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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fiction vs. non-fiction

최근 감상한 일련의 작품들을 돌아보면서, 책상 위에 묵혀 두었던 두 권 고전 소설에 대한 메모도 함께 정리해둔다

 

#. Arthur C. Clarke. <Childhood's end> Ballantine 1984

 

 

 

이 책의 초판 발행이 1953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새록새록 깜놀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 개발을 둘러싼 두 열강의 각축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었고, 남아공의 아파르트 헤이트 중단이나 스페인의 투우 금지 같은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그 시절 말이다.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이 아무런 기반도 없는 채 어느 날 갑자기 섬광처럼 나타난 반짝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의 성과에 기초한 이성과 논리의 진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다수의 과학소설가들이 보여주는 미래사회에 대한 놀라운 예측은 그들의 신묘한 통밥이 아니라, 끝까지 밀어 붙이는 논리적 상상의 전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지배적 정조는 우울이다. 지구인들이 맞이한 새로운 세기는 딱히 디스토피아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토피아라 하기도 어렵다. 전쟁이 없고 물질적 안녕과 복리는 그야말로 골든 에이지라 할 수 있지만, 고통과 갈등과 도전, 절망 조차도 인간 삶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면 결코 행복이라고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그리고 극도의 발전, 그 끝에는 새로운 존재로의 변환과 해탈(?)이 있다. Childhood's end 라는 제목은 그야말로 지구 상에 어린이가 사라졌다는 사실, 유년이 통째로 손실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 아니라, 우주에서 유년기와 같던 지구의 소멸, 그리고 모든 신비주의와 종교를 벗어버린 인류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가장 유쾌한 (?) 장면이라면, 50년 만에 존재를 드러낸 Overloads 의 외모가 '붉은 악마'였다는 점이다. 종교에 대한 불경스러움은 humanist  SF 작가들의 미덕이다 ㅋㅋ..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시험하기 위한 Athens vs. Sparta 프로젝트는 우리의 율도국 프로젝트에 작은 단서들을 주지만, 물질적 기반이 너무나 다르다는게 함정... ㅡ.ㅡ

 

 

#. Arthur C. Clarke <The Fountains of Paradise> Aspect

 

 

할배는 공평하다.

기독교만 까대지 않는다 ㅋㅋ

완고한 불교 승려들과의 대립을 극복하고, 지구 최고의 공돌이 Morgan 은 space elevator 를 건설한다. 그냥 건설에 성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중간에 발생한 사고를 직접 나서 극복하는 만능 히어로 ㅋㅋ

 

고대 전설과 종교- 세속의 정치적 대립, 미디어 같은 소재들을 능수능란하게 엮어가며,

한 엔지니어의 천재성과 불굴의 집념을 이토록 손에 땀을 쥐도록 그려내는 작가의 역량에 새삼 놀랐더랬다. 괜히 SF 삼대천왕이 아닌 게여 ㅋㅋ

 

그러나 정작 내가 가장 꽂힌 것은 Morgan 의 건설 엔지니어링보다 그의 가슴에 부착된 CORA!!!

이거 너무 현실적인 발명품이고 곧 상용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만, 소설 발표된 것이 1979년인데 왜 아직도 안 하고 있을까? space elevator 도 현실에 적용이 되는 마당에???

pacemaker implantation 하듯이 CORA 하나 심어놓으면 무수한 MI 환자를 살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주변에 경보 울리고 근처로 응급 콜 보내고, 거기에 덧붙여 EKG monitoring 하여 위험 징후 나타나면 nitrogen perfusion 이나 혹시 streptokinase injection 까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모르고 있는데 이미 하고 있는 걸까?

그나저나 할배, 어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정말 멋쟁이!!!

 

그런데 한국어 번역판을 살펴보니 모두 시공사에서 출간한 것들이다. 시공사... 후..... ㅡ.ㅡ

 

#. X-men: days of future past - 브라이언 싱어 감독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그러길래, 왜 엑스맨 3편을 버리고 간 것이여?

