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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 경제의 전도사, 한덕수 / 빈곤 - 체제의 정신나간 우선순위가 낳은 비참함

다함께 51 호

개방 경제의 전도사, 한덕수 / 빈곤 - 체제의 정신나간 우선순위가 낳은 비참함

- 김문성 / 승영

http://www.alltogether.or.kr/

 

 

개방 경제의 전도사, 한덕수

 

노무현이 이헌재 경제 부총리의 후임으로 한덕수를 지명했다. 한덕수는 김대중 정부 시절 OECD 대사, 정책기획수석, 경제수석 등을 거치면서 시장 개방 추진에 앞장섰던 자다. 특히 한·칠레 FTA 교섭을 이끈 주역으로 유명하다.

농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던 한중 마늘 협상 당시 협상 내용을 은폐했다는 의혹을 받고 청와대 경제수석에서 사퇴하기는 했지만, 노무현 정부에서도 그는 국무총리 직속 국무조정실장을 맡아 이른바 실용주의 경제 정책의 포스트로 일해 왔다. “개방 경제의 전도사”라는 그의 별명은 이러한 경력에 대한 칭송인 셈이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가 주는 표창을 받았는데, 당시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주한 미국기업은 자본주의적 사고와 서구식 경영을 한국에 도입하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한국은 주한 미국기업을 미국기업이 아니라 한국기업으로 대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한덕수는 또 마늘협상 파동으로 사표를 낸 직후 ‘김&장 법무법인’의 고문을 맡기도 했는데, ‘김&장 법무법인’은 대표적 투기자본인 론스타 등의 한국 진출에 법률 자문을 하면서 론스타와 경제관료 사이에서 다리 구실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대외 개방을 통한 성장론자’인 한덕수의 경제부총리 임명은 노무현 정부의 본질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김문성

 

 

빈곤 - 체제의 정신나간 우선순위가 낳은 비참함

 


“고등학교 입학금조차 없는 가난한 집의 둘째 딸. 이런 나에게 미래가 있을까 … 사랑하는 엄마, 내가 없어지는 것이 불효라는 것 알아. 하지만 내가 없어지는 것이 돈이 덜 나가 다행일지도 몰라.”

얼마 전 자살한 한 소녀 가장이 유서에 남긴 말이다. 우리는 요즘 이런 얘기를 익숙해질까 봐 두려울 만큼 많이 듣는다.

국민소득 2만 불 시대를 눈 앞에 둔 한국의 빈곤율은 정부 기준으로도 10.4퍼센트다. 외환위기 전인 1990년대 중반에 비해 2배 가량 높은 수치다. 최저 생계비 이하로 사는 사람과 차상위 계층을 포함한 빈곤층은 7백만 명에 이른다.


당연히, 빈곤은 누구나 인정하는 우리 사회의 핵심 이슈가 돼 버렸다. 그러나 빈곤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결책은 제각기 다르다.

주류 언론은 성장을 해야 빈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최근 “우리이웃”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조선일보>는 2002년 수준의 경제성장률(7.5퍼센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이재영 정책실장에 따르면 1999년 경제성장률은 9.5퍼센트나 됐지만, 중위 50퍼센트 이하 소득 빈곤율은 오히려 늘었다. 5년 동안 실행된 이 조사에서 한 번을 제외하고 성장과 빈곤개선의 연관이 나타나지 않았다.

정부 복지 정책의 핵심 중 하나인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결코 국민들의 기초생활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1인 가구에 36만 8천 원은 밥값에 불과할 뿐 영양 상태도 유지하기 힘든 돈이다. 문화 생활은커녕 아파도 제대로 치료 한 번 받기 어려운 액수다.

그것조차 받지 못하는 빈곤층의 수가 최대 4백2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수의 거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받지 못하는 이유도 황당하기 그지없다. 소득이 수혜 기준에서 천 원만 넘어도 한 푼도 받지 못한다. 부양의무자 기준은 특히 나쁜 독소조항이다. 2촌 이하 가족이 기준 이상 소득이 있으면 대상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그들 중 60퍼센트가 가족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노무현 정부 복지정책의 기본방향은 “노동을 통한 복지”다. 사람들에게 일을 하게 만들어 빈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내년에 EITC(근로소득 보전 세제)를 도입할 예정이다.

EITC는 많이 일하는 사람에게 더 많이 지원해 주는 노동 유인 복지 제도다. 이 제도에서는 일정 수준까지는 일을 많이 할수록 급여를 많이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일정 수준이 지나면 지급률이 줄어든다. 따라서 결국 최저생계비보다 별로 높지 않은 소득을 받게 된다.

미국에서 EITC 제도 도입 후 빈곤율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또 저임금 일자리라도 많이 해야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리하게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열악한 일자리가 많이 늘었고, 노동 유연화가 확대됐다.

정부가 EITC 도입을 핑계로 최저임금제나 기초생활보장법을 개악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1997년 이후 가난한 노동자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한국노동연구원 보고서를 보면 연봉 1천1백만 원 이하 일자리는 1993년 5백8만 개에서 2002년 6백27만 개로 1백20만 개나 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계속 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1997년 이전 40퍼센트대였지만, 2004년 8월에는 56퍼센트에 이른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30퍼센트 정도만이 4대보험을 적용받고 있다. 평균 임금은 1백9만 원으로 4인 가족 최저생계비(1백5만 5천90원)밖에 안 된다.

위 사례들은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지고 일자리의 질이 좋아지지 않는 한 빈곤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도 정부는 정규직을 비정규직화하고, 비정규직의 조건까지 악화하는 비정규직 법안을 통과시키려 한다.

이것은 이전에 노동자들이 쟁취한 성과를 회수하려는 시도다. 1987년 이후 노동자 운동의 성과로 국민 소득에서 임금 몫이 차지하는 비중인 노동소득 분배율과 노동시간 등이 꾸준히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개선돼 왔다.

그러나 1997년 이후 한국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더 가혹하게 쥐어짜면서 경제를 회복하려 했다. 정성진 교수는 1996∼2000년 사이 착취율 증가는 이 기간 이윤율을 매년 5.4퍼센트씩 상승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덕분에 부자들은 더 부유해졌다. 삼성 임원들은 스톡옵션으로 앞으로 1조 2천4백억 원을 받을 수 있다. 백화점 명품관은 매년 확장을 거듭한다.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소득 지니계수도 늘었다.

빈곤사회연대(준) 발족선언문은 이 불평등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한국의 부자 5퍼센트가 한국 사회 부동산의 50퍼센트를 소유하고, 용산시티 파크 이틀 청약 기간에 우리 나라 사회복지예산 70퍼센트에 달하는 돈이 몰리는 세상이다…”

정부는 복지 예산을 얘기할 때마다 예산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러나 10년 동안 첨단무기를 사기 위해 24조 원을 쓰는 것에 대해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재작년 기업들에게 1백조 원이 넘는 세금을 깎아주고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빈곤이 사회의 우선순위 문제임을 보여 준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양질의 사회적 일자리 제공과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핵심 정책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재원 마련을 위해 부자들에게 세금을 걷는 부유세 도입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 요구들을 지지해야 한다.

정부는 항상 장밋빛 미래가 얼마 안 남았다며 “인내”를 강요해 왔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장밋빛 같은 미래를 원한다면 이 사회의 거꾸로 된 우선순위에 맞서 저항하자!



승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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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들의 삶과 투쟁

다함께 51 호

이주노동자들의 삶과 투쟁 - 라디카 / 마숨  

http://www.alltogether.or.kr/

 

이주노동자들의 삶과 투쟁

 

지난 3월 5∼6일에 ‘다함께’가 주최한 ‘진보적 대학생이 꼭 알아야 할 10가지 주제’에서 두 이주노동자가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두 사람이 전해 준 이주노동자들의 진솔한 삶과 투쟁 이야기는 많은 청중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라디카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저는 한국 땅에서 1992년부터 살고 있습니다. 20대 나이에 들어와서 30대가 다 됐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까운 나이를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저는 1992년부터 지금까지 우리 이주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얘기하고 싶습니다.

오래 전부터 한국에 수많은 나라 사람들이 여러 방식으로 들어오면서 자기 살림과 자기 가족을 살리기 위해 노동을 해 왔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오랫동안 한국에서 힘들게 살면서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한국 노동자들 그리고 시민들은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일 빼앗긴다고 오해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들이 일 빼앗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3D업체의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거에요.

3D업체의 일이라는 것은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노동자들이 안 하는 일이 우리 이주노동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14시간, 15시간 일하면서도 낮은 임금 제대로 못 받고, 강제로 일 하다가 다쳐도 산재 안 되고, 일하는 현장에서 폭행당하고 차별받아야 하고, 누구한테 맞아도 입 다물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이주노동자입니다.

우리는 많이 고통받고 노예처럼 일해 왔습니다. 가족 생존권 위해 모두 아픔을 참고 일해 왔습니다. 언젠가는 한국 정부도 우리의 아픔을 알고 좋은 제도 만들거라는 기대감이 항상 있었어요.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마침내 2003년 7월 31일 국회에서 고용허가제가 통과됐습니다. 그 때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합법화될 수 있구나.” 기대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주노동자를 세 부류로 나눴습니다. 한국 체류 3년 미만자만이 합법적 신분을 얻었습니다. 4년 이상 불법 체류한 이주노동자는 모두 2004년 1월 15일까지 한국에서 떠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합법화된 3년 미만자들도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어 불법 체류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한국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한국 경제를 위해 일해 왔던 우리 이주노동자들을 아무 책임도지지 않고 나가라고 말하는 한국 정부 때문에 우리는 많이 고생했습니다.

