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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와 약봉지

날씨가 좀 추워지던 날 고향에서 부모님이 감기예방 및 목에 좋은 즙을 다려서 한박스를 보냈다.

이 좁은 옥탑방에 애물단지만 같아서 전화로 엄마에게 이렇게 많이 보내면 내가 어떻게 감당하냐며 툴툴거렸다.

그리고 감기 걸린 사람들에게 몇봉지씩 건네면서 선심 쓰고 나서도 한박스 그대로인 그넘을 바라보면서 저걸 어쩐다냐하는 심정이었다.

내맘은 그러니까 엄마가 신경써서 보냈는데 다 못 먹고 버릴까봐 그게 더 안타깝고 괜히 좋은 일하고 자식들한테 잔소리 들을 걸 뻔히 알면서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이 짜증스러웠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나는 보기 좋게 심한 목감기에 걸렸다. 

마치 엄마가 5시간도 넘게 떨어져 있는 곳에서 여기 서울을 훤히 들여다 보는 듯 미리 약을 보낸 것 같이 되버린 것이다.

하루에 한두번씩 전화를 걸어보는 우리 엄마와 아버지는 거보란 듯이 의기양양해하셨고, 나는 아휴 너무너무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할 밖에..

덕분에 양약을 거의 안먹고 감기가 나아간다. 오늘은 몸살기운이 있어서 이런저런 일정을 뒤로 하고 집에서 쉬었다. 그리고 엄마가 보낸 그 달짝지근한 즙을 따뜻하게 덥혀서 먹고...

 

사랑해 말순씨를 봤다. 애잔한 휴머니즘, 지나간 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내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시절, 효자동 이발사...이런 류들...약간 몸이 근질거리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는 보고나서도 의도가 미심쩍어서 보긴 봐도 삐딱해지기 쉽상이다.

그런데 나는 극장에 앉아서 바보처럼 잉잉 울었다. 엄마 생각이 나서...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서른살도 더 먹은 여자가 혼자 극장에 영화보러 와서는 질질 짜고는 결국 눈이 퉁퉁 부어서 극장문을 나섰으니..

 

어릴 때 엄마의 모습.

긴머리를 틀어올리고 립스틱을 살짝 밀어올리면 풍기던 그 야릇한 화장품 냄새와 바바리 코트를 묶고 나설때의 엄마는 얼마나 예뻤던지..

그러던 어느날 대구 외가에 다녀오던 날 짧게 짜르고 파마를 하고 나타나서 우리는 거의 패닉 상태가 되었다. 아버지는 사흘동안 엄마와 대화를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집안 일이 많은 당신에게는 긴 생머리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웠겠나. 그렇지만 그것은 나에게 판타지였고 로망이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들을 감싸는 엄마의 작은 태도조차 용서하지 못한 채 세월은 흘러갔다.

그사이에 병을 얻은 엄마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여전히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내모습과 아픈 엄마의 모습이 영화에 겹쳐져서 자꾸만 울음이...

 

실패한 수험생이 혼자 울고 있던 어느밤 더큰 울음으로 안아주던 엄마의 품을 마지막으로 떠나버린 잘난 이 딸은 혼자 어른이 된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늘 대화가 잘 통했던 아버지가 자신을 다 키운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알고 있다. 애써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이 있음을.

책을 사서 안겨준 사람은 아버지였지만 읽어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는 것을...

아름다운 음악, 좋은 영화가 있음을 알려준 사람도 어머니였다는 것을..

(나의 아이디인 젤소미나도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영화 길에서 따온 것이다. 엄마는 항상 영화 길을 젤소미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딸로 커야하는 아픔을 안겨준 사람도 어머니였고...

혼자 많이 울게 만든 것도 어머니인데..

나는 어느 순간에 딸로 살아가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까.

진정으로 어머니와 화해할 수 있을까..

내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남자아이들이 화장한 엄마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과 다르게 곱게 화장하는 모습을 판타지로 간직하면서 자란 여자아이들의 다른 기억이 떠올라 이런저런 생각이 참 많았다. 판타지..여성에 대한 판타지..엄마에 대한 판타지..그렇지만 한편 내 기억속에도 남아있는 판타지란 말이지...거참...

그래도 적어도 사라져가는 아버지에 대한 가부장에 대한 추억을 붙들고 늘어지는 영화보다 백백천배 낫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을 위해 내 삶의 일분 일초도 희생하지 않을 딸이지만  엄마에게 전화 한통화 따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앗! 영화가 의도한 것이 혹시 이것이었나.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것!

오..무서운 걸...

또 깜깜해진 창을 보면서 달짝지근한 다린 약봉지를 뎁히고 있는 중이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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