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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

 

"조롱하지 마라, 비탄하지 마라, 저주하지 마라, 단지 이해하려 하라 (Not to laugh, not to lament, not to curse, but to understand)"

 

부르디외가 편저한 [세계의 비참]  첫머리에 쓰인 스피노자의 말이다.

 

최근에 읽은 몇 편의 글들은 이 문구를 '자동재생' 시킨다. 

 

  • 최규석 단편집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길찾기 2009년 (신판)
  • 최규석 리얼 궁상만화 [습지생태보고서] 거북이북스 2005년
  •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가난한 휴머니즘] 이후 2007

 

       

 

절절하지만 선정적이지 않게,

궁상맞지만 마냥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게, 그리고

"물질은 부족하지만 마음만은 부유한" 따위의 목가적 낭만주의에 경도되지 않으면서 고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그러한 빈곤과 고통이 '대상자'가 아닌 자신의 사적 경험의 일부일 때,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 서늘하게 묘사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최규석은 참 잘 해내는 작가인 것 같다. 

옛날 (?) 생각이 참 많이 났더랬다.......... '가난의 효용' 같은 장은 정말 그랬다.

 

전임 Haiti 대통령이자 신부인 아리스티드의 글은 대상이 분명하다. 선진국, 잘 사는 시민들, 그나마 정신줄이 남아 있는 인간들이 예상 독자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편지글 모음은, 글을 모르고, 혹은 편지지를 살 돈이 없거나, 우표를 살 돈이 없는 이웃들 대신해서 그가 '세계시민'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가 그들 사회에 어떤 파국을 가져왔는지... 살아남기 위해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식의 지원과 연대가 필요한지....

 

그의 논지에 적극 공감하면서도, 그래도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있다. 사람들이 밥을 굶는다면 민주주의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맥락은 이해하지만, 이와 동일한 논리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전용되었는지를 돌아본다면, 조심해서 해석해야 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물론 큰 맥락에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일종의 기우랄까.... 먹고 사니즘에의 경도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가져온 폐해를 생각해본다면, 조심 또 조심할 필요가 있다.....   

 

 
(* 이제 겨우 '비참한 상태'에서 '존엄한 가난'으로 옮겨가는 중일 뿐이라는 그의 설명에서, 아마도 존엄한 가난은 decent poverty 혹은 poverty with dignity 중 하나의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이 때 decent 의 의미는 존엄하다 보다는 acceptable or adequate 정도로 해석하는게 맞을 것 같다. 가난하지만 인간의 품위를 지킨다는 뜻의 존엄성을 표현하는 맥락이라기보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이제 그나마 견딜만한 가난으로 이행했다는 뜻이기에....) 

 

지난 3주간 한겨레 21 에 임인택 기자가 연재한 '노동 OTL' 시리즈는 고전적이면서도 한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현장'침투'의 기록이다 (그림은 최규석이 그린 표지삽화). 

 

최규석의 삽화 폴라 토인비의 [거세된 희망]  (2004) 을 떠올리게 하는 기획이다.

 

   이 땅에서 비정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첫 회에서는 '얼마나 비참한가' 혹은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기에 경도된 것 같아 다소 안타까웠으나 (사실, 그럼 안 되나? ) 연결기사들과 이어지는 시리즈는 훨씬 풍부한 결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제도권 학계에서 이제 이런 프로젝트는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 빈 자리를 채워주니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과, 다른 한편의 자괴감이랄까....

 

성수동에서 의사나 전문가들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현장 - 특히 극적 효과가 뛰어난 제화 사업장을 방문하고는 한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J 와 나는 사실 좀 고민이다. 아직도 이렇게 비참한 (?) 작업환경이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것은 좋은데,

어쩌면 우리가 그 상황을 전유 혹은 악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 때문이다.

좀더 비참한, 좀더 불쌍한,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기꺼이 자원활동에 나서도록 만드는.....

 

우리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 않는 사랑의 리퀘스트와 과연 다르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가만히 돌아보면,

스스로 가난했기에 누구보다 이러한 문제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분이 노점상 출신이라 없는 사람들을 잘 이해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발상이다.  

여전히, 학문으로서 빈곤과 고통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러면서도 연민과 연대의 정신줄을 놓지 않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야는 다르지만, 앞서 언급한 저자들의 통찰력, 그리고 에너지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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