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가 만드는 일터" 2009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산재피해자 권리를 위한 아시아 네트워크 회의 참가 후기(2)
지난 11월호에 소개한 것처럼 9월 22일 첫날 오전에 전체 모임을 가진 뒤, 오후에는 ‘피해자 조직화’, ‘직업성 폐 질환’, ‘효과적인 노동안전보건 훈련’이라는 세 가지 주제별 워크샵으로 나뉘어 진행했습니다. 작년에는 전자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안전보건교육 워크샵에 참여했었더랬지요(작년 워크샵 얘기는 ‘일터’ 2008년 10월호에 자세히 실었으니 관심이 가는 분들은 한노보연 홈페이지에서 찾아 읽어보세요.^^) 올해는 다른 주제를 들어보고 싶어서 ‘피해자 조직화’ 워크샵에 들어갔습니다.
함께 한 사람들
워크샵은 서로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작년과 같은 방식이었어요. 가까이 앉은 사람들끼리 서로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왔는지를 소개한 다음, 전체 참가자들에게 자기 짝궁을 소개했지요.
◀사진1 - 피해자 조직화 워크샵이 열리는 방문 앞에 참가자 명단을 붙여두었다. 한국에서는 ‘정옥 콩’, ‘영일 팍’, ‘상윤 리’, 이렇게 세 명이 참석했는데, ‘상윤 리’ 이름은 안타깝게 사진에 담지 못했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한국, 중국, 타이완, 홍콩, 캄보디아, 미국 등에서 산재상담 등 노동자 지원 활동을 해온 단체 활동가들과 산재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이 워크샵을 통해 산재 피해자들을 조직하는 활동의 고충과 한계를 나누고, 무언가 한발짝 진전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고 싶다는 소망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저는 주로 중국, 타이완에서 오신 분들이 기억나네요.
우선 피해자 조직화 워크샵을 준비하고 진행한 분들. 타이완 산재 피해자 조직 ‘타보이(TAVOI)’ 활동가들이 몇 분 있었습니다. 타보이는 1992년에 만들어진 단체로, 산재 사고 피해자와 업무상 질병 환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을 조직하는 활동들을 해왔대요.
타보이 소속으로 참석한 산재 노동자 한 분이 제법 길게 자기 소개를 했는데, 중국어-영어 통역을 맡은 분들이 잘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통역자들의 표정으로 보아하니 말씀하신 분의 얘기가 너무 빠르거나 중구난방이었나봐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짧은 시간에 자기 얘기를 조리있게 풀어내는 게 참 어려운 일이잖아요. 하지만 기왕 어렵게 참석한 이들에게, 좀 버벅거리더라도 자기 얘기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과 조건을 마련할 수 있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텐데. 역시 비용이 문제인 걸까요.
중국에서는 젊은 활동가와 노동자들이 여럿 참석했더군요. 그 중에서도 ‘동관노동센터’의 지준 리, ‘노동교육서비스네트워크’의 웨이퐁 포크씨는 특히 한국 활동가들이나 ‘반올림’ 활동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고, 사흘 중 이틀 저녁을 함께 수다 떨며 보냈습니다. 선진 지역 ‘홀딩 핸드 센터’의 얀디 첸씨는 이십대 초반의 젊은 여성인데, 자기도 공장에서 손가락을 다친 산재 노동자라면서 한국 산재노협의 활동에 대해 무척 궁금해 했구요.
▶사진2- 첫날 함께한 소집단 참여자들이 토론할 공간을 찾지 못해 호텔 흡연실에 자리잡았다. 왼쪽 위부터 이상윤(노동건강연대), 박영일(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맨디 허즈(미국), 테드 스미스(미국), 지준 리(중국), 얀디 첸(중국), 웨이퐁 포크(중국).
누군가 먼저 고민하고 애쓴 덕에
9월 22일 오후에 시작한 워크샵은 23일 아침에 다시 시작해서 그날 저녁까지 쭉 이어졌습니다. 이틀 동안 워크샵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토론하고 정리하고, 다시 토론하고 정리하는’ 방식이었다고나 할까요. 22일 저녁 프로그램을 끝내면서 ‘자 오늘 나눈 얘기를 정리해 봅시다’하더니, 다음날 아침에는 또다시 ‘자 어제 나눈 얘기를 정리해 봅시다’하면서 시작하더라구요.
저는 이런 방식이 맘에 들었어요. 언어의 장벽,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새로운 얘기들, 빡빡하고 피곤한 일정, 이런 것들 때문에 열심히 듣고 말하고 기록하면서도 도대체 무슨 얘기가 오고간 건지 정리는 안되고, 머리 속이 멍했거든요. 그걸 두 번씩이나 훑어주니 얼마나 좋던지요. 암튼, 9월 23일 아침도 전날 오후에 나눈 얘기들을 정리하면서 워크샵을 시작했어요.