고용허가제 때문에 너무 힘들게 일하고 있습니다. 고용허가제로 합법화된 3년 미만자들도 체류 기간이 다 돼 불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2003년 12월 15일부터 지금까지 심하게 단속하고 있습니다. 단속을 언제까지 하는지 언제 끝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역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계속 잡히고 있습니다. 지난주 의정부에서도 우리 친구들이 많이 잡혀 갔습니다. 한 여성분도 잡혀 갔어요. 나이도 어린데요. 출입국 직원들이 그녀를 잡다가 그녀의 손을 부러뜨렸어요. 손 부러지고 그 분은 쓰러졌어요. 그런데 출입국 직원들은 그녀를 그냥 두고 갔어요. 그 책임은 누가 지나요. 공장도 책임 안 지고 출입국 사람들은 도망가고. 우리의 존재와 마음이 한국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생존권까지 걸려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법무부는 왠지 단속·추방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해결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2003년 12월 15일부터 명동성당에서 이주노동자들 80명과 20명의 한국 활동가들이 함께 농성했습니다. 우리의 요구는 단속·추방 저지,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사업장 이동 자유였습니다.

농성중이었던 2004년 2월 15일에 우리 농성단의 이주노동자 대표 연행됐습니다. 또, 같이 투쟁하는 이주노동자 3명도 집회하다가 출입국 직원들에게 잡혀 갔습니다. 그 분들 석방을 요구하면서 단식 투쟁도 했습니다. 그 분들은 보호소에서, 저와 이주노동자 3명은 농성장에서 한 달 동안 단식했습니다.


추운 겨울 농성장에 모인 우리는 서로가 국적도 민족도 피부색도 말도 달랐지만 1년 동안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하며 뜨겁게 투쟁했습니다.

1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아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강제 추방과 인간사냥 때문에 14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에 와서 돈 많이 벌어 행복하게 살아가자는 가족과의 약속은 단 1분 만에 무너졌습니다.

그 가족들은 얼마나 울었을까요? 아들을 잃어 버린 엄마, 사랑하는 남편을 잃어 버린 아내, 하나밖에 없는 아빠를 잃어 버린 아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17년 전부터 우리 이주노동자들은 탄압과 차별을 받으며 노예처럼 살아왔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왔습니다. 바로 불법 체류자라는 이유로 많이 이용당했습니다. 많은 이주 여성들은 성폭행도 당했습니다. 이렇게 입 다물게 하고 우리를 언제까지 써먹을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참을 만큼 참아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알려 주고 싶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노동자는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지역에서 수도권 노동조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이주노동자들이 지금까지 받았던 고통과 탄압에 맞서, 권리를 위해 싸우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숨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


지금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우리한테 큰 성과가 있어요. 왜냐하면 오늘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우리한테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에요.

지금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40만 명이 넘어요. 바로 앞에도, 자기 동네에도 이주노동자들이 있어요, 자기 나라에서 자기 가족 다 놔두고 한국에 돈 벌려고 나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자기 가족처럼 대우해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지금 이주노동자들이 모두 합법화하면 자본가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이익이 없어지는 것 아닐까요?” 

이주노동자들 한국에 들어오는 이유는 한국에서 일하기 위해서에요.

그런데 한국 자본가들은 왜 이주 노동자를 고용할까요? 이주노동자들을 이용해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에요. 그것은 또 한국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해서에요. 이주노동자들이 장시간 일하고 적은 월급 받으니까 한국노동자들한테 “니네도 그렇게 해라.” 하는 거에요.

지금 점점 비정규직 늘어나고 있는 상태예요. 한국의 어느 집안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없는 집안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어떤 상황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조금 있으면 학생들도 잘 아시게 될 거에요.

이주노동자들이 합법화돼서 한국에서 일할 수 있으면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훨씬 좋아질 거에요.

건설 현장에 가면 거기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너무 적은 월급으로 일해요. 그래서 한국노동자들이 “니네들 때문에 우리가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식으로 말해요.

한국 노동자들도 월급이나 일당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태예요. 우리가 허가 얻고 한국에서 제대로 당당하게 일할 수 있으면 한국 노동자들과 같이 그 사람들 월급 적으면 올라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같은 일하고 장시간 일하니까.

한국 노동자들도 지금 받는 착취가 덜해질 것 같아요. 이주노동자들은 일 잘하는 사람이고 일 잘하면 그 사람 대우받고 싶어하죠. 인간이니까.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대우를 요구할 수 있어요.

난 한국 노동자들과 똑같은 월급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나도 노동자니까.

나를 이용해 한국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 않아요. 그 노동자는 내 형제예요. 그 분이 착취받는 것은 싫어요. 그렇게 안 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투쟁하고 있어요.


이주노동자 가족의 교육 문제를 말해 볼께요. 1999년에 이주노동자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이 허용됐어요. 국제노동기구 협약에 의하면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자기 가족들 데리고 와서 같이 살고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데 한국 정부는 아직까지 거기에 서명하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이트, 리비아, 싱가폴 같은 데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자기 가족을 데리고 가서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는데 한국은 초등학교밖에 안 돼요.

미안한 일인데, 제가 9년째 와이프와 떨어져 있는데, 얼굴이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해요. 데리고 오고 싶어도 돈 때문에 못 데려 오고. 우리 딸 데리고 와서 학교에서 교육시키려고 생각해도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요. 제가 일하는 것으로는 못 데리고 와요.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 같은데서 일하는 사람들은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적은 돈으로 자식들을 교육시킬 수 있어요. 고등학교, 대학교 가면 큰 돈이 나가겠지만요. 한국에는 아직까지 제대로 되는 게 없어요.


어떤 분이 외국의 이주노동자 정책과 그 시행에 대해 질문했어요.

저는 방글라데시 출신이에요. 중동에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엄청 많이 가 있어요. 정부들은 “지금 우리나라에 이런 사람 몇 만 명 필요하다” 하고는 데리고 가요. 거기서는 노동자가 일하고 싶은 공장에서 일해요. 자기가 너무 힘들면 자기 편한 데로 일자리 옮길 수 있어요. 사업장 이동 자유가 있어요. 싱가폴 같은 데도 비슷해요.

현재 한국에서는 내가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기분 나빠도 “오늘 일 못한다.” 이거 안 돼요. 나는 일 안하면 바로 잘려요. 잘리면 새로운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어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된 허가, 노동허가를 원해요.

동지들은 1970∼80년대 한국 노동자들이 독일에 가서 투쟁해 노동허가제를 얻어 놓은 것 알고 계세요? 그 때 간호원들이나 광부들이 독일에 가서 많은 탄압이나 차별받았어요. 투쟁하기도 했구요.

지금 한국에 있는 우리는 40만 명인데, 그 때는 2천5백 명이 투쟁해 노동허가 얻었어요. 독일 사람들이 미등록이나 차별받는 3D업체에서 일하는 분들과 적극 연대하고 도와줬기 때문에 빨리 노동허가 얻은 거에요.

아직도 그분들은 거기에서 살고 있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잘 살고 있어요.

끝으로, 이주노동자들이 테러리스트 아니냐는 얘기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정부는 반전 집회에 외국인들이 나오면 사진 찍어요. 다 테러리스트로 몰아요. 우리는 한국에서 좋은 추억 갖고 가고 싶어요. 우리는 테러리스트 아니고요. 반한(反韓), 안 했어요.

또, 한국의 정당한 투쟁들을 다 지지하고 적극 연대하고 싶고요.

정부가 아무리 탄압해도 우리는 우리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길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거 보다 더 좋은 길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싸울 거에요. 동지들이 우리와 같이 있으면 우리가 더 힘차게 싸울 수 있습니다.



라디카, 마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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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항쟁들이 진정한 저항인가?

다함께 51 호

이러한 항쟁들이 진정한 저항인가? - 크리스하먼

http://www.alltogether.or.kr/

 

이러한 항쟁들이 진정한 저항인가?

 

[크리스 하먼이 미국이 지원하는 우크라이나, 레바논 등의 ‘민주항쟁’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독재정권과 준독재정권 들은 세계 도처에 존재한다. 이 모든 곳에는 분노하고 저항하고자 하는 여러 부문의 대중이 있다.

내가 최근 방문했던 이집트의 예를 들면,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1981년부터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다. 무바라크 정권은 지난 24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어떤 사회 단체도 국가로부터 독립적으로 조직을 건설할 수 없다.

이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을 고무하고 지원하길 원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 또,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

이는 무슬림형제당같이 온건한 이슬람 운동과 좌파 무슬림에도 해를 끼쳤다.

또, 무바라크를 좋아하지 않지만, 서구식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집단들은 모두 억압받고 있으며 정권과 충돌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이 분출하면 적어도 처음에는 독재정권에 대한 그들의 일치된 반대 때문에 각 집단들 간의 차이점은 덮어진다.

그러나 이는 불안정하고 모순적인 상황을 낳는다. 이들 운동 가운데 일부는 노동자나 하층 중간 계급이나 농민 등 인구 대다수의 요구를 동력으로 삼고 있다.

이 때 주요 쟁점은 보통 실업·인플레이션·빈곤 등이다. 이는 1998년 인도네시아 봉기와 최근 에콰도르·아르헨티나·볼리비아 봉기의 주요한 배경이었다.

좀더 애매한 상황들이 존재한다. 많은 독재 정권들이 애초에 미국의 지지를 받아 수립됐지만, 미국이 나중에 그 독재 정부에 반대하는 저항을 조종하고 이용하려 할 수 있다.

이것은 미국이 한때 지지했지만 그 뒤 사이가 틀어진 정권에 반대하는 저항일 경우에 특히 두드러진다. 시리아의 예를 들어보자. 시리아 정부는 1991년 걸프전 때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시리아는 약 30년 전에 우익 팔랑헤 당 ― 미국·프랑스·이스라엘이 후원한 ― 에 맞서 투쟁하는 레바논 좌파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레바논에 군대를 보냈다.

현재, 이라크의 석유 통제권을 직접 장악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부시 주변의 네오콘들은 중동 정부들을 손 봐 더 확실히 미국 편으로 만들려고 한다.

네오콘들은 독재 혹은 준독재 정권을 미국식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바꾸려고 한다. 그들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정책을 추구하는 정당들이 참가하는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정부가 레바논과 시리아를 통치하기를 바란다.


