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크∼ 그래도 500만 원 짜리 집에 살아요"

2011/03/21 12:57
 

 

"지금은 크∼ 그래도 500만 원 짜리 집에 살아요"

-주봉희 민주노총 부위원장

이반의경 | 노동자의 힘 편집국장 |기관지 노동자의 힘  제 122호
 
 
 
 
 

 

 
토론회든 집회장소든 어디서나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분으로 내 기억에 자리하고 있는 주봉희 부위원장의 얘기를 들으러 가며, 많은 생각이 교차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터뷰 뒤의 느낌은 분노+답답+우울이었다. 하지만 쉽게 꺾일 동지가 아닐 거라는 생각도 한편엔 들었다. 주봉희 동지는 비정규직투쟁을 열심히 해보자고 부위원장 선거에 출마했고 민주노총에 들어갔으나, 민주노총은 도대체 비정규직투쟁을 제대로 할 의향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와 소통불능인 듯 느껴졌다.

민주노총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주봉희 동지는 사무총장과 심각하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며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주봉희 동지가 얘기도중 버럭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곤 했다. 알고 보니 비정규실 실무진 배치 문제로 그의 심기가 많이 상해있었다.
 

 

860만 비정규직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운동은 곤란해
당선 뒤 축하 보다 걱정의 소리가 더 많았다.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오히려 축하해주었다. 정파와 관계없이 주봉희 동지를 지지해주었던 사람들은 민주노총의 운동기조가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비정규 관련한 일을 하고 있고, 그 외에 장투사업장 일을 임시로 맡고 있고, 열사대책위 등 비정규직 담당자가 해야할 일이 많다는 주봉희 동지. 민주노총에 들어오자마자 부딪히고 있는데, 올바른 운동으로 간다면 정파를 떠나 적극적으로 함께 활동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운동기조를 깨고 원칙을 저버리는 운동에 동조할 수는 없단다. "오랜 세월을 현장에서 투쟁만 해왔고, 그 방식대로 총연맹에서 하려다보니, 열어놓고 얘기 안 되는 부분도 있고, 상황에 따라 말을 달리하는 부분도 있어서 지금은 딜레마예요. 이곳 분위기는 딱딱해요. 자리에 앉아있기 답답하죠. 현장과 비정규사업장 돌아다니는 게 좋아요. 임원회의, 사무총국회의가 아직은 익숙지 않고 부자연스러워요.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정이 들겠지만, 경계의 눈초리가 아직은 많이 있어요." 주봉희 동지는 860만 명에 달하는 비정규직이 '어느 구석에 처박혀있는지도 모르고', 항상 말뿐이고, 실질적인 비정규 투쟁은 제대로 해오지 않은 민주노총운동이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민주노총에서 비정규 담당자는 한직으로 밀려난 것'이라던 한 연맹 부위원장의 말이 떠오른다. 수많은 열사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는 운동을 해야하고, "열사정신 계승"을 술자리에서 "위하여"외치듯 해선 안 된다는 주봉희 동지.

 

맑고 아름다운 노동운동을 하고 싶다!

"꿈이 많았죠."라는 주봉희 동지는 부위원장 된다는 생각은 못 했는데, 작년 12월 초에 모란공원 박상현동지 추모제에 갔다가 묘소에서 '네가 살아있을 때 맑고 아름다운 노동운동하고 싶다'고 말했듯이, 내가 그걸 계승·발전시켜보자. 자본과 정권에 쉽사리 타협하지 않는 운동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총연맹이 이렇게 하고 있는 한 내가 현장에서 아무리 열심히 한들 소용없다'는 생각으로 선거 독자출마를 결심했다. "차라리 내가 올라가서 몸으로 부딪혀보자"며…. 작년 11월 30일에 제·개정됐던 비정규개악안도 선거 출마에 큰 작용을 한 듯하다.

선거출마를 얘기하자 비정규연대회의나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건강문제도 큰 듯하다. "혼자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냐? 누가 챙겨줄 사람도 없는데 어디 가서 죽어도 모른다. 건강상태가 최악이다. 절대 말려야 한다"며 반대가 심했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어서 처음엔 혼자 후보등록을 했다. 후보추천서도 공공연맹 중앙집행위 일정을 파악하고, 참석자가 전부 파견 대의원들이라고 해서 그 자리에 가서 추천서 받아 접수했다. 등록하고 나서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동지들이 많이 도와주었고, 서울비정규연대회의는 공식후보 안 낸다는 입장이었지만 지도위원이라고 출정식을 마련해 줬고, 그 때 후원금이 많이 걷혀서 큰 도움이 됐단다.
 

