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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친정 묘역

1.

 

장희빈.

비록 개인적으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남편이 내리는 사약을 마시고 죽어야 했던 비극의 주인공이지만, 그런만큼 참 매력적인 인물이다. 내겐.

 

언젠가 내가 조선 당쟁에 대한 글을 쓴다면 시작은 광해군 등극, 끝은 장희빈의 죽음으로 하고 싶다.

 

내가 장희빈을 매력적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장희빈에 대하여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단편적인 지식을 모아보아도 그녀는 결코 악인은 아니었던 거 같다.

적어도 라이벌이었던 인현왕후나 정적이었던 노론보다는 말이다.

 

그녀는 나인으로 궁궐에 들어와 왕비의 위치에까지 오른다.

근엄한 조선시대 사관들이 실록에 그녀를 표현하기를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고 했단다.

이 표현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왕비(후궁 포함)들 얼굴에 대한 유일한 것이기도 하단다.

 

어쨌든 장희빈의 무덤도 장희빈 친정의 무덤도 내가 살고 있는 고양시에 있다.

묘지기행이 취미고, 앞으로 묘지기행을 하면서 글도 쓰고 싶고, 더욱이 당쟁에 관한 글을 쓴다면 장희빈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내겐 그들의 무덤이 고양시에 있다는 것은 내겐 행운이다.

 

 

2.

 

장희빈 친정 무덤은 불광동 은혜초등학교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항공사진으로 봤을 때 은혜초등학교 자리가 무덤들이 있던 중심자리였던 거 같다.

 

서울이 확장되고, 묘역이 개발되면서 1974년 고양시 고봉산 숯고개 자락으로 이장해왔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장하면서 신도비를 비롯한 석물들도 함께 이장했다는 점이다.

 

장희빈의 아버지 옥산부원군 장경(張烱)의 신도비. 밑돌인 귀부의 길이가 거의 4M 20CM에 이른다. 이 거대한 석물을 197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비용도 만만찮았을 터인데 후손들이 고맙다.

 


묘역은 이제 그 앞에 커다란 식당이 들어와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데다, 그 흔한 안내간판 조차 없어 초행자는 찾기 힘들 것만 같다.

 

장희빈은 옥산부원군 장경(張烱)의 유일한 딸이다. 장희빈의 오빠는 드라마에 거의 왈패로 나오는 장희재다.

 

3.

 

위의 신도비를 먼저 보자.

나는 신도비를 아주 많이 봤다고 자부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본 편이다.

그런데 저렇게 큰 귀부를 본적이 없다.

 

조각 또한 훌륭하다.

돌은 또 어떤가. 세워진 해가 아마도 장희빈이 왕비가 된 1690년일 터인데,

최근에 만들어 놓은 것처럼 마모된 흔적이 거의 없다.

 

사진으로는 잘 못 느끼겠지만, 신도비의 비신(몸돌) 또한 매우 좋은 돌이다.

당시 새겨진 글씨가 지금도 매우 선명하다.

무덤답사를 많이 해본 이들은 알 것이다. 저런 좋은 재질의 돌은 거의 왕릉이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돌이다.

 

그런데 비석 몸돌에 비해 귀부가 부자연스러울 만큼 크다.

왜 그럴까?

 

신도비는 비문이 4면을 빼곡이 채우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장형의 신도비는 비문이 앞면밖에 없다.

그만큼 기록할 것이 별로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장희빈의 가문이 다른 사대부 가문에 비해서 보잘 것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비문은 당대 대제학을 지낸 민암이 지었으니 글을 못 지어서 비문이 짧았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문을 기록하는 몸돌을 무작정 키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신 귀부를 크게 하여 권위를 실어준 것 같다.

 

 

4.

 

신도비 위로 눈에 보이는 묘역 위에 곡장을 두른 당당한 무덤이 옥산부원군 장경의 무덤이다.

 


저 위에 곡장(담장)에 둘러싸인 무덤이 옥산부원군 장경의 무덤이다. 장경 무덤 뒤로는 장희빈의 증조 할아버지 장수(張壽)의 무덤이 있다. 나중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옥산부원군 무덤에 서있는 문인석. 돌의 재질도 좋고, 조각도 좋은 명품이다.

 

 

전면에서 보면 옥산부원군 무덤 왼쪽 커다란 나무들이 자란 곳으로 들어가면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영혼무덤이 있다.

 


장희재의 영혼무덤. 외로이 홀로 숨어있다. 사형당한 트라우마가 후손들에게까지 대물림 한 것일까?

 

 

장희재(張希載).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동생 장희빈의 후광을 입고 종2품 총융사(摠戎使)에까지 오른다.

그리고 장희빈과 함께 사형을 당하였는데 시신을 미쳐 수습하지 못했는지 이곳에 있는 무덤은 영혼무덤이란다.

 

영혼무덤. 몸이 없는 무덤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상상한다. 실제로는 후손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무덤을 만들고는

후환이나 훼손이 두려워 영혼무덤으로 가장했을 거라고...

 

장희빈 친정이 장희빈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몰락했을 거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정치적으로는 몰락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장희빈 친정이 당시 재력을 모으기 쉬운 역관 집안이었는데다, 숙종 임금은 무덤을 지키는데다 쓰라고 20결의 토지를 하사했다.

 

결이라는 단위는 넓이 기준이 아니라 토지 생산량을 기준으로 한 단위므로, 가장 넓이가 적은 최고 좋은 토지를 기준으로 할 때 약 3,000평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6만평의 토지를 하사한 것이다.

내가 과문해서인지 몰라도 장희빈과 장희재의 사형 이후 토지를 몰수했다는 기록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그 후손들은 상당한 재력을 소유했을 것이다.

실제로 묘역은 1974년 이곳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불광동에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재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이 비록 사형을 당했다고 하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이곳이 영혼무덤이 아닌 실제 장희재의 몸이 묻힌 무덤이라고 나는 상상하는 것이다.


 

5.

 

나중에 항공사진을 보니 산 위쪽으로 이 집안의 무덤이 더 있다.

아래 무덤 안내 비석에 15기의 무덤이 있다고 했으니 증조할아버지 장응인(張應仁)을 비롯한 장희빈 친정 무덤이 더 있을 것이다.

 

그부분은 다음 기회에 찾아봐야겠다.

그곳을 가 보면 아마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희빈 친정묘역 항공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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