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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예총 일일문화정책동향]
노동자문화의 활성화를 위한 방안
기획연재 > 주 40시간 사업장 노동자의 여가는?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이 단축되면서 노동자의 여가시간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이 늘어난 여가시간을 그들의 문화를 실천하는 것이 아닌 ‘자본의 논리가 더욱 확대된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소비만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에 일일문화정책동향에서는 이번 기획을 통해 현재 한국 노동자 문화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모든 노동자들의 문화적 동질화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탐색하여,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노동자의 삶으로서 문화, 일상 문화를 만들기 위한 정책방향과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 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 총론
② 현장체험수기 Ⅰ
③ 현장체험기 Ⅱ
④ 노동자문화의 방향과 대안
[주40시간 사업장 노동자의 여가는?-① 총론]
이성철 _ 창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sclee@changwon.ac.kr
‘현대해상’으로 가버린 ‘그날이 오면’
문화에 대한 정의는 문화를 말하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므로 문화 개념은 ‘정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즉 문화에 대한 정의는 개인 또는 집단(계급)의 정체성이 투영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을 지녀야 할 노동자문화의 현재 상태는 어떠한가? 1970년대 이후 탈춤 등을 비롯한 민중문화운동을 시작으로 1980년대의 마당굿, 마당극, 노가바, 그리고 노동문학, 노동극 등 다양한 노동자문화운동들이 폭발적으로 고양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많은 이들이 문화의 시대라고 일컫는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오히려 노동진영의 문화적 실천은 그 양적 비중과 질적 내용에 있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문화운동이 노동운동의 성장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우리 사회의 지배 집단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관점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시종일관 철저히 관철시키고 있다. 첫째, 생산 내의 정치를 매우 효과적으로 생산의 정치로 확대ㆍ재생산한다. 둘째, 노동과 여가, 생산과 소비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현 국면의 이데올로기적 블록을 견고히 구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노동진영의 대응은 어떠하였는가? 탈춤은 ‘박카스’ 광고로, 사물놀이는 제도화된 연행으로, ‘천리길’은 ‘SK 엔크린’으로, 그리고 ‘그날이 오면’은 ‘현대해상’으로 가버렸지 않은가?
노동자의 문화적실천은 자본의 문화전략에 대한 동의·저항 등을 포함한 관계적 개념
현 시기 우리나라 노동자문화의 성격들에 대한 고민들은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민중문화 또는 노동자문화의 내용을 과거 시제로만 회고할 것인지, 아니면 그 시절의 부활을 단순히 희망하고만 있을 것인지의 문제를 넘어서서,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상황에서 노동자문화의 실천적인 전략들을 어떻게 제시해야 하는지가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실천은 경제적인 재화에 대한 단순한 소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문화정책 및 자본의 문화전략과 그 산물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수용과 배척, 동의와 저항 등을 아우르는 관계적인 개념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적 관점이 문화실천의 영역에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노동운동의 문화화나 문화적 노동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를 생활양식의 총체라고 단순하게 정의하더라도, 노동운동을 통한 계급적 전망의 확대는 노동자문화의 형식과 내용을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별 노조주의 관행에서 벗어나 지역문제에 대한 관심과 내부문화 교정노력 있어야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실천이 보다 근본적이면서도 그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기업별 노조주의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의 기업별 노조주의의 관행이란 단지 노동조합의 조직형태나 경제주의적 운동방식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동안의 노동운동에 잠재해 있을 수 있는 단위 기업이나 단위 노조 중심의 운동관행이나 의식, 그리고 가치관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작업장 바깥의 지역문제에의 개입과 관심,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및 정치적ㆍ사회적 개혁 투쟁으로서의 운동의 외연과 내포의 확장은 계급적 문화실천의 내용을 희석시키거나 운동의 중심성을 훼손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계급적 헤게모니를 더욱 공고히 다지는 것이 된다.