미국은 특정 반정부 운동들을 친미적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미국은 운동에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고 운동 지도자를 선택하려 했다.

몇몇 반정부 지도자들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싸우길 진정으로 원한다. 그러나 작년 말 우크라이나 같은 경우에, 반정부 지도자들은 자기 지위를 끌어올릴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던 부패한 옛 지배 집단의 구성원들이었다.

물론 우크라이나에서 거리로 나온 사람들 중 다수는 사유화로 한몫 잡은 마피아식 집단들이 지배하는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사회를 끔찍이도 증오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지했던 운동은 하나의 마피아식 집단을 또 다른 마피아식 집단으로 교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중부 유럽의 지배권을 놓고 미국과 러시아가 벌이는 치졸한 공작에도 이용당했다.

이러한 정황들을 잘 판단하려면 누가 관련됐고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다른 상황에서는 세력 균형도 우크라이나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1980 ∼ 81년에 폴란드에서 일어났던 연대노조 운동은 지식인들이 투옥될 위험을 무릅쓰고 조직했던, 노동자들의 요구를 전면에 내세운 진정한 운동이었다.

이는 민주적인 자유, 진정한 노동조합을 조직할 권리, 더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 대중의 자생적인 운동을 촉발했다.

이 때 미국은 연대노조 운동을 어떤 식으로도 지지하지 않았다. 운동이 패배한 뒤인 1981년 말에 가서야 미국은 운동의 지도자들을 회유했고, 그들에게 미국식 세계관을 심기 위해 돈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1998년 인도네시아의 운동은 미국의 동남아시아 주요 동맹 정부 중 하나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미국은 수하르토 정부를 민주적 외양을 취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수하르토와 같은 목표를 추구하는 정부로 대체하려고 무척 애썼다.

1986년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를 전복하고 “민중권력”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운동은 순수한 대중운동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 뒤로 필리핀의 지배계급은 새 정부가 근본적으로 마르코스와 같은 노선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미국과 함께 노력했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한껏 고조될 때, 지배계급의 일부 분파들(과 주로 미국)이 그런 압력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기 전에 먼저 변화를 추진하려고 했던 경우는 많다.


사회적 위기가 심화하는 동안에도 미국은 기존 정부를 계속 지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반정부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미국 재단과 비정부기구를 이용해 반정부 운동 지도부에 침투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1970년대 후반 일련의 학생운동과 노동자 투쟁은 브라질의 군사독재를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장군들은 불만을 달래기 위해 선거 허용을 약속함으로써 이른바 “개방화” 과정이 시작됐다. 

상층계급은 자신들만 선거에 출마하고 당선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했다.


1987년 남한에서는 거대한 시위의 물결이 있었고, 1988년에는 파업들이 벌어졌다.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4년 뒤 선거 시행을 약속하라는 압력이 군부독재 정권에게 가해졌다. “안전한” 야당을 만들어 내는 주의깊은 과정이 있었고, 그 결과 폭발은 없었다.

지금 미국이 이집트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조처다. 무바라크는 선거를 치르겠다고 약속했지만, 미국은 무바라크를 패배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은 오직 가장 명망 있는 자본가 집단에게만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좀더 급진적인 반대 세력에 대한 억압은 계속될 것이다. 그들은 이번 선거를 묵인해 주고 선거 결과를 받아들인다면 몇 년 후에 그들도 입후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에 맞서 사회주의자들은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 민주적 권리를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과거 독재정권을 수립했던 사람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당하지 않겠노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는 한편, 사회주의자들은 옛 정권의 위기를 이용해 독립적인 요구를 내놓고 노동계급의 힘을 강화하며 지배 계급내 어떤 인물이 당선되든 간에 상관 없이 그에 맞설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레바논 사회주의자들은 시리아의 레바논 점령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또한 이스라엘의 시리아·서안지구 점령과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는 찬성하면서 시리아 군의 레바논 주둔을 비난하는 자들의 위선을 지적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미국의 중심 계획이 이스라엘의 레바논 점령에 저항하는 세력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시위가 있을 때는 바로 이러한 쟁점들이 제기돼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계획을 추종하는 동원에 참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집트 사회주의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당장 물러나라고 요구할 기회가 눈앞에 다가왔다. 무바라크와 관련된 신자유주의 정책, 비상계엄, 노동조합 통제와 같은 것들도 함께 없어져야 한다.

만약 사회주의자들이 그 같은 요구들을 주장한다면 그들은 미국이 의도한 것과는 다른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 아무리 강대국일지라도 다른 나라에 개입해서 “정권 교체”를 선동하는 데에는 언제나 위험이 뒤따른다.

독일 정부는 제1차세계대전 중이었던 1917년에,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과 멘셰비키 지도자 마르토프를 태운 기차를 러시아로 보내면 상황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분명 러시아를 격변에 빠뜨렸다. 그러나 1년 뒤에는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지금 당장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의 거리에서 우파 기독교 민병대가 주도하는 시위가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레바논 폭격을 기억하고 있고 레바논 인구의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시아파 무슬림을 자극할 것이고, 그들이 거리로 나설 수도 있다. 그들의 요구는 지금 들리는 요구와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미국의 네오콘들은 어느 사회에나 자신의 비전에 협력할 자본가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바로 네오콘들이 의존하고 협조하며 권좌에 앉히길 바라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피폐해진 중간 계급과 끔찍한 생활수준을 견디도록 강요당해 온 대다수 노동자와 농민 들이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그들은 미국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거리로 나설 수 있다.

1백 년 전에 레온 트로츠키는 1905년 러시아 혁명에서 자본가들이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길 회피했지만, 노동자들이 이런 요구를 채택해 사회주의적 요구와 결합시켰다고 지적했다. 트로츠키가 연속혁명이라고 불렀던 그 과정은 중동에서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는 악몽이 될 수 있다.


번역 조민정






[크리스 하먼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자 계간지 ≪인터내셔날 쇼셜리즘≫의 편집자다. 국내에서는 ≪민중의 세계사≫(책갈피), ≪세계를 뒤흔든 1968≫(책갈피) ≪신자유주의 경제학 비판≫(책갈피), ≪저항의 세계화≫(북막스) 등 여러 권이 번역돼 있다.
그는 8월에 ‘다함께’가 주최하는 ‘전쟁과 변혁의 시대’에서 연설하기 위해 한국에 올 예정이다.]



크리스 하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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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운동이 다시 전진할 기회 / 마침내 드러난 팔루자의 진실

다함께 50 호

반전운동이 다시 전진할 기회 / 마침내 드러난 팔루자의 진실

 - 김광일  / 살람 이스마엘 

http://www.alltogether.or.kr/

 

반전운동이 다시 전진할 기회 - 김광일

 

3·20 행동은 무엇보다 반전운동이 부시의 거짓말에 속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중요한 계기다. 부시는 1월 30일 총선이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가져다 줬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점령은 계속되고 있다. 점령이 지속되는 한 반전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부시의 ‘아낌 없이 주는 나무’ 노무현에게도 파병은 여전히 아킬레스 건이다.

부시의 위기가 심화할수록 핵심 동맹국의 구실이 더욱 중요해진다. 점령군 주둔을 장기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추가 파병의 위험도 존재한다.

2월 말에 호주 총리 존 하워드는 450명의 추가 병력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노무현도 추가 파병의 유혹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3·20 행동은 이라크 점령과 추가 파병을 반대하는 운동의 발판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지난해 말 ‘개혁입법 사기극’을 벌였다. 그러나 한나라당 등 우익의 눈치를 보면서 ‘개혁 입법’을 2월 임시국회로 미뤘고, 그러다 4월 임시국회로 또 넘겼다. 4월 임시국회를 앞두고 건설되는 3·20 행동은 노무현의 ‘개혁 사기극’에 항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3·20 행동은 한국에서 건설할 중요한 반전·반신자유주의 투쟁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

부시가 11월 APEC 정상회담 때문에 한국을 방문한다. 그리고 12월 홍콩에서 WTO 각료회담이 열린다. 반전운동은 이미 전쟁과 이윤의 관계를 연결시키는 정치적 급진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3월은 각 대학에서 등록금을 비롯한 교육환경 개선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는 때다. 미국과 영국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구호는 “BOOKS NOT BOMB”(폭탄이 아니라 책을)이었다. 3·20 행동에서 “점령지원이 아니라 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이라는 요구를 결합시킨다면 반전운동과 교육환경 개선 투쟁 모두에서 상승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3·20 행동 건설은 지난해 8월 자이툰 부대 파병 강행, 11월 부시의 재선 때문에 다소 의기소침해진 한국 반전운동의 어깨를 토닥이며 운동이 전진할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다.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에서 3·20 행동 건설 촉구를 담은 반전 결의안에 393명의 대의원이 서명했다. 이것은 참석한 대의원 중 4분의 1에 해당한다.

·공무원노조 대의원대회에서 3·20 행동 참가를 호소하는 결의문에 120명의 대의원이 서명했다. 참석 대의원 중 3분의 1이 넘게 서명했다. 공무원노조 김영길 위원장은 공무원 노동자들의 3·20 행동 참가를 호소했다.

·서울대학생총연합(서총련)은 3월 투쟁 계획서에서 3·20 행동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소속 회원 의사와 약사의 병원·약국에 3·20 행동 포스터를 부착할 계획이다.

·서울 지하철노동조합은 지하철 역사내 3·20 행동 포스터를 부착하기로 했다.

 

※ 3.20 행동에 관한 문의

파병반대국민행동 (www.antiwar.or.kr 02-2631-5055 antipabyeong@empal.com)

 

마침내 드러난 팔루자의 진실  - 살람 이스마엘

 

살람 이스마엘 박사는 1월에 팔루자를 구호차 방문했다. 이스마엘 박사(28세)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까지 바그다드 청년의사회 대표였다. 그는 지난해 4월에 미군이 팔루자를 공습했을 때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팔루자에 있었다. 그가 지난해 11월 조지 W 부시가 재선된 직후 미군이 어떻게 한 도시를 파괴했는지 증언한다.