 

국회 앞에 가서 집회만 하면 뭐하냐?
주봉희 동지는 '사심을 털고' 나왔고, '되든 안 되든 나 자신을 검증해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그간 주변에서조차 '미친놈', '언론플레이에 강한 사람' 소리를 들었을 땐 화도 나고 눈물도 많이 났었단다. 참다못해 어느 술자리에서 "나는 파견법에 의해 해고된 사람이다. 노동조합 만들었더니 파견법 때문에 6개월만에 조합원들 다 해고됐다. 남은 것은 주봉희와 깃발뿐이다. 신자유주의의 맨 앞장서는 것이 파견법 아니냐? 그래서 기간제법도 연관된 것 아니냐? 나를 파견노동자로 알리고, 파견법이 얼마나 악법인지 알리기 위해서 내 몸뚱어리를 도구로 쓸 수밖에 없지 않았냐? 알맹이는 빼먹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강조하냐? 입으로만 비정규직 철폐했지, 파견법 철폐 유인물 한번 제대로 낸 적 있냐! 파견노동자인 나를 알리는 것이 파견법 철폐투쟁의 시작이었다. 당신들은 단체가 있고, 조합원 수십만이 있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비정규직투쟁 회의 때 "조합원도 없는 주제에, 조직 갖고 얘기하라!"는 소리 듣고 피눈물 흘렸다"며 다 쏟아냈다.

주봉희 동지는 집회가면 발언 달라고 요청한단다. 왜 해고됐고, 왜 싸워야 하는지, 파견법의 문제점이 뭔지 적극적으로 알려야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파견법은 악법이기 때문에 앞으로 노동시장 전체를 통제하고, 지배한다고 줄기차게 얘기했어요. 2002년 경제자유구역법이 통과될 때도 앞으로 2∼3년 후에 봐라, 새로운 법안 갖고 나올 거다. 기간을 정함이 없는 파견노동자 생길 거다. 틀림없다. 26개 파견업종, 현행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이지만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꿀 거다. 2년 뒤에 틀림없이 오지 않습니까? 지금에 와서 기간제법이 어떻고, 폐기투쟁 해야한다, 법 재개정투쟁 해야한다 하면 뭐합니까? 여태까지 손놓고 있다가 국회 앞에 가서 집회만 하면 뭐합니까?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도 없는데. 모든 책임은 한국노총에만 돌리고…. 한국노총 나쁜 놈들 맞지만 민주노총은 잘 한 게 뭐 있습니까?" 그의 가슴에 맺힌 말들이 계속 쏟아진다.
 

 

사업구상 열심히 했건만, 민주노총에서 비정규사업 어찌해야 할지…
주봉희 동지의 얘기를 들어보면, 2003년 홍준표 부위원장 시절 민주노총은 비정규실을 만들었고 활발히 활동을 했었다. 민주노총 예산의 30%를 비정규직 사업에 배정해서 비정규실 독자적인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 해 처음 비정규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당일 근로복지공단 이용석 열사가 비정규직 철폐하라며 분신한 가슴 아픈 기억이 있기도 하다. 비정규직 철폐가도 그 날 류금신 동지가 처음 발표했다. 그러다 이수호 위원장체계로 바뀌면서 비정규직 투쟁이 유명무실화 됐고, 비정규실이 비정규센타로 바뀌었고, 담당자들도 다른 부서로 배치됐다. 함께 열심히 투쟁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 조준호 위원장 때는 비정규직 문제를 전혀 신경 쓰지 않다가 법안 올라가니까 국회 앞에서 총파업 집회 열한 번 한 것이 전부다.

 

 

 

 
올해엔 비정규실로 다시 바뀌었다. 하지만 주봉희 동지와 소통하지 않은 일방적인 비정규실 담당자 배치는 사무총장과 심한 말타툼까지 벌이게 했다. "내가 비정규사업 하겠다고 했으니까 그 문제만큼은 나와 상의할 줄 알았다"는 주봉희 동지. 힘 빠지고 열 받는 상황이다.