끝으로 노동자계급의 문화적 실천전략을 고민함에 있어, 노동자계급이 처한 현실의 상황으로부터 곧장 당위적인 대안들을 제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점을 낳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문화가 지녀야 할 건강성과 연대성, 그리고 실천성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 못지않게 노동자들이 현실적으로 안고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적 내용들(가부장적 권위주의, 지나친 혈연 및 학연주의, 화투 문화, 자기 문화에 대한 과소평가 등)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교정의 노력들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40시간 사업장 노동자의 여가는? - ② 현장체험기 Ⅰ]
'투쟁'역시 노동문화의 소중한 결과
지민주 _ 노동가요 가수 jiminjoo@hanmail.net
나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다. 그 중에서도 노동가요를 부른다. 노래를 통해 그들의 삶 속에 뛰어 들어가 부대끼며 살고 있다.
이렇게 노래를 한지도 벌써 10년을 훌쩍 넘다보니 처음 현장에서 만난 숫기 없는 노동자가 이제는 중견의 노조간부가 되어 악수를 청한다.
바다 같은 세월은 아니더라도 강산이 한번 변한다는 시간동안 그렇게 현장에서 버티고 단련되는 모습을 보면 고마운 마음이 먼저 든다.
처음 그 동지를 만났을 때는 노동가요를 처음 접하고 자신의 이야기라며 상기된 모습인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러나 세월 속에서 그 상기된 얼굴은 집회니까 조합원들이 아는 노래를 두어 곡 부탁한다고 얘기를 한다. 왠지 씁쓸한 마음이다. 조합원이 아는 노동가요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의 투쟁가로 집회는 진행되어지고 있었다.
투쟁을 얘기하고 투쟁을 선동하고 투쟁을 도모하는, 바로 그 자리에 어울릴만한 곡들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투쟁가를 부른다고 투쟁의 마음이 고취되는지는 알 수 없다. 객관적으로 그랬던 시절이 있긴 하였지만...글쎄...지금은 그렇다라고 단정 짓기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어차피 그 시대의 음악이나 예술은 사회현상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함께 배고프고 분노하던 시절에는 그것을 떨쳐내고자 하나로 뭉쳐 싸우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변화된 노동자들의 조건(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간의 이질감, 노동자 여가생활의 활성화와 그 혜택으로부터 배제된 노동자들, 단사조합주의에 매몰된 관료적 노조운동 등)들은 더 더욱 노동자간의 일치된 단결을 막고 있다.
노동자의 문화란 무엇일까? 단지 그런 여가생활을 풍족히 하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정도의 경제력인가?.. 아니면 10만원쯤 되는 오페라표를 선뜻 끊을 수 있는 여유로움일까?.. 아니면 집회장에서 투쟁가를 힘차게 부르고 정렬된 자리에서 빨간 조끼에 머리띠를 묶은 우리의 모습일까?....
그것으로 노동문화를 경험했다고 얘기한다면 정말 좁고도 얕은 경험의 한계일게다!
어차피 살아가는 각각의 모습이라면......
노동자라는 이름에서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로 착취라는 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건 여러 제도권과의 싸움이 될 것이다.
‘그것이 노동자의 운명이다.’
물론 싸우는 것만이 그들의 문화라고 할 수는 없으나.. 현 시기 노동자의 문화를 보자면 어영부영 자본에 그리고 노동에 양다리 걸치는 식은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부처로 보이고 온화한 로맨티스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아직도 낭만이 있는 살만한 곳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노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온갖 비리가 가득해도 권력만 있으면, 돈만 있으면 죄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세상! 근로기준법이 있어도 혜택을 받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한, 불법해고를 당해도 어디 하나 내편 들어주지 않는 세상이라면 과연 노동자인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떤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하는가?
우리가 착목해야 될 노동자의 문화는 여기에 있다.
조금 더 나아진 연봉으로 어떤 차를 끌고 어디를 여행갈 수 있느냐가 아니다.
차이가 있어도 차별이란 말은 아니다. 노동자면 노동자인 것이다.