 


 

처음 나를 엄습한 것은 형언하기조차 힘든 냄새였고, 그 냄새는 절대 가시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였다. 팔루자의 집· 마당·거리에서 수많은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남자·여자·어린이의 시체들이 죽은 곳에서 그대로 썩어 가고 있었고, 그 중 다수는 들개들에게 반쯤 뜯긴 상태였다.

나는 그 뒤 며칠 동안 들은 얘기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팔루자 근처에 위치한 임시 난민 수용소인 사클라위야에서 17살 된 한 소녀를 만났다.

“저는 팔루자의 욜란 지구에서 온 후다 파우지 살람 이사위입니다. 포위 공격이 시작된 뒤 우리 식구 다섯 명은 55살 된 이웃 노인과 함께 집에 숨어 있었어요. 11월 9일 미 해병대원들이 우리 집에 왔죠.

“우리 아빠와 이웃 할아버지가 현관으로 나가자 미군들이 발포했어요. 아빠와 이웃 할아버지가 즉사했죠. 군인들은 우리 언니를 마구 때린 다음 총으로 쐈습니다.”

지난 해 11월 12일 에야드 나지 라티프와 생후 6개월 된 아기를 포함한 그의 여덟 식구가  짐을 챙겨 한 줄로 서서 사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사원 밖 대로에 다다랐을 때 고함소리를 들었지만,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에야드는 그 소리가 영어로 “지금이야(now)”였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발포가 시작됐다.

에야드의 아버지는 심장에, 어머니는 가슴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에야드 형제 중 두 명도 각각 가슴과 목에 총을 맞았다.

저격수들은 에야드의 형제 중 한 명의 아내를 죽였다. 그녀가 쓰러졌을 때 다섯 살 난 아들이 달려와 그녀 시체 옆에 섰다. 그들은 아들마저 쏴 죽였다.

생존자들은 필사적으로 군인들에게 제발 쏘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누구든 백기를 들 때마다 총을 맞았다고 에야드는 말했다. 몇 시간 후 그는 백기를 들었다. 그러나 미군은 그의 팔에 총을 쐈다. 마지막으로 그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미군은 그의 손에 총을 쐈다.

나는 눈에 눈물이 가득한 한 할머니를 만난 기억이 난다. 그녀는 내 팔을 움켜잡고 어떻게 자기 집이 공중 폭격 때 투하된 미군 폭탄에 의해 부서졌는지 말해 주었다. 19살 된 아들 위로 천장이 무너져 내리면서 아들의 양쪽 다리가 잘렸다.

그녀는 지혈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하나뿐인 아들이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그는 4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우리는 도시 북서부에 위치한 가난한 노동자 주거 지역이자 미군의 4월 포위 공격 당시 저항의 중심지였던 욜란 지구의 집들을 방문했다.

두 번째 공격 동안 미군은 마치 이 지역을 보복 대상 1호로 삼은 듯 했다. 우리는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침대 위나 거실, 부엌 등에 죽어 있는 일가족의 시체들을 발견했다.

어떤 곳에서는 검은 옷에 탄약띠를 맨 전사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러나 집안에 있던 대다수 시체들은 민간인들이었다.

많은 이들은 실내복을 입은 채 였고, 죽은 여성들은 많은 얼굴을 베일로 가리지 않은 상태였는 데, 이는 집안에 가족 외 다른 남자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기도, 빈 탄약통도 없었다.

우리가 목격한 것은 대량 학살의 결과이자, 힘 없고 무방비 상태인 민간인들에 대한 냉혹한 학살임에 분명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점령군은 지금 자신들의 범죄를 은폐하려고 그 지역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있다.

팔루자에서 일어난 일은 잔혹한 만행이다. 전 세계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

번역 조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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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 주다 / 모든 힘을 다해 투쟁을 건설할 때다

다함께 50 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 주다 / 모든 힘을 다해 투쟁을 건설할 때다

 - 정동석(현대차 정규직 노동자)  / 전지윤 

 http://www.alltogether.or.kr/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 주다 - 정동석(현대차 정규직 노동자)

 

   

울산 현대차 5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이 한 달 반이 넘게 계속되고 있다.

2월 21일에는 “이제껏 농성장의 많은 젊은 친구들이… 머리가 피로 범벅이 되고, 경비 여럿에게 무자비하게 밟히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5명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그리고 끝까지 나가볼랍니다”라며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현대사측은 이를 폭력으로 짓밟으려 했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웃통을 벗고 결연히 맞섰다. 야만적인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투쟁에 갈수록 지지와 연대가 확대되고 있다.


현대차정규직노조 윤성근 전(前) 위원장과 현대정공 안현호 전(前) 위원장이 농성장에 결합했고 5공장 정규직 대의원회는 단전·단수 해제를 사측에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 때문에 사측은 2월 25일에 농성장 단전·단수를 해제해야만 했다.

나는 내가 속한 4공장 정규직 소위원 의장에게 5공장 농성장 지지 방문을 제안했다. 소위원 의장은 동의했고 지지금으로 노조 활동비 10만 원을 인출했다. 소위원 의장은 대의원 대표에게 다시 제안했고,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2월 24일 4공장 대소위원 10여 명은 5공장 비정규직 농성장에 지지 방문을 갔다. 도장부 탈의실은 단전·단수로 컴컴하고 바닥은 아주 차가웠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촛불 몇 개를 피우자 서서히 밝아지며 금새 집회장으로 변했다. 비정규직 농성자들은 우리를 반기며 팔을 흔들고 파업가를 불렀다.

한 정규직 대의원은 농성장에 들어서자마자 “회사를 이대로 두면 안 된다! 빨리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되지 않겠냐”며 사측의 단전·단수에 화를 냈다.

다른 대의원은 “너무 늦게 방문해서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노조 비대위 위원장 조가영 동지는 “이렇게 대·소위원 동지들이 방문하니 우리는 절로 힘이 난다”고 반겼다. 

비정규직 노조는 해고된 1백여 명의 노동자들 생계비 지원을 위한 CMS 용지를 가져왔고, 나는 곧바로 그 용지에 5천 원을 적어 놓았다.

2월 27일에는 서울에서 민주노동당 당대회가 있었다. 당대회장에서 나는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동지들, 민주노동당내 ‘다함께’ 동지들과 함께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 지지 모금을 벌였다. 순식간에 1백34만 2천 원이 모금됐다.

다음 날 2월 28일, 나는 울산시당 이용진 북구지역위원장과 함께 조가영 동지를 만나 모금 결과를 말해 줬다.

조가영 동지는 아주 반가워하며 “최남선 동지의 분신 치료비 등 재정이 힘들었다.”고 했다. 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현재 7일째 단식하고 있는데, 경비들이 주위에 어슬렁거리면서 욕설을 하며 모욕감을 주고 있다. 그래도 단식자들은 병원에 실려갈 때까지 단식할 거라고 결의를 다지고 있다.”고 말해 줬다.

이 날 저녁, 울산 현대차에서는 2천5백여 명의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인 ‘원·하청 노동자 공동 결의대회’가 열렸다.

그 동안 연대에 소극적이었던 현대차 정규직 노조가, 이번에는 고무적이게도 전 공장 잔업을 거부하고 2천여 명의 정규직 노동자를 동원하는 열의를 보였다. 사상 최초의 원·하청 공동 잔업거부가 이뤄진 것이다.

집회에서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모금한 투쟁 지지금을 전달하며 이용진 동지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민주노동당이 선두에 설 것이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끝까지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집회에서 현대차정규직노조 이상욱 위원장은 “어떤 정규직 조합원들은 우리의 고용 불안이 심각한데 지금 비정규직 동지들의 정규직화가 시기적으로 맞느냐?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동지들! 비정규직 동지들의 정규직화 투쟁은 역사의 요구입니다. 저는 이 투쟁이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동지들과 우리가 하나로 투쟁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말을 실천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다.


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집회 이후 “현자 노조 깃발과 비정규직 노조 깃발이 같이 입장하[는] …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내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난 너무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다. … 참 보기 좋았다. 그래 바로 저거야. 저게 바로 ‘노동자는 하나다’ 라고 하는 거야.”라는 글을 노조 게시판에 올렸다.

소극적이었던 정규직 노조 지도부를 이만큼이나마 움직이게 한 것은 5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절하고 영웅적인 투쟁이었다. 현대차의 투사들은 비정규직 노조와 5공장 농성 투쟁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건설하고, 무엇보다 정규직 노조 지도부와 노동자들을 이 과정에 끌어들여야 한다.

노무현이 4월에 국회에서 비정규직 개악안을 밀어붙이려는 지금, 현대차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하는 불법 파견 철폐 투쟁을 건설하는 것은 더할 나위없이 강력한 투쟁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모든 힘을 다해 투쟁을 건설할 때다 - 전지윤

 

비정규 개악안을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지 않고 4월로 넘긴다는 저들의 거짓말에 노동자들은 한시름 놓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나다를까 노무현과 열우당은 우리의 뒤통수를 치며 2월 23∼24일 이틀간 개악안 통과를 시도했다.

저들은 공식적으로는 ‘이번에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말하고 비공식적으로는 ‘유보될 수 있다’고 흘리며 교활한 사기극을 펼쳤다. 재벌과 한통속인 한나라당은 민주노동당과 ‘처리 유보’를 합의하며 사기극에 힘을 보탰다.

 

열우당 장복심은 갑작스레 뒤통수를 맞은 노동자들을 우롱하며 “정치는 그때그때 다른 거지”라고 말했다.   

이런 태도 돌변은 전경련과 경총 등 기업주 단체들이 한나라당을 방문하는 등 개악안의 빠른 통과를 재촉하자 나온 것이다.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가 말하듯 “정부의 ‘비정규보호법안’은 … 전경련과 경총의 법안이며 재벌과 가진 자들을 위한 법안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이런 뒤통수치기 사기극을 통해 저들은 비정규 개악안을 ‘처리 직전’까지 조금 더 옮겨 놓았다. 열우당 이목희는 거드름을 피우며 “[이 법안으로] 당사자들끼리 사회적 대화를 하고 싶으면 말리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뒤통수를 맞은 민주노총은 2월 23일 ‘법안 통과시 즉각 사회적 교섭 페기와 무기한 총파업 돌입’이라는 배수의 진을 쳤다.

