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법으로 인한 테러

주 봉 희 | KBS방송사비정규직 노조위원장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파견법이라 한다)이 98년 2월 25일에 제정되었을 때 법에 무지한 우리들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십수 년을 용역으로 이중파견으로 단련된 우리였기에 파견법으로 해고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고, 오히려 은근히 기대를 하였는지도 모른다.
일부 동지들은 '세월아 빨리 가라'며 들뜬 기분으로 하루를 영위하는 모습도 보인다. 하루가 우리 자신들을 바구미 쌀 파먹듯 자신들의 삶을 파먹는 줄도 모르고 히히덕 거리던 세월은,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여린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잘도 지나간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눈 앞에 닥친 현실을 추스릴 땐 이미 꿈은 분노가 되었고 살아온 인생이 왜 그리도 원망스럽고 본전 생각이 나던지. 50줄을 바라보던 2000년. 사형선고나 다름 없는 파견법에 의한 정리해고가 시행될 시점에 난 정말 많은 갈등에 빠진다. KBS에 근무하면서 쌓아놓았던 사측관리자들과의 좋은 인연으로, 비록 비정규직이었지만 서로의 신뢰는 형님 아우 사이가 되어 있었다. 옛말에 물길 속 열길은 알아도 사람 마음 알 수 없다더니 관리자들의 끈질긴 유혹은 뿌리치기가 영 힘이 들었다. 파견법이 오랜 인연도 원수로 만드는 법이로구나 하고 생각할 때는 이미 우리는 철전지 원수가 되었고 으르렁거리며 살쾡이가 발톱을 세우고 서로를 할퀴고 있었다.
파견법이 낳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한 가지 이야기 하나 할까 한다. 어느 날, "형님, 파견법이 정확하게 어티기 된 법이래유." 충청도 당진이 고향인 성욱이는 유난히 사투리가 심하지만 느릿느릿하면서도 유머가 꽤 있던 친구였다. 지나 나나 파견법이 뭔지 아나. 그래도 내가 반장이라도 하고 있으니 좀 유식해보였는지도 모른다. "글세.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이니께, 동물보호법 같은 거 아니겠냐." "아니, 형님. 우리가 그럼 동물이란 말유?" "그럼 자슥아, 우리가 개돼지보다 못한 동물이지, 우리가 사람이냐. 사람이면 보호등에관한법을 굳이 만들겠냐."
그 땐 왜 그렇게 여유가 있었는지. 아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파견법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 시키고, 오랜 세월을 정을 나누었던 팔도에서 모인 여리디 여린 그 많은 동지들과 헤어지게 만들고, 50줄을 바라보며 노후를 설계를 하여도 짧은 시간인데,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중늙은이 부랑아로 만든다. 아무리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 하지만 화려하게 피었다가 지는 꽃이라고 내년에는 피지 말라는 자연의 법칙이 있는가? 그래서인지 파견법은 매년 파견노동자를 잘라놓고 심고 자르고. 그것을 자본은 즐기고 있는가.

파견법의 위해성은 파견노동자로 일해 본 노동자가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파견법은 그동안 무엇을 남겼나? 파견법으로 채용하고, 파견법으로 해고당하고, 파견법으로 착취한다는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 파견법이 시행되고 법으로 보호한다고 큰소리 쳤지만 보호받은 자 누구인가? 오히려 파견법으로 5년, 10년, 18년 근무하던 방송사에서 쫓겨났다면 아무리 무지한 노동자일지라도 분노하지 않는 자 어디 있겠는가? 십수 년 동안 쥐꼬리 만한 월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중착취와 중간착취에 시달리면서도 가족들의 안위와 자신들의 미래를 자신하던 사람들의 꿈과 희망 미래를 산산이 찢어놓고, 흩어진 낙엽처럼 짓밟으며 조그만 삶도 무참히 밟아버린 법이 파견법 아닌가. 가끔 십수 년을 함께 했던 동지들을 만나 소주잔이라도 기울이며 쓴 웃음 속에 이야기한다. 파견법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KBS에서 근무하고 있을까 라고.

파견법은 우리에게 철전지 원수 같은 법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정권과 자본에 의해 2년에 주기적으로 파견법으로 테러를 당해야 하니 도대체 언제까지인가. 아무 검토 없이 준비 없이 파견법 통과를 시킨 일등 공신들은 어디에 있나? 그들을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원망하는 것은 파견법으로 이 사회가 무참히 짓이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기가차고 뚫리지도 않는다. 심하게 말한다면 김대중정권, 거대 자본, 노사정위원회, 양대노총한테 사기를 당했다고 하면 과장된 말일까?

3년 동안 이렇게 '파견법을 철폐하라'고 또라이가 되어 내 온몸을 불살랐지만 당신들은 날보고 이렇게 말하겠지. "우리가 죄인이 아니고 신자유주의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날고 기는 이 땅의 노동운동가들. 술잔을 기울이면 어김없이 전노협이 어쩌고 하면서 대한민국의 노동자를 위해서 자신을 던졌노라고 자신 있게 말들 한다. 난 처음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할 때 경의적인 투쟁에 감탄을 하곤 했다. 그러는 지금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광풍이 불어닥치고 있지 않은가. 어디에들 숨어 계신지. 전체 노동운동하신 대선배들을 매도하는 건 아니라는 걸 전제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파견법 시행 기간 동안 정말 무엇을 남겼나? 정말 파견법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냐고 묻고 싶다. 파견법 1조부터 48개 조항을 들여다보라. 어디 한군데 파견노동자를 위한 조항이 있는가. 이제 자신을 이야기하자. 잘못을 가리기 전에 자성을 하자. 파견법의 문제를 솔직히 이야기해야 한다. 왜 이 땅이 불법파견이 판을 치는지, 끊임없이 자행되는 착취의 근원을 이야기할 때마다 등장하는 것이 파견법이다. 고용을 안정시켜주는 법이 아니라, 불법파견의 주범이며 오히려 파견노동자들을 갈취하고 탄압하는 수단이 바로 파견법이라는 걸 정확하게 알려야 한다. 파견노동자들의 발목을 잡는 악법 중에 악법 파견법의 본질을 감추지 말자.
파견법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폐기될 때까지 저는 맨 앞에 서 있겠습니다. 투쟁!

* 이 글은 2003년 9월에 방송사비정규노조 주봉희 위원장님이 쓰신 글입니다. 오랜 해고투쟁 끝에 지금은 KBS 자회사로 복직을 하셨습니다. 주봉희 위원장님과 KBS 비정규노동자들은 비록 파견노동자로서 지속적인 고용불안은 모면했지만 여전히 고용불안과 장시간 노동에 쫓기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안정과 인간다운 삶, 그리고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오늘도 끈질기게 투쟁의 현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전국불안정철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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