여러 매체들과 사회적 상황들 때문에 노동자라는 말속에는 붉은 머리띠의 긴장된 얼굴을 떠올리게 되지만. ‘투쟁’ 역시 노동문화의 소중한 결과이다.
우리는 노동자이기도 하지만 한 가족의 가장일 수도 있고 사랑스런 딸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하나 하나 고립된 채 해일처럼 몰려드는 자본주의의 문화들, 자본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어 놓은 많은 시스템 속에서 혼자로는 너무 벅찬 싸움이다.
우리는 그것을 지금까지 노동자들의 역사를 보면서 배워왔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역사가 그랬고, 그 이후 많은 역사들이 그것들을 증명하고 있다.
싸워서 이기기도 하고 때론 밀리면서도 조금씩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알았고 동지를 알아가는 시간들이었다.
그 속에서 함께 울고 웃던 노동자의 노래는 다 어디로 숨어버렸나?
함께 거리를 뛰며 외쳤던 우리의 구호들은 어디로 숨어버렸는가?
한 개씩은 가지고 있음직한 노동가요 테잎은 책꽃이 어느 한켠에 아니면 자가용 앞 수납칸에 먼지가 쌓인 채 뒹구는 건 아닐까 ?
마치 우리가 얘기하는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의 무용담처럼 잊혀지기 전에 안주삼아 조금씩 조금씩 내보이는 것에 뿌듯해 하는 건 아닌지..
각자의 단사안에 갇혀서 자신의 이기적인 구호 때문에 힘들어하는 다른 노동자들의 모습은 혹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고 실천해 보아야한다
노동자의 문화! 주 5일제를 맞이하는 시기의 노동자의 문화,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시대의 노동자의 문화..멀리 볼 것도 없다.
조금씩 던져주는 미끼를 먹고 있으면 언젠가 노동자의 문화가 아닌 노예의 문화만이 우리 앞에 와 있을 테니 말이다.
더 늦기 전에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우리 스스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인공임을 자각하여야 한다. 어차피 누가 대신 살아주지도 않는 세상이라면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권리를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주40시간 사업장 노동자의 여가는? - ③ 현장체험기 Ⅱ]
최기수 _ 인천지역 문화실천단 gulipae@hanmail.net
며칠 전, “비정규직 철폐, 생존권 사수, 8시간 노동문화 쟁취”를 기조로 했던 올해의 마지막 거리공연이 끝났다. 여느 해보다는 좀 짧다 싶은 10회로 거리공연을 마무리하다 보니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년에 좀 더 나은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휴지기를 가진다는 생각으로 아쉬운 마음을 접기로 했다.
위에서도 확인이 되겠지만, 필자가 일하고 있는 단체는 지역 순회 거리공연을 통해 노동, 정치, 사회, 인권 등의 문제를 대중들과 직접 소통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IMF 사태이후 수많은 노동자들이 정든 일터로부터 쫓겨나 노숙자로 전락해 빈곤에 허덕이던 1998년, 지역의 노동문화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리라’라는 주제 아래 시작하였으니 대략 7년의 시간이 흘러온 셈이다. 그 기간동안 분명 나아진 것도 있지만,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이 오히려 악화만 되어가는 것도 있었다. 여기서 필자는 몇 년간 거리공연의 경험을 통해 얻은 노동자 문화의 위기와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거리공연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 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거리공연, 그 시작의 소중함
1998년, 주요 언론들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래 가장 큰 국가적 위기”라고 떠들어대던 IMF 경제 위기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현장에서 거리로 강제로 퇴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재벌들의 끊임없는 사세 확장 욕망과 전 세계적 투기자본의 농간 그리고 이에 대한 정부의 방관이 야기한, 그래서 명확히 자본가와 정치인들의 책임이랄 수 있는 경제위기를 이들은 4대 주요 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실제 주요 내용은 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해고)이라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이식하는 명분으로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전국 곳곳의 역사와 광장에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 노숙자로 전락한 노동자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고, 현장의 분위기는 언제 어떻게 잘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삭막해져만 갔다.
