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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의 미래를 비추는 요술 거울이 아니길...

 

야만적 불평등 - 미국의 공교육은 왜 실패했는가
야만적 불평등 - 미국의 공교육은 왜 실패했는가
조너선 코졸
문예출판사, 2010

 

이책이 쓰여진것은 1990년대 초반, 그래서 어쩌면 20년 전, 이미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 30년이 그러했듯, 이후 20년 동안 근본적 특성이 변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미국에 살던 2000년대 중반 즈음, 뉴욕타임즈에 실린 공교육 현장 기사들은 내눈을 의심케 만들었더랬다.

운동장이 없어서 복도에서 체육수업을 한다니, 재정이 파탄나서 스쿨버스 운영을 중단해버렸다니...

이런 류의 기사들이 참 믿기 어려웠었다.

썩어도 준치라고...그래도 세계 최고 부자 미국인데, 정말 이정도까지???

이와 달리, 주변의 한국 방문연구교수나 포스닥/대학원생들은 미국의 공립학교가 얼마나 훌륭한지 입을 모아 칭찬했다. 한국에서와 달리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른다고.... 

 

이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을 둘러싼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게 아니라, 이 책 안에 있다... ㅜ.ㅜ

 

 

예전에 한 세미나에서 누군가 미국사회의 공공의료체계가 부족함을 지적하며, 왜 학교는 공공이 존재하는데 보건의료는 그러지 못할이유가 있냐고 발표하니까, 플로어에서 미국에는 공교육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며 비유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던게 생각난다... ㅡ.ㅡ

사실, 두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권으로서 같이 가는게 보통이니, 뭐 놀라운 일은 아니다.

 

미국 공교육, 그것도 공교육 일반이 아니라, 가난한, 특히 인종적으로 분리된 지역에서의 공교육 환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교과서가 모자라고, 냉난방이 안 되는 교실은 불쌍한 축에 끼기도 어려워보인다. 불이 났던, 천장이 없는 건물에서, 때로는 화장실과 탈의실 공간에 책상을 놓고 공부를 해야하고, 교사 급여를 줄 수가 없어서 수업을 단축하고, 학교 안에 물이 새서 강이 흐르는 광경은 도대체 지옥이 있다면 여기일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주식거래에서의 정보전달 능력이 세계최고라는 뉴욕 시에서 학교에 나오지 않는 가난한 아이의 행방을 '아무리 찾아도' 알 수 없다는 교장의 뻔뻔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아연실색이다...

 

물론, 당연히, 모든 학교가 이런 건 아니다.

중산층, 백인들, 그리고 선택받은 소수의 아시아계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학교는 우리가 영화, 드라마에서 흔히 보고, 또 주변의 미국유학자들에게서 이야기 듣는 모습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공립학교의 재원이 기본적으로 지역 재산세에서 조달되고, 교육구 사이에 재원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데다, 지역 간 인종/계급 분리가 무지무지 극심하며 인종통합교육에 대한 (암묵적) 반대가 그 핵심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지역은 유해산업이 밀집해있거나 경제가 낙후하고, 재산 가치가 낮기 때문에 재산세 납부가 적은데다 (심지어 세율은 가난한 지역이 더 높다!!!), 세금을 납부할 수 있는 기업들은 아예 독자적인 타운을 구성해서 스스로를 통치하며 세금을 회피한다. 주정부에서 내놓는 교육구 공립학교 통계연보는 부동산 시장에서 으뜸가는 근거자료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주거지와 좋은 학교, 넉넉한 학교재정의 선순환구조가, 또다른 누군가에는 열악한 주거환경과 무너져가는 학교, 파탄난 학교 재정의 악순환 구조가 고착화되는 아주 좋은 근거자료이리라...

 

중산층 학부모 (그리고 그들 중 다수는 1960년대 후반 인종분리 철폐를 위해 남부로 가는 희망버스에 탑승했던 이들!!!) 들이 자원의 재분배나 통합교육에 반대하는 것이 어이 없지만, "어쩌면 이들이 '반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이들은 가난한 아이들이 피해를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들은 그저 자신의 아이들이 최선의 것을 얻기 바라는 것뿐이다. 이러나저러나 사우스브롱크스의 아이들에게는 마찬가지다."

중산층 지역 명문 공립학교 학생들의 경쟁은 '건강에 해로울 만큼' 지나치다며 "뉴욕의 아이들 (가난한 도심지역 학생들)이 겪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아디을 대다수는 너무 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요" 라는 중산층 학부모의 토로에 대해 코졸은 이야기한다.  "불공정의 한계가 명확하지 않은 이런 진술들은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불행과, 불공정이 일으키는 불필요한 비참함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이로써 부자들은 불편함과 파멸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의무감에서 벗어난다".

