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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이 나에게 보내는 사인

난 인간의 삶 속에 거대한 크기를 차지하고 있는 무의식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다. 물론 그렇게 쉽게 자신의 무의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의식의 세계에서만 산다고 생각할지도...

하지만 내가 모르는 나의 세계, 세상이 있다는 믿음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특히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인데, 꿈 속의 세계가 도저히 납득이 안갈 때가 많다. 꿈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실체이기도 하고, 현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어렸을 때부터 반복되는 꿈의 패턴이 있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쫓기거나 죽을 위험에 처해지는 꿈.

일주일 전에도 반복되는 유형의 꿈을 꾸었고, 생생히 기억이 난다.


하늘하고 맞닿아 있는  높은 곳에 내가 있다. 나는 성폭력관련(내가 일하는 곳과 연관된 자료였던 것 같다.) 자료, 기사를 받아서 줄사다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줄을 타고 내려간다. 중간에 홍진경을 만난다.

요새 어떻게 지내냐는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홍진경이 나를 피하면서 먼저 가겠다고 한다. 나는 이상하게 느껴지나 알았다고 하면서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까 받았던 자료가 내 손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 놓고 왔구나.’ 다시 올라간다. 그런데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힘이 빠지고, 줄사다리의 맨 꼭대기 줄 몇 개가 끊어져버려 한꺼번에 올라가기 매우 힘든 상태가 된다. 이제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 거의 줄에 매달려있다.

그냥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러면 힘이 덜 들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겐 그 자료는 꼭 찾아야 하는 자료다. 그래서 다시 한번 다리를 높이 들어올려 그 곳에 가려하지만, 줄만 흔들거린다. 바로 아래는 낭떠러지다. 한 번의 실수로도 나는 죽는다는 느낌이 더 땀을 흘리게 한다. 하지만 내려갈 수는 없다. 다시 힘을 회복하고, 올라가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 줄을 놓아버릴 것만 같다.


 

    

  




 

그렇게 삶이냐, 죽음이냐를 왔다갔다 하다 잠에서 깨었다. 그날 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기쁘고, 내가 찾아야 할 자료는 없었음을 깨닫고 안도를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이런 꿈을 어릴 때부터 자주 꾸었다. 뭔가 해낼 수 없을 듯한, 죽음으로서만이 가능한 일을 맡게 된다. 예를 들어 홍수 앞에서 그 물을 헤쳐나가는 꿈이라던가, 거대한 파도로 집과 건물이 무너지는 데 나만 꼭대기 층에 있어서 겨우 살아있는 상황, 그런데 계속 아슬아슬하게 파도가 친다. 아주 어렸을 때는 누군가 나를 자꾸만 쫓아와서 도망치면서 그 사람한테 붙잡히기 전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꿈이 많았다.


그래,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음. 사실 꿈속엔 통증은 없다. 다만 숨이 턱턱 막힐 뿐이다. 계속 되는 긴장감과의 싸움. 그리고 꿈에서 깨면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건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는 사인일까? 어릴 때(고등학교 때까지) 꾸었던 것처럼 무언가 대상에게 쫓겨다니지는 않는다. 그런데 자연현상(파도, 홍수, 공중에서 끊어질듯 한 사다리 등등)과 마주쳐 그에 필사적으로 살아보려는 내 욕망이 더 강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말하는 걸까?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감상도 없이 그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공포? 그럴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난 항상 계획하고, 예상하고 사는 사람이니까. 예외나 갑작스런 전개를 의식적으로 경계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다. 대학 4학년 때 에니어그램을 한 적이 있는데 5유형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했을 때도 5유형이 강하게 나왔다. 5유형은 관찰자형, 나서기보다는 주변 상황을 판단하고 섣불리 행동하지 않으며, 감성보다는 사고가 발달한 유형이란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나는 그런 이미지에 걸맞는 사람이다.

하지만 꿈은 나에게 넌지시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아무리 준비하고, 계획해도 사람의 삶이란 건 그 계획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오히려 뜻하지 않는 곳에 복병이 숨어 있고, 우연하게 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걸. 또 죽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척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넌 죽음에 대해 그렇게도 공포스러워한다는 걸.

근데 그걸 알아서 나에게 무슨 변화가 온다는 걸까? 음... 혹시 죽음에 대해, 죽음의 공포를 진정으로 만나라는 걸까? 지금까지의 나는 회피, 무시해왔기 때문에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없다는 걸까? 아니, 이겨낸다, 아니다의 의미가 아닌 공포를 공포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삶에 대해 그 그림자(죽음)또한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거만하게 내 의식의 흐름만을 쫓지 말라는 메시지인 듯...

내가 밝은 곳만을 향해 가는 듯 보이는 그런 위선을 벗어던지라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워낙 빛과 어둠은 한 몸인 것을~~ 뭔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서 이뤄질 수도 있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난 꿈 속에서 죽음의 그늘 가까이는 가보지만, 죽지는 않았다. 겨우 겨우 숨을 헐떡이며 살아남는 것. 어쩌면 그만큼 나는 죽음을 피하고 싶고, 살고 싶나보다. 하지만, 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닌, 다른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선택하라고 무의식이 말해주는 것 같다.

가끔 꿈을 꾸고 나서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정말 꿈에서 죽음을 선택했다면, 위로 오르려다가 공중에서 떨어져 죽었다면 어땠을까? 그래, 어쩌면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신나고 혹은 음울한 세상이 펼쳐질지도 몰라. 죽음이 끝,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 바로 미지의 탐험인 것이다.

최근에 영화 ‘판의 미로’를 보았는데, 주인공이 죽음으로서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죽음은 혹은 현실적이지 않음은 또 다른 길을 위한 열쇠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의식세계가 그걸 계속 막으려고 하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의식이 아닌 내 몸이 가는대로 내 욕구가 가는대로 나를 맡겨보는 시간을 늘이고 싶다. 어쩌면 내 무의식은 현실의 나와 함께 그 여행을 기꺼이 하고 싶어 계속 나에게 꿈으로 나타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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