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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affection)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다만 무슨 얘기 끝에 내가 말했다.
'애정의 최고 단계는 강요하는 것이잖아요.'
산오리가 즉각 답했다.
'그래요. 난 그냥 냅두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산오리 최신 아바타

 



듣고 보니 고민이 됐다.
사실 그냥 냅두는 것도, 강요하는 것도 모두 애정을 전제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층위가 다르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어느 단계에서는 '그냥 냅두'고, 또 애정이 발전하면 '올바르다 믿는 것'을 요구하고, 또 발전하면 '그냥 냅두'고 그런 것 아닌가?

 

그래도 애정의 최고 단계는 '강요'하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용어 선택에 대하여 대다수는 반감을 갖는 것 같다. 강제성, 강압 등등의 개념과 '안 좋은 기억'이 뒤엉켜서 '뭔 소리랴' 하고 생뚱맞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리라.

 

영화 '오, 수정' 중 대화장면/ 출처 : nkino

 

나 또한 강제, 강압 등에는 실시간으로 알레르기가 나는 체질이다. 그럼에도 '강요'라고 쓰는 것은 매우 '이상'적인 개념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용감'이라는 단어와 바꿔도 될 것 같다. '애정'='강요', '애정'='용감' 충분히 가능한 것이리라. 즉,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걸 상대방이 하길 '용감'하게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자신도 상대에 대하여 '성심'껏 '용감'하게 '요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말이다.

 

이상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이상은 현실에 없다는 얘기도 아니다. 이상을 추구하면서 현실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타협점, 그리고 타협점이 그리는 궤선, 그 자체가 또한 이상이기도 하다고 난 생각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과연 '용감'하게 '요구'하는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될까. 상대의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없는 일방적인 요구말고 말이다.

 

요구는 마찰을 일으킨다. 당연하다. 난 마찰을 좋은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마찰'에도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듯 하다. 분란과 동일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말이다. 난 '마찰'이 없이 어떻게 '변화'가 있겠느냐는 전제 아래서 '악의'적 대립의 마찰이 아닌 '선의'의 대립에 의한 마찰을 얘기하는 것이다.

 

김정수교수의 사진 '도시인'/ 출처 : phtohouse

 

어찌됐든, 요구는 마찰을 일으키는데, 문제는 마찰이 누구에나 두려운 것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공동체 사회가 붕괴돼 모든 책임이 개인화 되어 있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점점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모든 분란을 피해가야 하도록 진화(? 퇴화)를 거듭하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닌가? 어쩌다 용기를 내 애정이 실린 요구를 하지만 상대 반응이 싸늘하면, 그 반응으로 최소한 전치 3주의 내상을 입곤 하지 않는가? 그런 걸 거듭하다 보면 보편적 인류의 진화의 길에 동참하게 되고 말이다.

 

외롭다는 건 그런 것 아닌가 한다. 일방적 관계. 쿨한 관계. 즉, 반응(reaction 또는 feedback)이 없는 일방적인 표현뿐인 관계 말이다. 얇은 유리막 같은 감성의 심장이 깨지지 않을 정도의 감각 교환, 이것이 외로움의 실체가 아닐까?

 

사람이 뭘까? 물과 단백질과 지방과 칼슘이 어떤 비율로 이뤄졌다는 등의 얘기말고 말이다.
사람이 뭘까? 사람이란 어찌 보면 타인의 감성에 비춰져 반사되는 영상의 잔상이 아닐까? 물론 그걸 넘어서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다.

 

영화 '오, 수정' 한장면/ 출처 : kino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 '부분'이다.

 

위의 시와 같이 실체는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속에서 의미를 갖는 것 아닐까.
그러고 보니 보들레르의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이라는 시를 보고, 아니 제목만 보고 가슴이 울렁거렸던 기억이 아늑하다. 그만큼 나도 '진화의 길'에 동참해가고 있는 중이겠지만... 그래도 고개를 돌려 조금 더 사람에게 애정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affection'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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