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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3)]..무거움과 가벼움..ㅎㅎ

  • 등록일
    2009/06/22 13:10
  • 수정일
    2009/06/22 13:10

작정하고 정리는 하는데 더워지는 만큼 귀찮아지는 듯...ㅎㅎ

읽는 재미는 솔솔했는데 막상 정리하려니 조금은 귀찮아지는....ㅎㅎ

아마 더위 탓이겠지...?....ㅎㅎ

 

2장. 개인성

-- "생각하는 자에게 이 세상은 한편의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게 이세상은 한편의 비극"...호레이스 월폴

 

--"수단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목적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확실성이다....게르하르드 슐츠

 

-- 새로운 상황에서 어려운 점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대부분의 인간의 삶이,

    돌아볼 것도 없이 자명한 목적들을 위한 수단을 찾아내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목표를 선택할지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보내게 될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대조적이게도, 가벼운 자본주의는 가치-강박적일 수밖에 없다.

    '구직란'에 나온 출처가 의심스러운 작은 광고 -- "차를 가져라, 그러면 여행할 수 있다."--는

    오늘날의 과학기술 연구기관들과 실험실의 총수들이 던지는 질문인

    "우리는 해결책을 찾았다. 그러니 이제 문제를 찾아보자"라는 말과 나란히,

    새롭게 등장한 삶의 문제점을 집약해주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행동을 지배하게 되면서

    "어떻게든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제일 잘하는 방법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왜소화시키고 밀어버렸다.

 

==> 무거운 자본주의, 무거운 근대를 대표하는 양식인 포드주의에 대하여 좀더 고민해 봐야겠다.

   여하튼 이제까지의 자본주의 혹은 근대의 삶이 포드주의라는 갇힌 구조와 연결된 사슬안에서

   강한 고리들을 형성하면서 자연스레 수단들에 집중된 삶의 방식이었다면

    가벼운 자본주의, 유동하는 근대는 결국 목적을 잃어버린세대...그럼으로써 목적들을 찾아가는데

   막대한 삶의 에너지들을 소비하도록 하는 사회인 것 같다.

   결국 이런 목적들을 상실함으로써 근대체제에 저당잡혀버리는 삶은 어떻게 탈주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집단적인 삶의 목적들을 상정할 수 있을까..?

 

-- 그들의 사적인 문제들,  그와 비슷한 내 자신의 문제들은 공적으로 토론하기에 적합하다.

    그렇다고 그 문제들이 공적 이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들은 정확히 사적이슈라는 테두리안에서 토론된다.

 

-- 공공의 의제에서 '사적이지 않은' 다른 모든 문제들을 밀어내는 것이다.

-- 과거에는 사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대중적, 공개적 표출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던 문제들이 공적 영역을 식민화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은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사이의 그 악명 높을 정도로 쉽게 이동하는 경계를

    단지 새롭게 재조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공적 영역을 사적 드라마가 상연되거나 공개적으로 전시되고

    관람되는 영역으로 재규정하는 문제이다.

    대중매체에 의해 유포되었지만 이제는 거의 모든 사회 영역에서 널리 용인되고 있는

    '공공의 이익'이라는 말의 현재 정의는 그러한 드라마를 공개석상에서 상연해야 할 의무와

    그 공연을 관람할 대중의 권리를 지시하고 있다.

--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잘못된 것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 때문이라는 것,

    자신들이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고

     자신들의 수단과 노력으로 뜯어고쳐야만 한다는 말을 매일 듣는다.

     따라서 이들이 어떻게 도구를 사용하고 노력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것이

     '사정을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가장--아마도 유일하게--쓸모 있게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해도

     그다지 놀라울 것이 못된다. 이들이 '사정을 아는'사람들한테 거듭 들은 말은,

     그들 각자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이렇게 가벼운 자본주의하에서의 개인성은 결국 사적인 영역의 공적영역에서의

        일방적인 소비인것 같다. 교류 혹은 공유가 아닌 개인적 사적 영역들의 소비...

        가장 끜직한 이런 상황들이 결국 공적영역의 결핍으로 나타나고

        이런 결핍이 더욱더 개인들을 고립/파편화 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사적 영역의 공적 영역의 침탈을 막는 방식은 무엇일까..?

        과거로...무거운 근대로...혹은 잘 짜여진 포드주의적 삶은 아닐테고

        그렇다면 구체적인 방식의 구현은 무엇일까...?

 

--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면 두가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쫓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로부터 달아나고 있는가...?

    소비....

    건강한 몸과 균형잡힌 몸

    쇼핑에 대한 고민들....

-- 오늘날 기준에 대한 복종을 얻어내는 것은 강제가 아닌, 유인과 꼬드김이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하나의 압력임을 드러내기보다는 마치 자유의지를 실천하는 것처럼 위장된다.

 

==> 결국 우리는 따로 떨어져 쇼핑한다....

 

요약 하자면 이렇다.

'쇼핑하고 다니는'식의 삶을 특징짓는 정체성의 이동성과 유연성은 해방의 도구가 아니고,

자유의 재분배이다.

때문에 이러한 삶은 절반의 축복이라 하겠다.

그것은 불쾌감이 들고 두려운 만큼이나 달콤하고 갈망의 대상이 되는,

그리고 가장 모순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축복이다.

이 축복은 앞뒤가 안 맞고 거의 신경증적인 반응을 낳게 되는, 지극히 모호한 가치이다.

소르본의 철학자 이브 미쇼의 표현대로

 "기회들이 과도해짐에 따라 파멸과 파편화, 해체의 위협이 점증하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찾는 과제는 첨예하게 분열적인 부작용을 낳는다.

이 과제가 갈등의 초점이 되고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충동들을 촉발한다.

모두가 이러한 과제를 떠맡게 되지만, 문제의 해결은 각 개인들이 대단히 다른 환경에서

제각기 구해야 하기 때문에,

이는 협력과 유대를 발생시키는 쪽으로 인간조건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인간의 처지들을 분할하고 흉포한 경쟁들을 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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