이렇게 엄혹한 상황에서 어떻게 보면 거리공연의 시작은 필연적이었다. 대중들의 바쁜 걸음과 삶의 소통들이 이어지는 곳, 사회변혁의 욕망이 꿈틀되었던 곳, 그러나 지금은 자본주의 체제에 희생된 노동자들에게 마지막 안식처를 제공하는 곳...... 거리공연은 노숙자로 전락한 노동자와 함께 ‘노동자였기에 현실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노동자이기에 현실속에서 당당히 요구하며 대중적인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목표로 시작되었다. 해고로 인한 빈곤과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 가득 차있던 거리를 다시금 희망을 만들어내기 위한 투쟁의 공간으로 바꾸어냈던 것이다. 이렇듯 처음 시도된 거리공연은 지역적 차원에서 당시 자본가와 정부로부터 철저하게 공격당하던 노동자들을 결집하고 새로운 투쟁의 전선을 만들어내는 데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노동현장의 변화, 노동자 문화의 위기
자본가와 정부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던 노동자들에게 다가오는 2000년대는 뭔가 새로운 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확인되지 않는 희망을 주는 듯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IMF로부터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학습을 받은 자본가와 정부는 나아진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한 번 현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에게 전과 동일한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비정규직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노동자군이 현장에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이후 정규직에 대한 정리해고가 대대적으로 단행되기 시작하면서 노동현장의 분위기는 다시 급격히 냉랭해져만 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빈곤한 삶의 지속을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고용의 불안정을 부채질한 이 같은 시도는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며, 주체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여유를 빼앗아 가버렸다. 그나마 어렵사리 유지되던 현장 문화패들의 활동은 당장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생존의 위협과 고용의 불안으로 하나, 둘씩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노동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며, 노동의 과정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과 정서를 함양하던 노동자 계급만의 고유함이 희미해져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만의 문화라 할 수 있는, 노동자의 정체성과 정서가 물씬 배여 있는 문화가 싹틀 수는 없다.
이와 같은 고용과 생존에 대한 불안감은 점차 노동자들을 투쟁의 역사를 통해 성립된 공동체로부터 분리해내 개인으로 존재하게 만들었고, 그 사이엔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노동자에 대한 분열책동과 노동자들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욕구를 개별적인 문화상품 소비로 충족시키기 위한 문화산업이 위치했다. 말 그대로 자본에 의해 기획된 체제지향적이며 소비지향적인 상품문화가 노골적인 표현으로 노동자를 교란시켜 역사적으로 쌓아왔던 노동자 문화의 고유한 성격인 연대성과 건강성, 창조성과 민주성, 투쟁성 등을 말살시킴으로써 노동자 문화의 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거리공연의 위축
위와 같은 노동현장의 변화와 노동자 문화의 위기는 노동자와 함께 하기 위해 기획되고 진행된 거리공연의 기조와 형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초기 ‘구조조정 철회와 정리해고 반대, 김대중 정권 퇴진’은 올해 ‘비정규직 철폐, 생존권 사수, 8시간 노동문화 쟁취’라는 좀 더 절박한 요구로 변화되었고, 노조 문화국·문화패·문화단체 활동가들이 공동으로 기획하고 공연했던 방식은 상당히 협소화되었다.
또한, 거리공연을 통해 노동자와 함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야기되는 수많은 삶의 문제들을 대중들과 소통함으로써 급격하게 확장되는 자본에 대한 경계와 반대를 이끌어내겠다는 목표는 문화산업을 이용한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로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이 상태에서 머물 수만은 없다. 작은 실천은 작은 변화를 만들고, 작은 변화는 다른 실천들을 만들어내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형성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워왔다. 그렇기에 더욱 문화적 실천을 통한 변화의 희망을 놓을 수가 없다.