 

이들은, 그리고 교육관료들은 교육비가 늘어난다고 환경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라며, 돈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교육재정을 공평하게 분배하자는 이야기에는 펄쩍 뛴다. 돈이 중요한게 아니라면서 말이다. 심지어 부시 대통령조차 "돈이 교육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가난한 아이들의 학부모들에게 경고했다. '돈을 숭배하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입니다"

물론, 돈이 다는 아니다. 돈이 중요한게 아니니까 너네 가진 것 좀 내놓으면 안 되겠니?.

 

이러한 와중에 '마그넷 시스템'이라는 선발제 공립학교는 대안적 체계로 환영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중산층, 젊은 전문직 종사자, 백인의 자녀들이다.  "이 시스템이 겉으로는 학생의 능력 위주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이나, 이 경우 능력은 계층과 인종에 밀접하게 연관된 조건에 의해 미리 결정된다. 일부에서는 이 시스템을 '적자가 생존하는 법'이라며 옹호하지만, 사실 적자생존이라기보다 적자의 아이의 생존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뉴저지 주의 빈곤지역 학부모들이 주 정부를 상대로 교육구간 재정 불평등을 문제삼아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왜 뉴저지의 가난한 도시에 사는 아이들이 부유한 교외 지역의 아이들과 똑같은 기초 교육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7년이라는 세월과 607페이지에 걸친 문서가 소요되었다."

 

물론, 열악한 환경에서도 헌신하면서 기적을 일구어내는 교사들이 있다. 하지만, ".. 자칫하면 이러한 교사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열악한 조건에서도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사실 이런 식의 주장이 점점 늘어나고, 이따금 이런 논조의 책들이 대단한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격려성 연설과 장밋빛 자기계발서들은 열악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하지만, "희망은 청바지처럼 쉽게 판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 해방은 이런 식으로 대중 최면을 통해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 슬프지만 진실이다.

 

책에서 인용된 존 쿤스는 "사실, 인위적으로 이권을 부여받은 자손이 한 세대의 최적자 (the fittest)를 순환적으로 대체하는 현재의 상황보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더 크게 위협하는 것은 없다" 고 경고했다. 평등과 자유는 반드시 상충하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사실, 이 책에서 그 무엇보다 가슴시리게 다가온 것은 이 부분이다.

 

코졸은 한 중산층 명문공립학교의 학생토론을 참관한다. 이들은 앨리스워커를 비롯하여 미국의 인종철폐와 사회정의에 대한 훌륭한 저자들의 저작을 모두 탐독했고, 학교재정의 불평등과 인종통합에 대해 아주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자신의 견해를 제출할 줄 안다. "일정 부분 이들의 능숙함과 총명함은 비현실감에서 나온 듯하다. 불공정 문제는 인간애나 양심의 문제라기보다 기하학적 문제처럼 취급된다." 그리고 조금만 더 도전적인 질문을 받으면 '본심'이 튀어나온다. "... 그러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이 공정한 일이 아니겠냐고 그 학생에게 묻는다. "그래봐야 저한테 무슨 보탬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1968년에는 가장 부유한 교외 지역 학교에서조차 이런 말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생각해본다. 급우들은 위장하지 않은 사리사욕을 더내는 이런 발언에 술렁였을 것이다. 1990년 라이에서 그 학생은 아무런 째 없이 이런 말을 할 수있다. 나는 이 흥미로은 학생이 그렇게 솔직할 수 있다는 데 감탄한다." 

코졸이 20여년 전 미국에서 느껴던 이런 감정을 오늘날 한국의 많은 교수들이 대학에서 경험하고 있다.

 

사회적 연대의 부재, 적자생존의 무한경쟁, 그리고 '염치'의 상실은, 오늘날 한국사회를 나타내는 중요한 특징들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들이 먼 남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수많은 친미관료들과 학자들에 의해 미국식 교육 프로그램들이 속속 도입되는 것 - 이를테면 입학사정관 제도나 AP 프로그램 - 은 불평등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진실로 우려할 만하다.

 

예전에 한 방송국이 주관하는 고등학생 영어토론 대회 중계를 잠시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아주 유창하고, 논리정연하게 국제원조 문제를 토론하고 있었다.

어떤 학생들은 식민지배의 역사와 사회정의를 이야기했지만,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공허함'이었다.

물론, 그 학생들에게 진심이 없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코졸이 느꼈던 것처럼, 그것이 인간애와 양심의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다.

가끔씩 학생 리포트 혹은 토론수업에서 정제되지 않은 이기적 발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올 때면, 나는 아무리 본심이 이렇더라도 제발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만은 말았으면 하고 바랬었다. 

 

연대는 차마 바라지도 않지만,

연민과 염치.... 내가 너무 큰 걸 바라는 것일까?

이들도 역시 '개념'들과 함께 안드로메다에 가 있는 것일까?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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