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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2)

1.

핸드폰이 죽었다.

작년부터 액정이 수시로 나가는 등 혼수상태를 거듭하더니

급기야 지난 토요일에는 완전히 목숨이 끊겼다.

 

액정이 나갈때마다 마구 두드렸는데,

그래서 자살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폭력없는 세상에서 살고싶어요...' 라며...

 

핸드폰이 없어지니 당장 생활이 바꼈다.

월요일이면 아침부터, 심지어 어떨 때는 새벽부터

회의에 참석하라는 등의 고지성 문자가 이어져 날라올 터인데,

핸드폰이 없으니 마치 아무 회의도 없는 것처럼

마음은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그 기분으로 아침부터 샤워도 하면서

느릿느릿 하루를 시작했다.

 

 

2.

어제는 미친듯이 술을 먹었다.

원래 계획된 건 아니었는데,

부로농원에 갔다가, 점심 반주로 시작한 술이

12시 넘어까지 끊길듯 끊길듯 하면서도 이어졌다.

당초무늬/ 덩굴풀에서 유래된 것인데 끊기지 않는 영원을 뜻한다고 한다.

어제 마신 술이 꼭 이랬다.

 

 

물론 중간에 혼절에 가까운

잠자기 민폐신공을 보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난 죽은 핸드폰을 뒤따르는 사태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3.

이병률의 산문집 <끌림>을 두번째 읽었다.

술이 덜 깨 화정까지는 생각없이 풍경만 보며가다

몇페이지 남은 나머지를 다 읽고,

맨 뒷면의 정호승의 추천사까지 다 읽었다.

 

정호승의 추천사는 처음 읽는다.

'... 결국 사람이 머물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며,

사람이 여행할 곳은 사람의 마음...'

 

이병률의 산문집 끌림/ 디자인도 깔끔하다.

 

 

책을 보지 않고 정호승의 추천사만 봤다면,

시인 특유의 '과민'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책을 덮으며 그 구절을 읽으니

뭉클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마침 책을 덮으니 행주산성을 지나고 있었다.

따뜻해진 마음으로 덕양산을 바라봤다.

햇볕이 이파리에서 부서져 반짝반짝거렸다.

 

 

4.

아침 공기는

멀리 있는 관악산이 아주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가을날처럼 그렇게 투명했다.

 

투명한 공기를 가로지른 태양광선은 선명했다.

그림자는 흑백이 명확했다.

 

그럼에도 내 머리속은 흐릿했다.

아무도 부르는 사람 없는 낯선 땅에 와 있는 것처럼

한가하기도 했고,

현실감이 전혀 없는 꿈속처럼

발바닥 촉감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실실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아마 <끌림>의 여운에, 깨지 않은 전날의 술기운의 영향일 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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