거리공연을 통한 노동자 문화의 일상화를 도모하자
그렇다면, 희망의 씨앗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답은 어렵지만 바로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 주 5일제가 되었든, 8시간 노동문화가 되었든 가장 첫 번째는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여가를 자본이 만들어낸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데 그침으로써 또 다른 착취 구조에 빠지는 것에 대한 경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문화활동가를 비롯한 노동운동진영이 머리를 맞대고 노동자들의 문화욕구를 정확하게 분석해 그에 걸맞는 프로그램과 공간 등의 제반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두 번째는 거리공연의 양식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이슈 중심의 공연에서 벗어나 노동자의 일상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문제들에 대해 과감하게 접근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다양하게 체득한 문화적 표현들을 할 수 있는 살아있는 체험의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에 더 욕심을 붙이자면 장기적으로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공연을 기획하고, 다양한 공간과 영역에서 문화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문화적 제도들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상품의 생산과 소비를 위한 경제요소나 착취의 대상으로만 존재해왔던 노동자도 고유한 인권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정치, 경제, 사회 등 사회 총체적인 권력관계에도 반영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 40시간 사업장 노동자의 여가는? ④]
노동자문화의 방향과 대안
이은진 _ 노동문화활동가 / (사)디지털노동문화복지센터 상임이사 mayjini@freechal.com
아직은 일부에서 시행되면서 노동자 내부의 차별화와 착취구조로 악용되는 경향이 있어 여전히 문제가 많이 남아있음에도 올 7월부터 시행된 주5일제가 노동문화에서 화두로 제기되는 것은 시행사업장을 중심으로 늘어난 여가시간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늘어난 여가에 대한 대안을 찾는 것이 노동자 문화를 올바로 세우는 해결책일까? 몇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 노동자문화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갈 것이지 같이 고민해 보고자 한다.
주 5일제의 이면
몇 년전에 주40시간이 먼저 시행되었던 전문직종인 D사업장과 제조업인 C사업장을 사례를 통해 노동자들의 일상을 고찰한 적이 있는데, 미혼인 남성노동자들의 경우 매일 잔업과 주말의 특근을 신청한다고 했다. 특별히 주말에 쉬어봐야 할 일도 없고하니 돈이나 벌자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잔업, 특근을 열심히 하는 입사 3년차인 노동자와 잔업, 특근을 하지 않는 16년차 노동자의 임금에서 잔업, 특근을 하는 경우의 급여가 훨씬 많은 경우가 발생하고 월급날이 되면 화장실에 가서 월급명세를 확인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 중년인 남성노동자의 경우도 가족들과 같이 주말에 하는 일은 패스트 푸드 점에서 아이들과 외식을 하거나 가끔 놀이공원에 가는 일이 전부라고 한다. 잔업, 특근을 하지 않으려 해도 생활이 쪼들리기도 하거니와 한 아파트에 사는 다른 아이들이 누구네 아빠는 월급을 많이 받았다더라, 누구네 아빠는 뭘 사줬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되면서 투정을 듣게 되니 어쩔 수 없이 잔업이나 특근을 하게 된다고 했다.
사무직의 경우도 사정이 다르진 않은데, 상대적으로 임금이 많기 때문에 무리하게 잔업이나 특근을 신청하지는 않지만 업무 성격상 노동시간이 늘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때 자기계발에 투자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기개발이라는 게 대체로 자신의 노동력에 부가가치를 올리기 위한 자격증 취득, 영어공부 등이었다.
결국은 자본을 살찌우고, 자본이 원하는 인간형이 되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이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여가활용, 혹은 노동시간 단축 이후의 꿈인 것이다. 물론 5년 전 이야기이고 또 일부 사업장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지금도 노동자들의 여가로 접근을 하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의 여가생활을 위한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일상 - 여가 혹은 나머지?