그러나 저들이 민주노총을 얕잡아 보고 뒤통수를 친 데에는 이수호 집행부의 잘못된 노선도 한몫 했다. 이수호 집행부는 노무현의 악랄한 노동운동 탄압과 공격이 뻔히 보이는데도 투쟁을 건설하기보다 ‘사회적 교섭’에 더 매달렸다.

지난 2월 1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장에서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조가영 비대위원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분신하고 다치고 터지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적 교섭을 할 수 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민주노총 이수봉 대변인은 “총파업을 한다고 한들, 며칠이나 할 수 있겠나? … 솔직히 말하자면 힘이 약하니까 대화하자는 거다” 하고 ‘고백’했다.(<프로메테우스> 2월 7일 인터뷰)

또, “노무현이나 이해찬이나 이런 사람들은 그래도 막가는 판을 바라지는 않는다 … [비정규 개악안 처리 유보는] 사람과 사람과의 약속이다” 라는 말도 했다.

노무현과 열우당은 스스로 ‘우린 힘이 없다’고 고백하는 민주노총 지도부를 우습게 보고 뒤통수를 치며 개악안을 밀어붙이려 한 것이다.

 

더구나 대화에 매달리면 힘이 커질 수가 없다. 민주노동당 네덜란드 통신원 장광열 씨가 네덜란드 노동운동을 평가하면서 지적했듯이 “타협에 익숙해진 노동조합은 점점 투쟁력도 감소하게 마련”이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민주노총 대표단으로 참여했던 공공연맹 양경규 위원장은 “노동계는 뭔가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사회적 교섭에 참가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자본과 정권의 들러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개악안 통과의 의도치 않은 조력자로 위치지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프레시안> 2월 18일치 인터뷰)

전국비정규직대표자연대회의는 “사회적 교섭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중단하고 법 개악 저지와 권리 입법 쟁취를 위한 총파업 투쟁에 나설 것을 … 피 끓는 절절함으로 호소”했다.

노무현과의 격돌이 잠시 미뤄진 지금 민주노총의 모든 인력과 자원과 고민은 ‘사회적 교섭’이 아니라 총력 투쟁을 건설하는 데로 돌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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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제7, 8차 중앙위원회 - 날카로운 정치적 긴장이 표출되다 / 아쉬움과 우려를 남기고 끝난 당대회

다함께 50 호

제7, 8차 중앙위원회 - 날카로운 정치적 긴장이 표출되다 / 아쉬움과 우려를 남기고 끝난 당대회   

- 정병호(민주노동당 4기 중앙위원) / 이승민 (민주노동당)

http://www.alltogether.or.kr/

 

제7, 8차 중앙위원회 - 날카로운 정치적 긴장이 표출되다 

- 정병호(민주노동당 4기 중앙위원) 

 

지난 2월 19일 민주노동당 제4기 7차 중앙위원회가 열렸다. 이번 중앙위는 2005년 예산안 심의, 당 지역 조직 체계 개편, 북핵 관련 결의안, 사회적 교섭 관련 결의안 등 몇몇 안건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논쟁과 북한의 핵 보유 선언이 불거진 상황을 반영해 팽팽한 긴장과 날카로운 이견이 표출된 중앙위원회였다.

중앙위원들의 서명을 받아 ‘민주노총 사회적 교섭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이 제출됐다.

이 결의안은 “사회적 합의주의는 노동자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투쟁력을 소진하는 자기살 깎아먹기일 뿐”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민주노총 이석행 사무총장은 신상 발언을 이용해 결의안을 사실상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일부 중앙위원들이 야유와 고함을 질렀다.

이석행 사무총장은 중앙위원들의 토론 자체를 막기 위해 안건 반려를 요청했다. 아쉽게도, 2백여 명의 중앙위원 중 1백20명이 안건 반려에 찬성했다.

뒤이어 북핵 관련 결의안이 제출됐다. 이 결의안은 지난 2월 11일에 발표된 ‘북한 외무성 성명에 대한 최고위원회 논의 결과’에 대한 반발 성격이었다. 최고위원회가 미국만 비판할 뿐 북한 핵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이 날 제출된 결의안은 양비론적 견해를 취했다.

나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지지하면서도, 미국과 북한을 동일한 수준에서 비판하는 결의안의 내용에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양비론적 견해는 현실의 세력 관계는 불균등한데 추상적으로 ‘균형적’ 비판을 하다 보니 실천적으로는 일관된 반제국주의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이정미 최고위원은 토론을 무마히기 위해 안건 반려를 요청했다. 이 최고위원은 북한 핵에 대한 무비판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
권영길 의원은 미국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중앙위원회 북핵 결의안은 국회내 “초당적 결의”를 어렵게 만든다는 이유로 안건 반려를 지지했다.

결국 중앙위원 다수가 안건 반려를 지지했지만, ‘동상이몽’이었던 셈이다.

이번 중앙위원회는 첨예한 이견이 존재하는 쟁점에 대해서 번번히 안건 반려를 함으로써 토론을 가로막은 아쉬움이 많은 자리였다.

 

아쉬움과 우려를 남기고 끝난 당대회  - 이승민 (민주노동당) 

 

2월 27일에 열린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는 지난해 하반기 사업 평가를 놓고 긴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당의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 전술을 놓고 첨예한 견해 차이가 불거졌다. 사실, 이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계속되고 있는 논쟁을 반영한 것이다.

당 지도부는 지난 7차 중앙위원회에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지는 못했지만 헌신적으로 투쟁했고, 수구·보수 대 진보·개혁 구도를 형성하여 한나라당을 반역사적·반국민적 정당으로 낙인찍었다”는 초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위원회는 열린우리당의 기회주의성을 효과적으로 폭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비정규직 투쟁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추가했다.

당대회에서는 이런 중앙위원회의 평가를 뒤집는 시도가 있었다.

신석진 대의원(인천)은 국가보안법 투쟁을 통해 “한나라당을 반역사적·반국민적 정당으로 낙인찍었고, 열린우리당을 무능하고 기회주의적인 정당으로 각인시켰으며 진보 개혁의 대세적 흐름을 조성했다”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그러자 민동원 대의원(서울 양천을)은 수구·보수 대 진보·개혁의 흐름을 조성해 한나라당을 폭로했다는 평가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수정안은 모두 부결됐다.

사실, 국가보안법 투쟁의 핵심 문제는 당 지도부가 열린우리당과의 ‘개혁 공조’에 발목 잡혀 독립적으로 운동을 건설하지 못한 것이었다.

지난해 사업 평가를 둘러싼 논쟁이 지리하게 벌어진 데다, 지나치게 많은 의사 진행 발언 때문에 나머지 중요한 안건들을 토론할 수가 없었다.

당 지도부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들어 일부 안건들(2005년 사업 계획, 당헌과 강령 개정)을 찬반 토론 없이 표결했다.

게다가 예산안과 대의원들이 당대회 시작 전부터 대회장에서 열의 있게 발의를 준비한 반전 결의안, 사회적 교섭 재고 결의안, 북핵 관련 결의안 등은 모두 중앙위원회로 위임됐다.

상당수 대의원들은 이런 중요한 안건들을 최고 의결 기관인 당대회가 아니라 중앙위원회로 위임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사실 이번 당대회는 당이 대규모로 성장하고 나서 처음으로 열렸다. 그 때문에 많은 대의원들이 커다란 열의를 가지고 당대회에 참가했다. 새벽 2시가 다 돼서도 대다수 대의원들은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밤 10시부터 나머지 안건들을 중앙위에 넘길 것을 독촉했다.

이 때문에 당대회가 토론과 논쟁에 장이기보다는 점점 거수기 노릇을 하고 있다는 대의원들의 우려와 불만은 단지 기우만은 아닌 듯하다.

물론 일부 대의원들이 보여준 형식주의적 민주주의와 평당원주의도 진지한 토론을 어렵게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점은 개선돼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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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에 맞서 싸웠던 여성들 / 투쟁하는 여성들이 말한다

다함께 50 호

억압에 맞서 싸웠던 여성들 / 투쟁하는 여성들이 말한다  

http://www.alltogether.or.kr/

 

억압에 맞서 싸웠던 여성들 - 다함께

 

3월 8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다. 이 날을 경축하며, 급진적 운동을 이끌었거나 여성해방과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 온 여성들의 말을 소개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1759-1797)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불만의 먹이가 되어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가. 그들은 의사가 되거나, 농장을 경영하거나, 상점을 운영하거나, 독자적인 사업을 이용해 독립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연약한 감수성에 짓눌린 채 풀이 죽어 있다. 한때 그들의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만들었던 바로 그 감수성이 이제는 그들의 아름다움을 좀먹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적인 존재로 만들어졌고 여성이 얻는 모든 힘은 그들의 매력과 연약함에서 생긴다는 지배적인 견해 때문에 여성들은 한없이 초라해지고 온갖 종류의 근심 걱정과 슬픔에 빠진다. 그런 것들을 추적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우리 여성들은 도대체 왜 창조됐을까? 누군가는 순결한 상태로 남아 있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 여성들은 늘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유명한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최초의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인 울스턴크래프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보며 깊은 영감을 얻었다.
 
소저너 트루스 (1797-1883)

“남자들은 여자들이 마차를 탈 때 도와 줘야 하고, 도랑을 건널 때 부축해 줘야 하며, 어디서나 제일 좋은 자리를 여자들에게 내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마차를 타거나 진흙 웅덩이를 건널 때 나를 도와 주거나 나에게 제일 좋은 자리를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여자가 아닌가? 나를 보라! 내 팔을 보라! 나는 밭을 갈고, 씨 뿌리고, 수확한 것을 곳간에 채웠고, 어떤 남자도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여자가 아닌가? 나는 남자만큼 일할 수 있고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을 때는) 남자만큼 먹을 수 있고 남자만큼 채찍질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여자가 아닌가? 나는 열세 명의 아이들을 낳았는데, 거의 다 노예로 팔려 갔다. 내가 어머니로서 슬피 울부짖을 때, 예수님을 빼고는 아무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여자가 아닌가?”