주봉희 동지는 부위원장이 되면서, 지역마다 민주노총이든 민노당이든 비정규사업 담당자들이 따로 떨어져있을 뿐 서로 사업을 공유하며 함께 힘을 합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만 모여 그들의 요구를 걸고 대 정부 투쟁을 한 번해보자는 구상도 했었다. "이제 비정규직들이 정규직 욕할 필요 없다. 이젠 싸움의 주체는 비정규직들이다. 그렇게 싸워도 국민들이 비정규직 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남편, 내 동생, 내 자식들이 다 비정규직들이기 때문에 다 동참할 수 있는 문제 아니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비정규직 동지들이 한 곳에 모일 수밖에 없다. 그걸 위해 지역본부를 강화해야 하고 중심투쟁을 총연맹이 총괄적으로 해내야 한다. 그것이 나의 구상이었다… 비정규직투쟁에만 쓸 수 있는 기금을 만들고, 지역상담소도 설치하고, 다양한 투쟁들을 만들어내자, 비정규실을 다 열어놓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총연맹 자유롭게 드나들고 상담하도록 하자. 산재사업 등 다양한 사업들을 하자"는 것이다.
 

 

비정규직으로 살아온 세월
건설노동자로 쿠웨이트, 사우디에 나가서 일하기도 했고, 영업사원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해왔으나, 정규직으로 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KBS에 비정규지부 만들 때도 처음으로 노조 명칭에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붙였다.

행복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는 주봉희 동지. 하지만 동지들이 있어서 참 좋다며, 이런 동지들 때문에 '내가 운동의 끈을 놓지 않고 있구나' 생각한단다. 2001년 추억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고향에 갈 차비가 없어서 못 내려가고 포기할 작정이었는데, 고향에 가서 추석 꼭 보내시라며 호주머니에 꼬깃꼬깃하지만 적지 않은 돈을 넣어주던 인사이트코리아 동지들이 계속 기억에 남아있다.

노동운동은 86년에 통일익스프레스에 운전기사로 취직하며 시작했다. 시간외 수당도 없고, 주말 휴일도 없는 열악한 조건이 그를 노동운동에 눈 뜨게 했다. 당시 교보문고에 가서 노동법 책을 보니 한문 투성이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종로에서 장명국씨가 운영하던 석탑 노동교실을 알게되어, 거기서 한 달 동안 노동법 교육을 받고, 통일익스프레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87년엔 집회 나가 최루탄도 많이 뒤집어썼다. 사우디나 쿠웨이트에서 일할 때도 싸울 일이 있으면 주도적으로 싸웠다. 원래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라 한다.

94년 KBS들어와서 노동조합 만들려고 시도했는데 처음엔 말도 못 꺼냈다. 일 그만두라면 끝이니까. 그 뒤 해고되고 나서 노조 만들었고, 김혜진 동지 등 철폐연대 동지들이 많이 도와줬었는데, 운동을 그만두려 했을 때 '해야한다'며 잡았단다. "이랜드 256일 파업했는데 매일 함께 싸우다 투쟁 끝나니 허전했어요. 당시 한통계약직 투쟁도 그렇게 마무리되니 더 운동하기 싫어졌죠. 당시 잠수 탔는데, 김혜진 동지 등이 파견법 시행 2년 규탄해야하지 않겠냐며 불러들였어요. 거기에 발목잡혀 3개월만에 다시 운동 시작했죠."

주봉희 동지는 요즘엔 장투사업장에 스스로 찾아다니며 일하고 있다고 한다. 명칭만 부위원장으로 바뀌었지, 단위사업장 위원장 할 때와 똑같다고 말한다. 입고 다니는 조끼도 변함 없이 KBS방송 비정규지부 조끼다. "지금은 크∼ 그래도 500만 원 짜리 집에 살아요. 복직하고 나서 빚도 갚았죠. 한통계약직 동지들에겐 아직 값을 돈이 남아있어요"라는 주봉희 동지.

인터뷰 끝내고 나오면서 함께 간 동지가 "투쟁의 현장에서 뵙겠습니다"하니, 선거 끝나고 제일 먼저 온 문자가 똑같은 말인데, 보낸 사람은 정보과 형사더라며 껄걸 웃는다. 무척 힘든 시기일텐데,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주봉희 동지의 민주노총시절이 비정규직투쟁으로 빛나는 시기가 되길 바래본다.
 
2007년06월10일 10시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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