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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사랑을 노래하라!!


김혜린, 그녀의 처음을 만나다
유제니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해서 올렸는 걸 봤다면 알겠지만, 김혜린 만화에 대한 사랑은 특별하다. 김혜린의 만화 목록에서 내가 빠트린 것은 동호회지에 실린 작품들 정도. 다만 그의 대표작을 늦게 봤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면, 순순히 인정할 수 밖에.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 만화방이 동네에서 없어져서 다시 만화를 보기 시작했던 중 3때에는 이미 순정만화 월간지들이 활발히 발간되고 있었을 무렵이다.
이미 김혜린은 민중의 지도자보다 혁명에 참가했던 사람들에 눈을 돌렸고, 잡초 같지만 질긴 여성의 삶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테르미도르'와 '불의 검'이 바로 그 만화이다.
'북해의 별'이 아무리 대표작이라도 그의 초기작이니, 엉성한 그림과 지나치게 긴 팔,다리,손가락이 썩~ 보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당시 대본소용 만화였다. 얇고 연습장 같은 종이에 인쇄되어 있는)
자하랑과 설리의 사랑과 정치에 대한 만화, '비천무'와의 운명적인 만남과 한 고뇌하는 청년 시인과 그를 사랑하는 기자의 얘기인 '겨울새 깃털하나'를 밤새워 읽고 읽고, 또 읽어대던 어느날이었다.
'북해의 별'을 봐야겠다, 김혜린의 처녀작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한달음에 만화방에 달려갔다. 그가 만화속의 만들어 놓은 세상은 꿈같았다.

20년이 다되어 가는 어느날, 다시 보다
이번 달 내내, 신간도 흐지부지하고 볼만한 책들이 안나오고 있어서, 우울해졌다.
박선영 열사 평전에 보면 80년 대학가에서 텍스트로 할만큼 인기가 높았던 '북해의 별'이 다시 생각이 났다. 주변의 선배들도 실제로 그랬다고 했으니까. 돌아보면 대학 다닐때에도 북해의 별에 대한 얘기들은 실제로 봤던 안봤던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 보니 유리핀과 그의 혁명의 동지들이 일궈가는 세상이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그러한 세상이 오면 혁명의 지도자는 어떠할까에 대한 물음을 이미 초반에 김혜린은 던져둔다.
나는 81학번인 김혜린이 학교를 중단하고 만화의 길을 가면서도, 한국 현대사의 무시무시한 독재자와 군사정권에 대한 혐오감이 이 질문을 던지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설프고 덜 여물고, 방향이 정확하게 잡히진 않았지만 작가의 진지한 질문이 이 만화를 끝까지 끌고가게 한 힘이다.

유리핀 멤피스, 주변의 동지들
그의 지도력을 확고히 하는 너무나 멋진 캐릭터들.
집시, 혹은 히피와 같은 자유를 노래하는 혁명가수, 냉철한 언론가, 철학자, 금융을 거머쥐고 있는 부상, 그를 위해서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오른팔격인 무사.
무엇보다 공주의 신분을 박차고, 평민으로 계급이동을 한 유리핀의 영원한 연인 금발의 미모, 에델라이드.
그들은 다시 보드니아로 돌아와서 무너진 야학과 조직을 재건하기 시작한다. 몰래 신문을 찍고. 이장면은 마치 80년대 야학을 중심으로 노동자를 조직했던 우리의 모습과 흡사해서 웃음까지 나올 정도이다.

본적도 없는, 믿을 수도 없는 지도자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오면 그(지도자인)는 무엇을 선택할까?'
비극으로 끝낼 수 없을 만큼 젊었던 김혜린은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뒷언저리에서 평범한 한 민중으로 살아가는 것. 군사를 일으켜 국민의 뜻을 거슬려 가며 정권을 세웠던 그들이 한번도 지키지 못한 약속이다.
유리핀이 군인이면서 지도자가 되는데에는 어느정도 모순이 있다면 있다.
내 어린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어른들을 믿을 수 없으며, 존경할만한 위대한 인물은 우리 현대사에서 만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던 군인들과 군인의 우두머리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 그가 아무리 훌륭한 성품과 지도력을 갖고 있고, 정치적인 능력을 있다해도 정치일선에서 군인이 나서는 것을 절대로 반대한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해방이후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너무 잘 알려주지 않았던가.
당시 미스터 블랙같은 황미나 만화에서 보여주는 시련을 만나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서 복수를 하는 류의 만화들이 인기였는데, 이것 역시 '몽테크리스토퍼 백작'라는 외국 문학의 영향이었다고 본다.

그래도 그 젊은 글을 옹호하고 싶다네
그런 시대의 분위기와 한편으로는 그당시의 정권에 대한 작가의 나름대로의 비판이 아니었을까 싶다. 83년, 이미 20년이 다되어가는 이 작품이 김혜린의 처녀작이었으며 암울한 시대 젊은이들의 숨통을 튀어주었을 만큼 간절한 바램이 담겨 있었음을 기억하고 싶다.
테르미도르의 혁명시인 세자르가 프랑스 혁명의 지도부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을 썼다는 혐의로 몰리고 있을 무렵 유제니에게 절규하듯 말한다.

"시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을 줄도 모르는 것들이. 나는 남프랑스의 뜨거운 햇빛을 난 몰라. 난 그렇게 젊은 글을 쓸 수가 없어. 열정이 있는 젊은 작가의 목숨을 없애서 어쩌겠다고?"

아마 김혜린도 이제 '북해의 별'과 같은 젊은 만화를 그리지 못할 것이다. 대신 성숙해진 눈으로 바라보는 여성성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하고, 한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더욱더 세밀하게 그려낼 것이며, 이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하나하나가 영웅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그의 만화속에서 살아가게 할 것이다.
내게 좋아하는 만화가를 꼽아보라면 시시때때로 조금씩 바뀌기는 하지만 그이름에 김혜린이 빠져 본적이 없다. 만화가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다. 특히 순정만화에 대한 인식의 부족은 점점더 그림을 계속 그려야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던지게 하는 현실이다. 실제로 팬을 꺾는 작가들도 나오고 있다. 그래도 늘 꾸준한 애정을 보내고 있는 이 팬의 마음을 알아서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그리길 바랐으면 한다.
(아, 그리고 절판된 김혜린의 작품을 살 수 있도록 재간되는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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