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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도...

엊그제 참터에 회의가 있어서 다녀왔는데, 많지도 않은 나이에, 문득 회한이 몰려오더라...


한 가지의 "결정적 이유" 때문에 인생의 행로가 결정되거나 운명이 뒤바뀐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내 진로에 영향을 미친 주요 사건이라면 "원진 레이온"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추운 겨울날, 공장 입구에서 한 달 넘게 이어진 농성은 학교가 시들했던 (그렇다고 뭘 다른 열심히 했다는 건 절대 아님 ㅡ.ㅡ) 예과생에게 실로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사실, 워낙 허름한(?) 동네에 살다보니 열악한 작업환경을 가진 영세공장들이야 뭐 어려서부터많이 보았고 울 엄마도 그런 데서 일하셨지만, 거기서 일하는 이들은 "노동자"가 아닌 그냥 "동네 아줌마 아저씨"였고, 학교 세미나에서 이야기하는 "노동계급"은 뭔가 위대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초월적 존재였던 거 같다. 하지만, 원진으로 출퇴근하면서 (아, 왕십리역에서 국철 기다리던 기억들도 새록새록..) 나름 거품도 빠지고, 사회운동과 관련한 나의 진로에 대해서도 고민을 했던 것이다. 당시, "예방의학"이라는 전공분야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의대에 입학하기 전까지 예과가 2년이고 본과가 4년이라는 것도 몰랐고, 인턴 다음에 레지던트 과정이라는 것도 몰랐음. 주변에 의대 언저리라도 가본 사람이 있어야 원 ㅜ.ㅜ) 이게 내가 갈 길이라는 어줍잖은 운명론을 떠올렸더랬다. (그래도 역시 "예방의학"이 뭐하는 건지는 잘 몰랐다. 그냥 선배들이 그런게 있다고 하니... ) 이후 한 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고, 지금 그걸로 밥벌어 먹고 있다... 10년도 훨씬 넘은 그 일... 엊그제 모 노동조합 동지들이 들려준 작업 현장 상황을 전해듣자니, 방문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던 그 음습했던 원진레이온 공장 내부 전경이 주마등처럼... ㅡ.ㅡ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함께 농성하다가, 사건이 "정리"되고 누구는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하고 어영부영 의사면허도 따고 학교에 일자리도 잡아 안온해진 자신의 존재와 의식의 괴리를 불안해하는데 비해, 또다른 누군가는 그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은 작업 환경에서 일하고 있구나.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바도 아니었고, 새로운 발견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 "원진" 생각이, 회한이 밀려왔을까? 이는 계기일 뿐이고, 일종의 "투사"가 일어난 거겠지.... 내가 예방의학을 하려고 했던 그 초심은 과연 지켜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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