 

노예 출신의 소저너 트루쓰는 여성을 대하는 사회의 위선과 이중 잣대를 비판했다.

 

엘리자베스 드미트리에프 (1851-1910)

“파리가 봉쇄됐다. 파리가 포격당하고 있다. 대포의 굉음이 들리는가, 무장하라는 신성한 호소가 울려 퍼지는 것이 들리는가! 파리 시민들이여, 프랑스 대혁명기 여성의 후예들이여, 민중과 정의의 이름으로 베르사유로 행진했고, 국왕 루이를 포로로 잡았던 여성들이여 ― 프랑스 민중의 어머니이며 아내이자 누이인 우리들이 가난과 무지가 우리 아이들을 적으로 삼도록 놔둬야 하는가? 압제자들의 변덕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서로 죽이도록 놔둬야 하는가? 시민들이여, 결투가 시작됐다. 우리는 승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드미트리에프는 1871년 파리에서 이 선언을 발표했다. 노동자들은 파리를 장악하고 파리 코뮌을 건설했다. 그녀는 파리의 여성들을 조직하는 데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에서 코뮌을 방어하며 모든 구습에 도전했다.

 

클라라 체트킨 (1857-1933)

“우리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그것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유산 계급들의 정치 권력에 대항하는 전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그 투쟁의 목표는 언젠가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남녀 구분 없이 자본주의 사회 질서에 이렇게 외치며 도전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의지하고 있다, 당신들은 우리를 억압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들이 세운 건물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 보라.’”

 

체트킨은 독일의 지도적 사회주의자였다. 그녀는 국제 여성의 날을 제정하자는 호소를 이끌었다.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 (1890-1961)

“‘응접실의 여왕’은 ‘부엌의 하녀’와 어떤 공통점도 없다. 백화점 소유주의 아내는, 주당 5달러를 받는 점원에게 유일하게 열려 있는 출구가 성매매라는 것을 깨달은 17살 소녀에게 자매 같은 관심을 전혀 보여 주지 않는다.

남성들의 형제애와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자매애도 노동자들에게는 공허한 속임수일 뿐이다. 그 모든 잘난 체하는 위선과 역겨운 감상주의 이면에는 계급 전쟁의 사악한 모습이 숨어 있다.”

 

플린은 전통을 깨고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모두를 조직한 전투적 노조인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지도적 조직자였다. 매카시의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했던 1951년, 그녀는 2년 동안 투옥됐다.

 

실비아 팽커스트 (1882-1960)

“내가 이스트 엔드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들은 쇠약해진 아이들을 데리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환자의 눈에서 굶주림을 봤다. 그 때 나는 다시는 이전의 내 직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성 참정권 활동을 한 죄로 몸서리칠 만큼 야만적인 투옥과 강제 급식을 당하는 것을 여러 차례 목도해 왔다. 나 또한 투쟁을 벌여 왔고, 내 수명은 그 때문에 단축될 것이다. 

당신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는데 당신 같은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잘못됐다.

자본주의는 잘못된 사회 체제이고 없어져야 한다. 나는 자본주의를 없애는 데 내 삶을 바칠 것이다.”

 

1920년 선동죄로 기소돼 법정에서 한 연설. 예술가이자 전투적 여성 참정권론자였던 팽커스트는 런던의 빈민가 이스트 엔드에서 여성들을 조직했다. 러시아 혁명에 고무받은 그녀는 가족[어머니를 포함해 팽커스트 집안의 여성들은 영국의 유명한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이다 ― 편집자]과 결별하고 자신이 “볼셰비키임이 자랑스럽다”고 선언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1871-1919)

“배반, 부도덕, 피바다, 탐욕 ―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이다. 

문화, 철학, 윤리, 질서, 평화, 그리고 법치의 가식을 쓴 깨끗함과 단정함과 도덕이 아니라 게걸스러운 야수, 무질서한 악마의 연회, 문화와 인간성을 위협하는 역병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독일·프랑스·러시아·영국의 노동자들이 취중 몽상에서 깨어나 형제애 속에서 서로의 손을 굳게 잡고, 전쟁광들의 괴성과 자본주의 하이에나들의 소란스런 울음을 노동자들의 우렁찬 함성으로 압도하기 전까지 광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유혈낭자한 지옥의 악몽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룩셈부르크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혁명가 중 한 사람이고, 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좌파를 이끌었다. 그녀는 이 글을 제1차세계대전 동안에 썼다.

 

아룬다티 로이 (1961- )

“우리가 모두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정말로 반대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을 이라크로 돌립시다. 우리는 점령에 반대하는 세계적 저항이 돼야 합니다. 우리의 저항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제국이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실제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행동을 뜻합니다. 그것은 병사들이 전투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 예비군들이 복무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 노동자들이 배와 비행기에 무기 싣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중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룬다티 로이는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 수상 경력이 있는 인도 소설가이며 자본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전 세계 운동의 지도적 인물이다. 이 연설은 2004년 1월 세계사회포럼에서 한 것이다.

 

투쟁하는 여성들이 말한다  - 다함께

 

● 박덕준  (전교조 여성위원장)

 

대부분의 여성 교사 노동자들은 맞벌이 부부인 경우가 많습니다. 직장인 학교도 다녀야 하지만 가정에서 살림도 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어요.
전교조 조합원 가운데 약 60퍼센트가 여성(전체 교사들 가운데 여성 비율은 훨씬 높아요)이지만, 전교조 간부 중 여성 비율은 훨씬 떨어져요. 이것은 여성의 능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이 아니에요.
예를 들면, 교장이나 교감은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근무평점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을 낮게 평가해요. 여성들이 집안일 등을 이유로 ‘칼퇴근’하는 것이 나쁘게 평가받는 이유가 되곤 하죠.
또 각 학교에 시간강사, 기간제 교사 같은 비정규직 교사 노동자들이 있고, 영양사, 행정실 회계보조사, 조리사, 전산보조 직원 등과 같은 분들이 학교 비정규직노동조합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교사와 학교 비정규직노조의 구성원들도 대체로 여성이 훨씬 많아요.
따라서 대학의 경우 학교 내에, 중고등학교 내에서는 지역 내에 탁아방을 설치해 줄 것을 교육부에 요구하고 있어요. 여성의 권리를 위한 이런 요구들을 “역차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것은 역차별이 아니라 그 동안 여성들이 얼마나 억압적이고 열악한 현실에서 일해 왔는지를 반증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여성 억압은 여전히 존재하므로, 오늘날 국제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당연히 의미가 있어요. 남성을 이기고 억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죠. 평등한 세상으로 가는 길에 여성들도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해야 합니다.

 

● 김경숙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대교지부 서울지회 준비팀장 )

 

저는 학습지 교사한 지 굉장히 오래됐어요. 1990년에 입사해서 16년 간 일해 왔어요. 근속연수로 치자면 회사에서 탑10에 들 정도인데 월급이 오히려 줄었어요. 지난 10년 간 정규직 임금이 10배 인상됐다면, 학습지 교사들은 오히려 10년 간 월급이 5분의 1로 줄어들었어요. 어떠한 보장(4대보험 같은)도 없고, 월급도 권리보장도 없고 회사가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을 해야 하는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일하고 있어요.
우리는 90퍼센트 이상이 여성이에요. 그런데도 모성보호는 하나도 안 되고 있어요. 회사는 그냥 우리를 소모품으로밖에 취급하지 않아요. 임신하면 그냥 그 날로 계약해지돼요. 애낳고 다시 돌아오면 그 동안의 경력은 하나도 인정받지 못해요. 
이런 일들은 여성노동을 비하시키는 일이에요. 출산율 저하가 사회적 문제라고 하지만 애 낳을 조건부터 사회가 만들어줘야 합니다.
노동조합을 하면서 노동자라는 인식을 많이 느끼게 됐어요. 2003년에 학습지 업계에서 현장투쟁이 많이 폭발했어요. 노동청 앞에서 1년 동안 매주 한 번씩 시위했어요.
학습지 교사들은 평균 근무기간이 8개월밖에 안 되기 때문에 연속성을 갖기가 어려워요. 자본을 상대로 한번 파업해 보는 게 투쟁의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 현장투쟁이 한 차례 끝난 후에도 조합원을 꾸준히 관리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다.


● 라디카  (네팔 출신 이주 노동자)

 

1992년에 한국에 올 때는 TV에서 본 것처럼 크고 깨끗하고 안전한 공장에서 일하게 될 줄 알았어요. 와 보니 우리가 일하는 공장은 매우 작고 대부분 지하에 있었어요. 네팔에서 대학 다니다 왔는데 여기 와서 아침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게 힘들게 일했는데 사장이 월급도 안 주고 도망갔어요.
공장에서 일하다 보면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일하는데 여자라고 차별해요. 우리는 이주 여성 노동자니까 차별이 더 심하죠. 한국 여성들에게는 생리 휴가도 있는데 우리는 그런 거 전혀 없어요. 한국 사람들이 일 끝나고 가도 우리는 남아서 일하고, 쉬는 날도 나와서 일했어요.
추석 때 사장이 또 우리에게만 일을 시켰어요. 저와 한 남성 이주노동자가 일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죠. 근데 그 공장은 제가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라인 전체가 멈추는 곳이어서 결국 사장은 다음부터 반드시 야간·휴일 근무를 하면 수당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처음에 동료들은 제 말을 믿지 않았는데, 진짜 돈이 나왔어요. 모두 깜짝 놀랐죠.
2003년 10월 정부가 이주노동자를 단속해 추방하겠다고 발표한 다음부터 농성을 시작해 1년 가까이 했어요. 농성 처음 할 때는 너무 추웠어요. 우리는 세수도 못하고, 샤워도 못하고 그렇게 지냈어요.
우리 권리를 찾아야 하니까 힘들어도 버텼어요. 앞으로도 이주노동자들 계속 올 테니까, 내가 이 활동하다 잡혀도 지금 자리를 만들면 그 사람들은 지금보다 잘 지낼 수 있잖아요.
작년에 처음으로 여성의 날 집회에 갔어요. 여성의 날은 여성들의 날, 여성들의 축제였어요. 이 집회에서 우리는 이주 여성들의 상황을 알릴 수 있었어요. 또 한국의 여러 여성 노동자들의 상태와 문제도 알게 됐어요.
여성과 남성은 똑같은 노동자이니 함께 싸워야 해요. 그래야 여성들의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성의 날에 한국 여성들과 이주 여성들이 함께 모일 거예요. 여기에 한국 남성 노동자들도 많은 관심 가져 줬으면 좋겠어요.

