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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이것저것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준 책이었다. 하필, 세월호 침몰 사고가 나고, 극단적 위기 앞에 우애와 희생, 한편으로 배신과 무책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던 바로 그 시점에서 말이다.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현암사, 2013

 

 

책은, 어떻게 협력이 형성되고 변화하는지, 그리고 무엇에 의해 약해지고 있는지, 이를 강화하려면 어찌 하면 좋을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 개념의 구분 - 공감과 감정이입

 

'공감 (sympathy)'은 타인에 대한 동일시라는 상상적 행동을 통해 차이를 극복해가는 끌어안음의 과정인데 비해, 감정이입 (empathy) 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란다.

전자가 후자에 비해 더욱 강한 감정으로 여겨지지만, 어쩌면 후자가 더 강력한 실천이 된다. 냉정하지만 말이다. 너의 심정과 고통을 내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고픈 의지를 촉발하지만, 다른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도 실천은 가능하다. 공감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연극을 위한 하나의 '감정적 보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감정이입은 대화적 교환에 더 많이 연결된다. 감정이입을 통해서는 단순한 대변 뿐 아니라, 배움을 얻을 수 있다. 여러 소집단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중재를 할 때 필요한 능력은 후자이다. 물론 협력을 위해 두 가지 모두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건조한 설명에 내가 꽂힌 것은, 나의 사회적 협력이 비교적 냉정한 '감정이입'에 기초하고 있었고  그 차가움을 스스로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도대체가 폭발적인 감정적 동일시가 좀처럼 잘 안 일어난다는... 그런데 차가운 감정이입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닐 뿐 아니라 몹시도 필요한 협력의 기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일종의 위안을 얻었다고나 할까??.. ㅡ.ㅡ

그런데 이런 개념이라면 예전에 최장집 교수가 한국사회 운동의 엘리트주의 과격함이 공감은 부족하고 감정이입에서 비롯된 활동 때문이라는 비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감정이입은 차분하고 격정적이지 않은 속성일텐데 말이다. 원래의 정의가 무엇인지는 아리스토텔레스한테 가서 물어봐야 하는 것인가??? 시간 날 때 이 개념들의 차이에 대해서 좀 찾아봐야겠다..  

 

 

#. 협력이 약해진 사연...

 

세넷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사회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 공감과 감정이입, 공식 제도화되지는 않았지만 작동하는 규율, 의례, 사회성과 예절을 중요한 요소로 바라보았다. 협력이란, 문서화된 제도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어렵다. 어쩌면 불필요해보이는 것, 인간 삶의 부가적 요소로 여기지는 것들이 협력을 가능케하는 핵심 요인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협력은 빠른 속도로 쇠퇴하고 있다. 점증하는 불평등, 무례한 노동공간이야말로 협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의 다른 책 '뉴 캐피털리즘'에서도 통렬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새로운 노동공간, 특히 부유하는 컨설턴트, 단기 임원들에 의해 지배되는 금융산업의 대두,그리고 안정적인 관계를 구축해나갈 틈을 주지 않는 파트타임의 확산은 비공식적 협력 관계, 작업장에서의 권위, 상호신뢰, 일에 대한 혹은 동료에 대한 헌신 같은 소중한 가치들을 모두 잠식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시간제 일자리의 확산은 개인들의 경제적 필요 일부와 기업의 노동 수요는 일부 충족시킬지 모르겠으나, 엄연한 노동소외의 확대라 보아도 무방할 듯 싶다.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일터, 비공식적 규율을 형성하고 사회성을 키울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일터란 거대한 이방인들의 일시 집합소에 지나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사태와 관련하여 덧붙이고 싶은 것은....

세월호 선장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생각하면서도, 오랜 관계를 통해 협력을 쌓고 권위를 획득한 리더가 아닌, 나이많은 계약직 바지선장인 그가,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권위를 가지고 다른 선원들을 지도하며 헌신을 보여줄 수 있었을지 정말 의문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여기에 국한된 특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다는 점이다.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많은 이들이 협동하려는 의욕 자체를 잃고 움츠러드는 '비협동적 자아 uncooperative self' 로 전환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협력의 강화.....

 

하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협력의 손실이 꼭 돌이킬 수 없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세넷은 썼지만, 협력이 약화된 맥락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데 비해 강화의 방안에 대해서는 뭐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작업장에서 기술과 리듬을 익히고 몸으로 체화함으로써, 고장난 협력을 다양한 수준으로 수리한다는 건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이여... ㅡ.ㅡ

한편 실용적 효과를 지닌 일상의 외교술이라는 이름으로 몇 가지 협력의 방안을 제시하는데, 이 또한 사회수준에 실행하기에는 지나치게 모호하고 미시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카운슬링 (감정의 온도를 낮춘 우회적 협력 방안), 중재자를 통한 갈등의 관리 (그것일 때때로 침묵 혹은 암묵적 '예절'로 봉합될 수도 있으며, 미국내 한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갈등 해결 상황이 한 사례), 참여 (능동적 절차)  가 그것이다. 

 

그는 공동체를 향한 추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몰가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보수주의나 알린스키 등의 사회적 좌파나 모두 국가를 비판하고 공동체의 힘을 강조하지만, 후자는 그렇기에 국가와 구조적 요인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세넷은, 사회와 공동체가 들어있지 않은 개인의 삶, 한편으로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이상화된 정치적 공동체 모두에 대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공동체가 중요하고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소명을 가져야 한다고, 혹은 이상화된 과거의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사람들이 일대일 관계의 가치와 그런 관계의 한계를 모두 실현해내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싶다. 빈민이나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그 한계는 정치적 한계이고 경제적인 한계이다. 가치는 사회적 가치이다. 공동체가 비록 삶의 전부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진지한 즐거움을 약속해주기는 한다."  

 

그러면서 세넷은 '연대'보다는 '협력'을 강조한다. 괴이하게 들리지만, 현실세계에서 (특히 좌파들이) 연대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강제하고 외부를 배제하며, 더구나 위로부터의 통제와 결부되어 오히려 협력을 왜곡했다는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다. 글쎄다.... 이런 설명대로라면, 그건 진정한 연대가 아니지 않을까 싶은디? 예전에 레빈스 할배가 지적했던 것처럼, 연합은 기본적으로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고, 그렇다면 세넷 자신이 강조하는 (차이에 기초한) 감정이입 속에서 협력을 구축하는 것이 연대라고 할 만한데, 왜 그렇게 넌덜머리를 내는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ㅡ.ㅡ 연대를 연대한 사람들끼리만의 협력으로 보고 타자를 배제하는 부족주의의 소산으로 본다고나 할까???

 

 

#. 사족 

 

함께 사는 삶, 협력이라는 화두 앞에서 몽테뉴가 했다는 말은 큰 질문을 던져준다. "내가 고양이와 놀고 있으면서, 사실은 그 고양이가 나와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타인의 내적인 삶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거나 혹은 들쑤실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양이의 본심을 모르면서도 계속 고양이와 놀 수 있다.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는 기존의 사회적 질서가 보여준 것보다 더 깊이 협력할 능력이 있다"니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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