그러나 이러한 여가를 메꿀만한 의미있는 놀꺼리를 제시한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그것을 향유하고, 자신의 문화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93년 일상이라는 화두가 문예운동내에 제기될 때의 일상은 투쟁의 현장이 아닌 나머지 시간이었다. 파업이나 집회 현장에서 노동자문예를 접하는 데에 한계를 느꼈고, 또 예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동문예를 접할 시공간이 줄어들면서 노동문예단체들은 소극장으로, 거리로 자신의 활동 공간을 확장시켜갔고, 현장에서는 노동자이지만 현장 밖으로 나가면 일반 대중과 별반 다름이 없기에 창작물을 소통함에 있어서도 제도권의 유통구조를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확장된 노동자의 범주로 연령, 의식, 사업장 등이 다양해 졌고, 그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다양한 창작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작업장이나 집회 공간 외에서의 문화향유 방식과 삶의 방식은 자본의 것과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경쟁력을 키우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상업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한 편으로 비슷한 맥락의 고민 속에서 창작물 역시 기존 대중예술이나 고급예술의 형식이나 언어를 적극 받아들이는 경향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노동자 문화를 문예의 내용이나 창작주체의 문제로만 인식해서는 노동조합의 문화에 대한 도구주의적인 인식만 키워줄 뿐이었다. 노동조합 체계는 건강한 노동문예창작물을 보급하고 다양하고 새로운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시도를 더 이상 하지 않고 기존과 같은 유통구조의 역할도 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총체적인 삶을 바꾸어 가는 역할을 하도록 접할 수 있는 시공간과 유통구조가 무너졌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판단일 것이다.
다시 일상투쟁을 고민한다.
다시 96년 즈음 노동자문화운동 진영에서 “문예에서 문화로!”라는 기치로 그간의 문예중심의 노동자문화운동을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삶의 총체로서 바라보며 그에 따른 문화운동 진영의 대응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2000년에 들어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 라는 문화운동 내부의 과제를 이끌어 냈다. 앞서 말한 대로 늘어난 여가시간을 때워줄 대안으로 노동자문화의 프로그램 못지않게 우리들 몸과 생각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하나씩 쳐내고 노동자의 관점에서 올바른 가족관계나 일상생활을 재규정하고 실천방침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우고 확산시켜 가고자 함이다.
이에 대해 일상이라는 측면을 작업장과 분리된 나머지, 여가로만 바라보는 이들은 일상이 아니라 현장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삶의 전 영역에 들어와 우리의 의식과 습성까지 장악하고 있는 자본과의 투쟁으로 바라본다면 전 삶의 영역에서 자본과 맞서 싸우고 대안을 만들어가는 노력들이 필요하며 일상의 영역 역시 주체적인 투쟁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일상 투쟁의 과정을 통해 보다 내 안의 건강한 욕구를 끌어내고 삶의 주체로서 주변과 관계를 맺어가는 그런 삶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노동자문화가 노동자의 삶을 담은 예술을 창작하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적인 수용과 참여를 통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 할 때 삶의 총체로서 문화를 바라보지 않고서는 노동자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작은 실천
신자유주의시대에서 자본은 갈수록 인간적인 탈을 쓰고, 보다 풍요로운 미래를 약속하면서 우리들의 욕구와 취향, 선택까지 강제하면서 삶의 전 영역을 유연한 전략으로 지배해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건강하고 질 높은 삶에 대해서도 웰빙이나 환경친화적인 척하는 다양한 이미지 작업을 통해 상품으로 소비하게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지향하는 진보적인 세상에 대한 염원까지도 모두 가져가 자신들의 상품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고,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신자유주의에 맞서 ‘일상의 모든 것과 싸워라’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보다 구체화 시켜 내가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데 자본에 의해 장악되고 있는 어떤 것과 어떻게 싸울 것이가를 세밀하게 나누어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즉, 일상에서의 다양한 시도들을 만들고, 그것을 서로 공유하고 나누면서 작은 공동체를 꾸리고, 실천을 확산시켜 일상투쟁을 확대재생산 하는 일이다. 이렇게 노동자 문화를 스스로 만들고 지켜가는 노력들이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나고 소통될 때 노동자 문예창작물도 역시 그 속에서 대중과 소통하며 재생산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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