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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월정(弄月亭)과 군자정(君子亭)을 가다

농월정(弄月亭)과 군자정(君子亭)을 가다.



유홍준의 유명한 「나의문화유산답사기2」는 농월정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농월정 앞 넓은 반석과 계류 
유홍준은 농월정을 남한 제일의 탁족터로 꼽으면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무려 6쪽에 이르는 서설(序說)을 푸는데, 맹자로부터 신윤복까지 주로 탁족(濯足)에 관한 선현들의 문적 등 자취를 장황하게 흩는 것이었다. 역시 설레발이 쎈 유홍준이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인 최순우 같은 선비풍 사람이 답사기를 썼다면 초승달 뜬 밤하늘 풍경이 상상 속에서라도 삽입되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농월정은 탁족하기도, 선비가 사색하기도 참으로 안성마춤인 자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난 지난 현충일(6월 6일) 이곳에 들렸다.



농월정은 바로 앞에 1,000여 평에 이르는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고,
불타기 전 농월정/ 광고판에서 찍은 사진 
그 사이사이를 풍부한 계곡물이 작은 폭포와 급류를 연이어 만들면서 물소리는 곧 음악이 되어 은은하게 퍼지는 너무나 멋진 풍경을 품은 정자였다. 정자였다는 건, 지금은 없다는 뜻이다. 2003년 10월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되어 지금은 빈 터와 채 치우다 만 잿더미만 쌓여 있다. 그러나 넓은 반석과 계류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사실 정자가 불타기 전 이곳 농월정은 이름처럼 달빛줄기 하얗게 반석 위에 내리고, 계류가 청아하게 울려퍼지는 그런 분위기와 사뭇 거리가 있었다. 1993년 관광지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매일같이 사람들이 넘쳐났고, 특히 휴일날이면 넓은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가득 찼다고 한다. 90년대 말 이곳에 왔을 때에도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넘쳐났었다. 반석 위에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건 여느 유원지 모습 그대로였고, 줄줄이 늘어선 위락시설에는 특유의 뽕짝이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뒤섞였었다.
농월정에서 바라본 반석과 주위 풍경  
마치 유치원생,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와 혼잡스럽기 그지없는 박물관을 간 것처럼, 깊은 사색은 고사하고 유홍준의 글을 되새김질하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번엔 바쁜 걸음에 우연히, 그것도 휴일에 들렸음에도 사람들이 없어 계류의 맑은 소리 속에서 쏟아지는 달빛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그렇담 정자가 불 타 없어진 것에 감사라도 해야 하나?



달을 희롱한다는 뜻의 농월정(弄月亭)은 조선 선조 때 벼슬을 시작해 광해군 시절 인목대비 유폐에 반대하여 귀양살이하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관찰사와 예조 참판을 지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가 지은 정자다. 광해군에게 핍박받은 그는, 반정세력과 반정을 더없이 정당화해주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반정세력이 그에게 의존하는 한 그의 환로(관직에의 길)는 탄탄대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정 후 관직생활에 오래 머물지 않고 정계에서 은퇴한 뒤 이곳에 머물면서 자연을 벗삼으며 후학을 길렀다고 한다. 광해군에게 핍박을 받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군왕인 광해군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불충한 신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터이니 출세와 자격지심 사이에서 어찌 번민이 많지 않았을까.
간결하고 검소한 군자정  



농월정에서 상류로 오르면 동호(東湖)정, 군자(君子)정, 거연(居然)정 등 아름다운 계곡을 옆으로 멋진 정자들이 이어진다. 동호정과 거연정은 수리중이다. 나는 군자정으로 내려갔다. 이름이 되게 촌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군자정은 마루 넓이가 네다섯 평에 그칠 것 같은 아담한 정자다. 아무런 단청도 되어 있지 않고, 나무와 흙(기와도 흙이니)으로만 간결하게 지어졌다. 지금도 사용하는 듯 기름때, 사람때 묻어나는 마루에 오르니 맑은 계곡물은 손을 뻗치면 닿을 것만 같다. 낮은 눈높이가 참으로 편안하다. 세운 뜻이야 어떻든 군자라면 꾸밈이 없어도, 낮은 눈높이를 가지고 있어도 능히 일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군자정은 이름과 어울리는 정자다.
군자정 마루에서 본 주위 풍경  



정자의 유래를 적은 팻말을 보다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유래나 그딴 건 잊어버리자. 자체로 좋으면 좋은 것이지. 제 아무리 천리마라고 하여도 백락과 같은 이가 있어 알아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고 하였는데, 가문의 영광을 정자로 표현하여 기념하려 했든 어쨌든 자체로 좋으면 좋은대로 느끼면 되는 거지.



혹시 이미 들렸거나, 다음에 이곳에 들리는 분들이 내 글과 비교해 '에이, 그림이 전혀 아닌데' 하고 동의 못 하거나 실망하시는 분들이 있으리라. 하지만 이해하시라. 난 눈에 거슬리는 정자 옆 영업집이니, 길을 내느라 산을 허무는 험한 모습은 관념 속에서라도 지우고 본 것을 표현하였으니 말이다.
매실/ 바쁘게 일하느라 급하게 하나 찍었다. 



함양의 안의에서 서상으로 이어지는 궁벽한 계곡 가는 의외로 넓은 평지를 가지고 있는 안의나 서상보다도 문자향(文字香)이 넘치는 곳이기도 하다. 연이어 늘어선 정자뿐만 아니라 정려비각이 여러 개가 있고, 길가 반반한 바위면 의례 글씨들이 각자(刻字)되어 있다. 물론 너무나 촉박한 일정이라 글자 하나하나, 비석 하나하나 살필 여유는 없었지만 말이다.



모처럼 이곳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을 따라 지어진 아름다운 정자들을 돌아본 것은 연휴를 이용해 처가에 가 매실을 따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같이 동행한 이필규 형님에게 보답하는 차원이기도 하였다.



처가의 매실농원은 하동에 있는데, 장인 어른이 병환이 나신 후 3년 째 매실 추수를 하러 다녀왔다. 매실 농사를 전문으로 짓는 농꾼으로부터 매실나무는 가지치기를 잘 해줘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작년에 매실추수를 하면서 과감하게 가지를 솎아냈다. 한 그루에 3-4 가지만 두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7-8가지를 남긴 건 잔가지 하나라도 아까워하는 장모님 때문이기도 했다.
안의 광풍루 
그래도 가지를 솎아낸 보람이 있었다. 봄가뭄으로 이곳 매실 작황이 좋지 않다고 하는데도 처가의 매실을 작년보다 크기나 색깔이 월등하였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급하였다. 연휴라 차량이 명절 때만큼이나 많아 서울로 되돌아오는 길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전-통영 고속도로 지곡IC에서 내려 농월정 가는 길에 안의가 있다. 인근에 유적도 매우 많은 동네인데 마음 급한 우리는 광풍루에 오르는 것으로 만족했다. 안의는 지금은 면소재지지만 예전에는 고을자리다. 당당한 광풍루는 이곳이 고을자리였음을 뽐내는 것 같다. 

 
광풍루에서 바라본 하천과 보호수림  


농월정과 군자정 가는 길 : 대전-통영 고속도로 대전에서 진주 방향으로장수를 지나 육십령 터널을 지나면 곧바로 서상IC가 나온다. 이곳으로 빠져나와 안의 쪽으로 내려오면 길을 따라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이 이어진다. 안의에서 조금만 더 가면 같은 고속도로 지곡IC가 나오니 진주 쪽으로 가는 길에 한두 시간만 더 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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