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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규제완화와 아펙의 '반부패행동계획'
요즘 미국이 아펙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쟁점 가운데 하나로 '반부패행동'을 꼽을 수 있다. 작년 칠레 정상회담 때 채택된 '반부패행동계획'은 올해 2005 부산 아펙에서도 7대 역점 과제 가운데 하나다. 2004년 외교통상부 아펙 담당 대사인 김종훈은 "반부패행동계획이야말로 아펙의 가장 대표적인 성과"<세계경제> 2004년 11월호)라고 말한다.
그러나 특히 미국이 주장하는 아펙의 역점 과제 '반부패' 구호의 연원은 1997년 동아시아 금융 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펙의 '반부패' 구호는 동아시아의 소위 '정실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담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아펙의 뉴스레터 2004년 12월호는 "1977년 아시아 금융 위기는 부패가 효율적인 시장 개방을 방해하고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www.apec.org)고 주장한다.
이것을 잘 보여 주는 사례가 바로 1998년 아펙 정상회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시아 금융위기 원인을 놓고 미국과 말레이시아 사이에서 설전이 오갔다. 당시 클린턴을 대신해 회의에 참가한 앨 고어는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정실 자본주의와 부패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말레이시아 마하티르뿐 아니라 말레이사이 외무장관까지 "내가 들어본 말 가운데 가장 구역질나는 말이다"하고 맞대응했다. 당시 앨 고어는 아시아 금융위기는 아시아의 정경유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아시아의 금융위기에서 미국은 책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작 동아시아 발전 모델을 가장 칭송하던 자들이 바로 자신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위의 주장은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을 자극할 만했다.
미국이 "반부패"를 아시아 국가들이 해결해야 할 숙원 사업처럼 주장하는 것은 몇 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정실 자본주의의 진면목을 분명하게 보여 준 엔론 부패 스캔들과 너무도 대비된다. 엔론은 미국식 정실자본주의의 표본이었다. 엔론의 CEO였던 켄 레이는 부시 일가의 오래된 친구이자 조지 W 부시한테 선거자금을 가장 많이 준 기업인으로 유명하다. 도널드 럼스펠드는 엔론의 대주주이며 엔론의 전 부회장 토마스 화이트도 부시 행정부의 주요 각료였다.
비슷한 위선은 아펙의 ABAC의 일원이자 이라크의 전후 복구사업에 참여할 우선입찰자로 미 정부에 의해 지명된 5대 그룹 중의 하나인 플루오르 그룹(Fluor Gruop)의 부사장 로버트 프리에도가 아펙에 제출한 보고서에도 드러난다. 그는 정경유착과 뇌물 때문에 아시아 기업들의 부담이 늘 수밖에 없다면서 아펙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부패는 아펙 경제 발달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부패는 기업의 숨겨진 세금이다." 그러나 위선적이게도 플루오르 그룹은 이라크 전후 복구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서 조지 부시한테 기부금을 낸 기업 리스트 명단의 상위에 올라 있다.
부패는 자본주의의 붙박이 장롱이므로 반부패는 결코 자본주의적 시장화를 통해서 해결될 수 없다. 사실상 아펙의 '반부패'는 사유화와 기업 규제 완화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리는 이데올로기 구실을 하고 있다. 아펙이 주창하는 무역장벽 제거에는 어김없이 기업 규제 완화 같은 항목들이 빠지지 않는다.
'반부패=기업규제완화'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서 다국적기업이 마음껏 활개치고 이윤 활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내심이 아펙에 깔려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아펙의 '반부패'는 아시아 기업 사냥을 위한 기회의 창이다. 이것은 미국의 아펙 대사 래런 모리아티(Laren Moriarty)가 썼고 미 대시관 홈페이지에도 실려있는 '2005년 아펙에서 미국 정책'이라는 제목의 글에 위의 의도가 아주 솔직하게 씌여 있다.(http://usembassy.state.gov/seoul/wwwhmain.html)
한국정부는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일까? 2003년 아펙회의 당시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관해 뉴질랜드 ABAC 위원이 한국 정부 관계자한테 물었다. 한국 정부의 한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기업지배구조 강화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1998년 이래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회계 투명성을 제고하고 있습니다. 인수/합병 활성화를 위해 여러 제도를 개선하고 있습니다."
이 일들을 '열심히' 실천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 결과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기업이 바로 사기업화된 한국통신(KT)다. 회계 투명성 제고와 기업지배구조 강화 노력 속에 설비투자는 최근 몇 년 동안 0%였고, 2만 5천 영을 해고하고, 요금을 계속 높여 온 덕분에 전국의 세 곳에서 전화 먹통 사태가 벌어졌고 개인 정보가 상품화됐고, 주주 가운데 50% 이상이 해외투자자들이다.
"테러리스트의 자금 경로를 차단하기 위한 반부패"라는 '반부패행동계획'의 목표도 모순적이긴 마찬가지다. 검은 돈을 세탁해 주는 가장 크고 중요한 시장은 미국이다. 레이먼드 베이커는 그런 돈이 대부분 미국과 유럽의 금융기관을 거쳐간다고 단언했다. 미국에는 돈세탁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어서 현금 예치는 은행 기록으로 남겨져야 한다. 그러나 실제 사정은 규정과는 다른다. "미국 재무부의 관리들은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다른 나라에서 흘러 들어오는 돈이 조세 포탈 자금인지 아닌지 신경쓰지 않고 그 자본을 유치하려는 것이 미국의 방침이다."(<모던 지하드; 테러, 그 보이지 않는 경제>, 로레타 나폴레오니, 시대의 창 17장) 또,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미국 관계법은 미국 사업가, 금융 전문가, 은행가 등이 외국 정부 관리들한테 뇌물을 주는 것을 금지했다. 하지만 부정부패를 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돈 많은 외국 관리들을 만나면 미국은 그들이 돈을 예치하길 원한다." 그런 돈의 규모는 막대하다. 예를 들어, 뉴욕은행은 러시아에서 흘러나온 돈 1백억 달러의 돈 세탁 계획과 관련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2001년 10월 미국에서는 애국자법이 제정돼, '테러리스트'의 돈일지도 모를 돈은 돈세탁금지법에 무조건 저촉돼 자금 경로를 조사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해외부정부패방지법'이 제정되고 무려 25년이나 흐른 시점이었다. 다시 말해, 그런 법이 제정된다 해도 그 법망을 우회하는 다른 많은 방법을 규제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계 에너지 대기업 유노칼이 정부의 후원을 받으면 중앙아시아의 파이프라인 계약을 따내기 위해 탈레반 정권에 2천5백만 달러의 기부금을 준 사례는 '반부패'와 '테러리스트 자금줄 차단'이라는 아펙의 구호들이 이중잣대에 따른 것일 뿐임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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