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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반겨주는 경주, 始林

대학 교지 후배 결혼식이 있어서 경주에 다녀왔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기차에서 잠을 안자고 내내 풍경을 봤다.
동대구에서 경주까지 통근열차를 타고 갔는데 맞은편 자리에 꼬맹이와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아이와 여자를 무심히 바라보다 서른 넘으면서 가졌던 이상한 슬픔이 왈칵 치솟았다.
'나는 아마 아이를 가지고 낳는 경험을 못해보겠지.'
내가 생각하는 가장 동물적인 경험은 섹스보다 임신을 하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이다. 그 원초적인 경험을 어쩌면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내 선택일지라도 많이 우울하고 슬퍼진다.
종족보존의 본능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니까..
<앞자리에 앉아있던 모자>
 
 
경주역에 내리니 '아, 그렇지 여기는 남쪽이야, 이 따뜻한 기운속에 25년을 보냈구나.' 훈풍에 감격하고 말았다.
서둘러 결혼식에 가서 후배를 만나고 교지후배들과 밥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이들이 학교에 가자고 했다.
결혼식에 온 후배들은 군대를 다녀왔고 4학년쯤 되니까 선배들을 잘 챙긴다. 마음을 헤아린다는 말이다. 감사하게도..
학교에는 고향집에 내려올 때 한번씩 들르곤 했지만 워낙 명절이 껴있으니까 교지사무실에 들어가본 일은 벌써 여러해가 지났다.
오랜만에 가본 사무실은 늘 그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제일 먼저 창가에 가서 동대교와 학교 앞에 펼쳐져 있는 풍광을 바라보았다. 나무들이 많이 자랐다. 세월이 그렇게 흐른 것이겠지.
서울에 있으면서도 가끔 그 창턱에 앉아 100원짜리 커피를 마시면서 바라보던 풍경을 떠올리곤 했다. 始林교지는 생각이상으로 내 맘에 확연한 어떤 기억인게 분명하다.
철제 캐비넷, 낡은 책상, 의자, 바닥에 날아다니던 먼지, 사람들이 오가며 피워대던 담배연기, 100원짜리 커피, 삐걱이며 열리고 닫히던 문...사람들 사람들...
<영종이가 찍어준 것!>
 
전에 만났을 때 잘 몰랐는데 군대 다녀오고 4학년이 된 영종이는 어느새 약간 능글능글한 아저씨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넘의 돼지 때문에 잘 움직이지 못하는 농촌총각 재영이도 본지 한참 되었고..(돼지고기값 올랐다고 하니 술한잔 사라고 해야겠다.)
결혼식 내내 영경이와 얘기를 못한게 영 맘에 걸리네..
1학년때 진짜 귀여웠던 00학번 우섭이는 늘 머리속에 교지 아이템으로 가득차 있는 열정적인 편집장이다.
후배들이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괜찮구나.
나이차이란 참 별거 아니다. 비슷하게 1,2학년때 얘기들 하고, 사는 얘기도 하고..그런 것이지. 그러면서 내 나이도 희미하게 저멀리 넘어갈 무렵...
 
갑자기 문이 열리며 오늘 결혼식한 후배와 비슷하게 생긴 한 꼬맹이가 들어왔다. 수습인 아이인데, 방년 19살이란다. 갑자기 나이가 내 온몸을 덮친다. 허걱...멀뚱멀뚱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후배님을 보면서 너무 귀여워서 미치는 줄 알았다. 아무리 우겨도 얼굴빛이 틀리긴 하더라..예쁘다.
모쪼록 고민하는 것들 잘 풀어가면서 좋은 책 만들고, 졸업들 하시길..
 
그리고 나는 석장에서 막걸리 딱 3잔 마시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어...진짜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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