 

● 정금자 (서울대병원 간병인지부)

 

여성들이 많이 활동한다고 하지만 활동할 때 남녀 차별도 심하고 또 주부들이 일하는 일터가 너무 좁아요. 간병인 일터는 40·50·60대 여자 주부들이 마지막 갖는 일터인데, 급여가 너무 적어요. 최저임금도 안 돼요. 시급 1천6백60원, 8시간 일해서는 40~50만 원도 못 돼 이것으로 가정을 일굴 수 없으니까 자기 몸을 다 불태워서라도 24시간 일해야만 가정을 일굴 수 있어요.
여성들은 나약하다, 순종적이라는 얘기가 많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저는 지금 우리 여성 노동자들이 자랑스럽고 당당하다고 느껴요. 제 주변 우리 조합원들 80명이 다 여성이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걸 기쁨으로 해 내요.
2003년 8월 31일에 병원이 폐쇄된 뒤 다음 날 부터 투쟁을 시작했어요. 병원 현관 앞에서 단식 투쟁도 하고 2층 로비에서 철야 농성도 하다가 12월에 출입금지가처분을 당했어요. 우리는 12월 2일 인권위원회 점거농성을 했어요. 그 때 ‘다함께’랑 함께한 거 같아요.
2004년 2월에 노동청 점거 농성에 또 들어갔죠. 25일에 점거농성 들어갔다가 27일에 경찰력 투입으로 쫓겨났다가 4월 26일에 서울대병원 노조하고 (사측이) 교섭해서 이겼어요. 서울대병원처럼 온몸을 던져서 [비정규직 투쟁을] 하는 데가 없어요. 서울대병원 노조가 없으면 저희는 지탱 못해요. 우리는 특수고용직이라 노동 3권이 없어 교섭도 못해요.
간병인은 가장 힘없는 자들이었어요. 20년, 30년 직장에 다녀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전국에 20만 명이라는 거대한 숫자를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올려놓은 게 노동조합이에요. 노동조합은 이 땅의 가장 열악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조직이기 때문에 그에 동참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자랑스럽고 당당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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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에 맞서기 위해 50개 나라의 활동가들이 모이다

다함께 50 호

WTO에 맞서기 위해 50개 나라의 활동가들이 모이다  - 김어진 / 박준규

http://www.alltogether.or.kr/

 

WTO에 맞서기 위해 50개 나라의 활동가들이 모이다 - 김어진 / 박준규

 

2월 26∼27일에 홍콩시립대학교에서는 50개 나라에서 온 2백40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WTO에 맞서 싸우기 위한 국제회의를 열었다.

특히 아시아 활동가들이 많았다. 남반구초점, 주빌리사우스, 글로벌익스체인지 같은 NGO뿐 아니라 홍콩의 노동조합 활동가들, 인도네시아 우편노조, 대만 통신노조, 인도 노동조합 등 노동자 운동이 성장하고 있는 나라에서 온 활동가들이 눈에 띠었다.

한국에서는 전농, 다함께, 아래로부터 세계화, 한국노총의 활동가들이 참가했다.

홍콩 정부와 언론은 이 회의 때문에 상당히 긴장했다. 한 홍콩의 언론은 세계의 ‘테러리스트들’이 WTO를 무산시킬 계획을 하기 위해 모일 것이라고 보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제 여론을 의식한 탓인지 홍콩 정부는 이 회의의 대표단들을 만나고 싶다며 한발 물러섰다. 경찰청장은 현지 준비단체인 홍콩민중연합(HKPA)과 만날 의사가 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참가자들의 투쟁 의지와 사기는 매우 높았다. WTO “각료회담을 무산시키자”는 구호와 주장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홍콩민중연합의 아우롱은 홍콩 노동자들도 WTO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고 주장했다.

“더 많은 일자리가 중국으로 넘어갈 것이다. 홍콩 자본가들은 서비스·항공사·컴퓨터 산업 등을 중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필리핀의 아시아태평양리서치네트워크(APRN) 활동가 토니는 “WTO는 필리핀에서 광산업 사기업화를 부추기고 있다.”고 폭로했다.

WTO가 아시아의 농민을 죽이고 있다는 폭로도 많았다. “북반구뿐 아니라 남반구에서도 국가의 농업 보조금은 모조리 기업들한테 가고 있다.”


 

‘남반구초점’의 니콜라 블라드는 G20에 대한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WTO 협상 과정의 핵심국은 미국·호주·캐나다·브라질·인도 5개국이다. 그런데 브라질과 인도의 농업장관들은 농민의 이해가 아니라 농업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농산물 기업의 사장들이다.”

WTO에 맞서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홍콩내 필리핀 이주 노동자 단체 활동가는 “만리장성은 홍콩의 정규직 노동자들과 홍콩내 이주 노동자들 사이에 있지 않고 WTO와 전체 노동자들 사이에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참가자들은 WTO에 맞선 전략을 놓고 매우 다양한 입장을 지니고 있었지만, WTO에 맞서 공동의 동원 필요성에는 모두 공감했다. 

12월 13일 각료회담 개막일과 18일 폐막일에 대규모 집회와 행진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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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이라크 전쟁--1월 총선 이후 미국이 직면한 문제--Alex Callinicos

No 1939 Socialist Worker(영국) 2005년 2월 19일

전쟁과 점령

 

이라크 총선 이후

 미국이 당면한 문제들

이라크 여론에 대한 우리 지배자들의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앨릭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가 경고한다.


“마침내 수상이 이라크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있는가?” 월요일 아침 라디오 4(Radio Four)의 《투데이 프로그램 Today Programme》에서 제임스 노티(James Naughtie)가 이렇게 물었다.

  다우닝가(Downing Street) 10번지의 대언론 발표문은 이구동성으로 한결같이 “그렇다!”고 떠들고 있다.

  많은 기자들이 그 내용을 되풀이 말했다. 예를 들어, 제임스 블리츠(James Blitz)는 지난주에 《파이낸셜 타임스》에서 이렇게 썼다. “행운의 여신이 다시 수상에게 미소 짓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노동당이 잘못 할 수 있다고 의심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 지난달에 총선이 성공적으로 치러진 이후 이라크가 좀더 희망적인 곳으로--적어도 지금까지는-- 바뀐 것 같다.”

  백악관과 다우닝가가 총선을 이라크 점령의 성공 사례로 덧칠하려 한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사태를 더 잘 파악해야만 하는 다수 인사들, 예를 들어 좌익 철학자들인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 노먼 제라스(Norman Geras) 등이 총선을 민주주의의 승리라며 축하했다는 점이다. 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첫째로, 부시는 이 선거를 원하지 않았다. 그와 그가 임명한 전직 총독 폴 브레머(Paul Bremer)는 자신들이 임명한 의회가 정부를 선출하고 이라크 영구 헌법을 제정하기를 원했다.

  작년 1월에 이라크의 유력한 쉬아파 무슬림 성직자인 그랜드 아야톨라(Grand Ayatollah) 알리 알-시스타니(Ali al-Sistani)가 대중적 항의를 호소했고, 점령군은 선거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부시와 브레머는 어쩔 수 없이 선거를 허용했지만 최대한 일정을 연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라크 국민을 옥죄는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시와 블레어가 선택한 후보 이야드 알라위(Iyad Allawi)는 전체 투표수 가운데 14%밖에 얻지 못했다.

  시스타니가 지원하는 이라크통일연맹(United Iraqi Alliance; UIA)은 미국에 이라크 철수 일정을 제시하라는 선거 운동을 벌여 48.5%를 획득했다. UIA가 확보한 최대 규모의 단일 의석은 작년에 미국이 생사 불문하고 지명수배했던 급진 쉬아파 지도자 목타다 알-사드르(Moqtada al-Sadr)의 지지자들이다.

  월요일에 《워싱턴 포스트》는 이렇게 논평했다. “미국의 [이라크] 개입 사태에서 가장 커다란 아이러니 중의 하나는 이라크인들이 …… 투표장에 가서 강력한 종교적 기반을 가진 정부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웃 이슬람 공화국인 [이란과] 단단히 결연하고 있다. 이것은 행정부가 그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이라크 정책 속에서 결코 기대하지 않았던 수순이다. 미국 및 지역 전문가들의 말로는 그 비용이 3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더욱더 중요한 사실은 투표 참가자가 58%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영국에서라면 이 수치가 높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 자유 민주 정체의 기준에서 볼 때, 특히 진정한 선거권이 최근에야 쟁취된 나라들과 비교해 볼 때 이것은 낮은 수준이다.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종말을 고했을 때 투표 연령 인구의 85.5%가 선거에 참여했다.

  물론 이라크의 투표 참가율이 낮았던 까닭은 이 나라 중부 지방에서 대규모 선거 보이콧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라크 중부 지방은 무장 저항 세력이 가장 강력한 곳이다. 이 지역마저 투표에 참여했더라면 미국 앞잡이들의 득표수는 훨씬 더 떨어졌을 것이다.

  선거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마지막 요점은 민주주의가 자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인들이 이 선거를 바탕으로 자치를 허락받을 길은 전혀 없다.

