 윗동기여서 행인이 뒈질뻔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가? 윗 세대 어르신들 중에 거의 절반은 호적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던 것이 기억난다. 육이오때 면사무소가 불타서 호적이 홀라당 타버려가지고 나중에 정리를 하다가 나이가 줄었다고 하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다...

 

군대 갔다온 남정네들은 번호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 것이다. 일단 입대하면 훈련번호를 부여받는다. 훈련소를 퇴소하면 사라지는 번호지만 이 번호를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있다가는 거의 연병장의 먼지들이 항문을 막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퇴소직전 군번을 받는다. 이 군번은 인식표에 찍혀서 제대할 때까지 목에 걸리게 된다. 역시 군번 제대로 못 외우면 내무반 바닥을 소금물로 적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또 하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번호가 있는데 그것이 소총번호이다. 총기 바뀐지 모르고 엉뚱한 번호 주어삼켰다가는 영창이다. 이 외에 보직에 따라서 각종 외워야할 번호가 줄지어 서게 된다.

 

군대에서 번호는 곧 몸 성히 제대할 수 있느냐를 가르는 이정표가 된다. 지금은 번호체계가 바뀌었지만 행인의 복무시절에는 군번만 보면 이게 어느 훈련소에서 어느 시기에 훈련을 받았는지, 이게 방윈지 현역인지 금방 구분이 되도록 되어 있었다. 하긴 그 때만 해도 이 군번이라는 것이 이렇게 지독할 정도로 개인정보를 유출시키는 것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학교에는 학번이 있고 회사에는 사번이 있다. 외국인에게도 번호가 매겨지고 하다못해 만화 주인공에게도 번호가 매겨진다. 계좌마다 다른 번호가 매겨져 있으며, 통장마다 다른 고유한 번호가 매겨져 있고, 카드마다 다른 번호가 매겨져 있다. 이 외에도 여권번호, 운전면허번호, 당원번호, 기타번호...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내 정체성이 드러날만한 번호가 얼마나 많은지 한 번 살펴보라. 우리는 번호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위에꺼는 히딩크, 아래꺼는 둘리. 다 번호가 매겨져 있다. 이런...

 

거기다가 주민등록번호... 이번에 진정한 주된 이유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맨 처음 번호가 성별을 나타내는데, 첫째, 국가가 생물학적인 성별을 근거로 국민의 성 정체성을 규정해버림으로써 자유의사에 의한 성정체성의 결정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것과, 둘째, 성별에 따른 번호 구분에 선후를 배열함으로써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을 고정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둘리, 참 재밌게 보던 만화였는데, 이 만화 보면서 둘리를 남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둘리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번으로 시작한다. 둘리는 생물학적으로 남자였던 거다. 만화를 보면서 즐거워했던 그 누구도 둘리의 꼬추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수컷이었단 말이다. 원래 공룡은 꼬추를 살 속에 파묻어두고 살도록 신체구조가 이루어져 있었단 말이냐...

 

그러다보니 주민등록증에 박혀있는 사진 속의 둘리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나보다. 저 번호를 매겨준 부천시장을 가리키며 한껏 조롱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듯 하다. "니가 날 알아? 내가 수컷인지 니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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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17 01:11 2004/08/17 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