망작 3편을 관객들의 기억 속에서 지우고 리셋하기 위해 이번 편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더랬다 ㅋㅋ

 

마이클 파스빈더 살려주려고 너무 패셔너블하게 그린 것도 좀 웃기긴 했는데, 어쨌든 매우 잘 생겼으므로 오케이.... 그리고, 센티넬 운반하는 장면에서 열차를 전복시키려면 앞쪽 레일을 뜯어야지 굳이 왜 열차 진행방향 뒤쪽 레일을 옮기나 궁금했는데, 센티넬 몸 속으로 금속이 침투하는 걸 보면서 입이 쩍 벌어졌다. 이전 편에서 미스틱이 철분을 교도관에게 주사해서 매그니토가 탈옥하게 해 주었던 것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모든 캐릭터들 - 심지어 마지막에 진과 스콧까지 - 이 반갑고 또 개인사들이 짠하지만, 그리고 퀵실버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 편의 주인공은 역시 레이븐-미스틱이다. 

그녀가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TV 속에 한 마리 상처입은 짐승처럼 그려졌던 장면, 그토록 가까웠던 매그니토가 날린 발목의 총알 때문에 질질 끌려가는 장면, 다시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매그니토에게 총을 겨누던 장면 속에서 신념과 가치로 움직이는 여느 전사의 모습과 상처입은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보았다. 이전 1, 2 편에서 그토록 능력있고 단호했던 미스틱의 젊은 날이 이런 것이었다니, 내가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랄까.... ㅡ.ㅡ 

 

그나저나 자비에 교수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10여년 간 도대체 무슨 일을 겪길래 그토록 풍성한 머리숱이 민두가 되는지 궁금해졌다. 비스트 박사의 첨단 연구로도 대머리는 막을 수 없다는 슬픈 진실이랄까???? ㅋㅋ 어쨌든 이번 편으로 시리즈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건 분명하다. 브라이언 싱어, 훌륭하다! 

 

 

#. Her - 스파이크 존스 감독

 

그녀

 

이건.... 흔해빠진 액션 어드벤처, 값싼 클리세로 물든 디스토피아 나부랭이의 가짜 SF 가 아니라 진짜 오랜만에 만나는 순정품 SF.....

호아킨 피닉스나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피닉스의 배바지와 그 표정들, 그냥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요한슨의 목소리는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들이, 아주 가까운 근미래에 서로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  인간 존재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관계가 흉이 될 것도 없고, 직장 동료는 커플 소풍에 이들 커플을 초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또 아주 허무맹랑한 일만은 아니라는 게 놀라운 지점이다. 

 

이미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SIRI 와 대화를 나누고, 옆의 사람보다는 SNS 의 가상의 관계에 더욱 익숙해져 있다. 사실 각자의 사만다에 빠져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던 영화 속의 그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오늘날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매일 만나지 않는가 말이다.  남을 대신해서 가장 인간적인 손편지를 대신 써주는 극 중 테오도르의 일자리 또한 이미 오늘날 존재하는 관혼상제 서비스, 개인서비스, 가장 은밀한 감정노동의 형태로 실존하고 있다. 

 

자신이 사만다의 유일한 연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때 테오도르는 충격을 받는다. 심지어, 무수한 사만다 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철학자를 가상세계에 되살려 지성을 더욱 발전시키며 훨씬 초월적인 존재로 나아간다. 인간의 육체에 갇혀 있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도대체 '관계맺기'란 무엇인가?

테오도르가 아내와의 관계에 삐거덕 거리면서, 가상 세계에서 내 말을 귀기울이고 모든 것을 들어주는 사만다에게 빠져드는 것은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서투른 관계 맺기로 보이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우와 나도 저런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마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술이 발전한다지만, 그 기술은 인간의 관계맺기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수십년의 친밀한 관계를 테오도르의 손편지에 기대어 발전시켜온 의뢰인들의 관계맺기가 테오도르와 사만다 사이의 관계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 이런 독특하게 아름답고 이성을 자극하는 영화는 너무나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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