  부시와 블레어는 점령이 계속될 것임을 명백히 했다. 부시는 선거가 끝난 다음에 “일정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미군은 최근에 이라크 주둔 미군의 수를 적어도 향후 2년 동안 현재와 같은 수준인 12만 명 선에서 유지할 계획임을 밝혔다.

  선거 결과 극단적으로 쪼개진 국회가 만들어졌다. UIA는 과반수를 장악하지 못할 것이며, 그 자체가 연합이다.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이라크의 진짜 지배자인 미국 대사 존 네그로폰테(John Negroponte)가 상당한 기동의 여지를 확보할 것이다. 그가 계속해서 백악관의 지령을 받게 될 이라크 내각을 만들고 조종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아흐메드 찰라비(Ahmed Chalabi)와 같은 구닥다리 인사가 수상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사태의 진행 추이를 파악할 수 있다.

  미국 신보수주의자들의 친구이자 사기꾼인 찰라비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된 허위 정보를 제공했지만 후에 미국과 사이가 벌어졌고 지금은 UIA의 지도자다.

  점령 정부는 미국식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는 정책 방침에 따라 이라크 사회를 재구조화하려고도 애쓰고 있다.

  2004년 4월에 브레머는 훈령 81조(Order 81)를 발표했다. 이라크 농부들이 수천 년간 자유롭게 종자를 재배하고 저장해 오던 관습을 초국적 기업들의 “지적 재산권”이라고 선언하며 금지한 것이다.

  부시와 블레어가 이런 정책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커다란 문제는 이라크 국민의 반발이다. 선거는 점령에 저항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열상도 드러내주었다.

  특히 쉬아파가 우세한 이라크 남부 지역에서는 다수가 선거를 점령을 종식하는 최선의 방책으로 이해했다. 대부분의 순니파 아랍족이 거주하는 이라크 중부에서는 절대적이라고까지는 못 해도 다수가 무장 저항 세력과의 연대감을 표명하는 가운데 선거 보이콧을 결정했다.

  점령 당국은 쉬아파 및 순니파 아랍족, 그리고 북부의 쿠르드족 사이의 분열을 조장해 왔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라크 정치를 파악하는 것은 오류다.

  예를 들어, 급진적 쉬아파 이슬람교를 신봉하며 선거에 참여했던 사드르 지지자들과, 저항 세력을 지지하며 선거를 보이콧했던 순니파 무슬림 학자들 연합(Sunni Association of Muslim Scholars) 사이의 접촉이 최근 며칠 사이에 있었다.

  어쨌든 점령에 저항하는 무장 투쟁이 줄었다는 징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럴까? 이라크인들이 투쟁하는 이유는 그들의 조국이 외국 점령하에 놓여 있고 선거가 이 상황을 바꾸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전 세계 반전 운동 세력의 어깨에 엄청난 책임을 부여한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 폴란드, [그리고 한국--옮긴이 추가] 같은 점령국들에서 특히 그렇다.

  투쟁을 끝내고 이라크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기회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은 점령을 끝장내고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해 부시와 블레어의 낯짝에서 느끼한 미소를 제거하기 위한 다음 방안은 3월 19일과 20일 점령에 반대하는 전 세계의 항의 행동을 대규모로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 앨릭스 캘리니코스는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책갈피 출판사에서 나온 《미국의 세계 제패 전략 The New Mandarins of American Power》도 그 중 한 권이다.


★ 政明爲 옮김/sumbol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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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개악안 저지하라

다함께 49 호

비정규직 개악안 저지하라 - 강철구

http://www.alltogether.or.kr/

 

비정규직 개악안 저지하라

   

2월 1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충돌 사건이 일어나자 사용자들과 그들의 정치인·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민주노총 죽이기에 발벗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거리의 폭력 단체와 다를 게 없다”고 민주노총 비정규 현장파들을 비난했다. 10만 명 이상의 이라크인들을 죽인 전쟁광 조지 W 부시를 지지하고 노동자 파업에 경찰력을 동원한 강경 대응을 주문하는 <조선일보>가 ‘폭력’ 운운하는 것은 역겨운 위선이다. 

열린우리당 의원 이목희는 민주노총 비정규 현장파들을 “국민 대중의 요구와 소망에 관심 없고 비정규직과 중소 영세 노동자들의 삶의 고통에 관심이 없”는 “과격 맹동주의자”로 비난했다.

그러나 기업주들과 그들의 이윤을 위해 비정규직을 더욱 확대시키고 정리해고 요건을 완화시키려는 노무현 정부와 한나라당·열린우리당 등 권력자들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의 요구와 소망에는 관심도 없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혈한들이다. 

기업주들은 이참에 노동운동의 전투성을 거세해 민주노총을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합리적 노동운동’으로 길들이려 한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언론매체들인 <조선일보>는 민주노총은 “노동철학과 운동노선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고 했고, <중앙일보>는 “자진해체까지 포함해 내부적인 자성을 해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유감이게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진상조사를 실시해 노동운동 내에 비민주적 요소를 뿌리뽑고 조직의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대의원대회에서 사회적 교섭안 강행 처리에 반발해 단상 점거 농성을 한 일부 활동가들을 민주노총의 건강성을 깨뜨린 ‘비민주적’ 세력인 것처럼 묘사했다. 

설상가상으로,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도 도덕성과 민주성을 저버렸다며 그 활동가들의 ‘폭력 행위’를 비난했다.

일부 활동가들이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한 행동이 설사 문제였다손 치더라도 그 문제의 발단은 주로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진하는 기업인들과 그들의 정부에 있고, 부차적으로는 상황이 바뀌지 않았는데도 비정규직 개악안에 맞서 대중 투쟁을 건설하는 데 힘을 쏟기보다 사회적 합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더 주력한 민주노총 이수호 지도부에 있다.

이 때문에 비정규직 개악안에 반대해 대중 투쟁을 건설하자는 좌파 활동가들은 강력히 반발했고 그 와중에 안타깝게도 대의원대회에서 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지난해 9월, 정부가 “비정규 개악(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노사정 대표자회의와 관련한 모든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지금 상황은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1월 31일 당정협의에서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이번 2월 임시국회에서 비정규직 개악안을 통과시키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도 민주노총 지도부가 사회적 교섭에 연연하는 것은 우려스럽다.

이수호 집행부는 투쟁과 교섭을 병행하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2월 비정규직 개악안을 막아 내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교섭안이 대의원대회에서 시급히 통과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노동조합이 정부와 사장을 상대로 사회적 교섭을 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부가 공격을 감행하려 하는 지금 상황에서 정부와의 협상에 연연한다면 정부에 맞서는 실질적 대중 투쟁을 조직하기 어렵다.

민주노총 대중 투쟁의 여파 속에서 열리는 것이 아닌 노사정위는 정부가 민주노총 지도부의 손발을 묶어 놓고 현장 노동자들을 손쉽게 공격하기 위한 덫이다.    

지금 같은 경제 위기의 시기에 사용자들은 좀체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 강력한 대중 투쟁, 특히 이윤에 타격을 가하는 대중 파업에 기반할 때만 교섭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 수 있고 실질적인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 

민주노총 이수봉 대변인은 2월 7일 인터넷 언론 매체 <프로메테우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미 2월 총파업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회적 교섭을 통해 법안 처리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설사 ‘2월 총파업’ 조직이 거의 불가능해진 듯하더라도 현장 조합원들에게 적극적으로 대중 투쟁의 필요성을 호소해서 투쟁을 이끄는 게 제대로 된 지도부의 임무이다. 대중 투쟁보다 사회적 교섭에 더 의존하는 것은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수봉 대변인은 열린우리당 환노위 간사인 이목희와 국무총리 이해찬이 “사회적 교섭안이 통과된다면 비정규직 법안 처리를 강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밝혔다. 국무총리 이해찬은 2월 3일 민주노동당 지도부를 만나 비정규직 법안을 일방적으로 처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환노위 소속 여당 의원은 “비정규직 법안이 3∼4월 임단협이 시작되기 전까지도 통과되지 않으면 많은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며 “파견법의 일부 내용을 수정해서라도 법안을 통과시킨다는 것이 환노위 입장”이라고 말했다.

노동부 장관 김대환은 2월 2일 기자간담회에서 “비정규법안을 놓고 다시 대화 채널을 가동할 생각이 있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벌써 2년 이상 논의를 했고 노사가 합의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여 그럴 계획은 없다”고 잘라 말하며 “국회 시계에 맞춰 처리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2월 11일 열린우리당 대변인 임종석도 “비정규직, 출자총액제한제 등 경제 현안과 관련된 법안의 우선 처리가 (이번 임시 국회에서) 첫번째 원칙”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정부의 ‘비정규직 보호법’안은 비정규직 보호는커녕 기존의 정규직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만드는 비정규직 확산법이다. 일본에서는 1999년 일부 업종을 제외하고 파견노동을 전면 허용한 뒤 69만 명이던 파견노동자 수가 2002년에는 2백13만 명으로 증가했다.

만약 정부의 비정규직법이 통과되면 정규직이 되겠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망은 산산조각날 것이다. 이미 8백16만 명이나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신규 일자리는 비정규직으로 채워질 것이고, 노동자들은 4대 보험도, 연월차도, 퇴직금도 없는 열악한 조건에서 저임금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어제의 정규직이 오늘의 비정규직이 되고 오늘의 비정규직이 내일의 실업자가 될 수 있는 불안정한 미래가 수백만 노동 대중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게 될 것이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2월 7일 담화문을 통해 이렇게 투쟁을 호소했다. “2월 임시국회에서 다뤄질 예정인 비정규 개악을 저지하기 위한 총파업을 지난 1월 21일 [대의원대회에서] 우리는 굳건히 결의한 바 있습니다. 어수선한 상황이라고 해서 우리 투쟁의 고삐를 늦출 수는 없습니다.”

현장 조합원들은 전체 노동자들의 미래를 위해 지도자의 이 말을 뒷받침하기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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