“어제 워크샵 활동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워크샵에 참가하고 있는지, 우리의 관심사와 필요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첫째, 어떻게 피해자와 소통하면서 그 지난한 과정을 인내할 수 있을까? 둘째, 어떻게 (피해자의 문제를 돕는데 머물지 않고) 기업에 맞선 투쟁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셋째, 피해자들이 스스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동기부여를 해야 할까? 넷째, 피해자들의 필요에 기반한 활동이란 어떤 것일까? 이게 어제 우리들이 서로에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렇겠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서로의 얼굴과 이름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산재 피해자 조직화를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우리는 어떤 지점에서 공감하는지, 무엇을 함께 풀어가야 하는지, 바로 그것이겠죠.
사진3 - 피해자 조직화 워크샵 모습. 마이크를 잡고 진행하는 여성은 타이완 산재피해자 조직 ‘타보이(TAVOI)’의 리우 니엔윤씨. 이 사진을 찍을 때는 진행자가 영어로 말하기 답답해서 중국어로 말하는 중이었나 보다. 캄보디아 노총의 노동자들은 모두 헤드폰을 쓰고 있고, 중국에서 온 활동가들은 동시통역 헤드폰 없이 편하게 듣고 있으니까. 나는 아마 영어 통역을 알아듣기 힘들어서 헤드폰을 벗고 잠깐 사진을 찍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게 있더군요. 서너 시간 토론한 내용을 5분짜리로 요약했을 누군가의 수고 말이예요. 워크샵 내내 잠시도 한눈을 팔지 못하고 오고 가는 얘기들에 열심히 귀기울였을, 행여 잊어버릴까봐 열심히 받아 적었을, 그리고 중요한 내용을 뽑아 짤막하게 요약하느라 남들만큼 잠을 푹 자지도 못하고 맥주를 마시러 나가지도 못했을 누군가의 수고. 지금 이렇게 몇 달이 지난 뒤에도 워크샵에서 끄적인 메모들을 보면 그때 생각했던 몇 가지 고민들이 다시 떠오르는 것도, 그 누군가 먼저 고민하고 애쓴 덕분이겠죠.
소집단 토론 - 피해자 조직화 운동의 요구
전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뒤 진행자는 오늘의 토론 주제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어제 여러분이 얘기한 고민들은 모두 피해자들의 다양한 요구를 어떻게 소통하고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요구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인 얼굴(아마 사회적 환경이나 처지를 말하는 것이겠죠)에 기반해서 발생합니다. 그에 따라 오늘은 농업․이주노동자 조직화, 노동조합의 역할 증진, 비공식 부문․외주화 부문 조직화, 직업병 진단과 평가 시스템 개선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나누어 소집단 토론을 해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각 주제별 소집단에서 어떤 질문들에 답해야 할 지, 일종의 토론방법 지침을 보여줬어요.
1. 피해자의 필요와 특성에 초점을 맞추자.
2. 자기가 속한 단체나 조직에서 이런 특별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어떤 활동을 펼쳐왔는지를 공유하고, 성공적인 활동 사례를 얘기해보자.
3. 제일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공유하고, 각자 얘기한 장애물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도출해보자.
4. 다른 나라 또는 다른 조직들로부터 가장 배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공유하자. 다른 참가자들에게 하나씩 질문을 던지자.
5. 좀더 효과적으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가까운 미래에 달성하고 싶은 조직 역량은 무엇인지 말해보자.
피해자 조직화의 목적은 무얼까
헌데 이런 설명을 듣다보니 여러 가지 고민들이 피어오르더군요. 피해자들의 다종다양한 요구들에 대해 그 배경의 사회 현실은 무엇인지, 어떻게 바라보고 조직해야 하는지를 토론하는 것도 중요하긴 한데, 내가 ‘피해자 조직화’라는 영역에서 고민하고 있는 초점에 조금 더 주목하고 싶었어요. ‘산재 인정 투쟁’이 ‘현장 개선과 예방 투쟁’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현실 말이예요.
피해자 운동은 대개 예방을 위해 현장을 개선하라는 요구를 함께 내걸긴 하지만, 정작 피해자들은 그 요구를 좀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생존과 생활의 무게 때문에 차마 차마 요구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고, 정책과 제도의 한계가 너무 명백해서 말해봐야 안될 것 같다고 지레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피해자 ‘원조’나 ‘봉사’가 아니라 피해자들의 필요를 온전히 드러내고 그걸 다수의 필요로 넓히고, 다수로 하여금 자기의 필요임을 확인하게 하는 ‘조직화’와 ‘운동’이잖아요.
그래서 용기를 내어 손을 들고 얘기를 했습니다. 요약하면 ‘산재피해자 운동, 즉 산재인정투쟁이 다수 노동자들의 운동, 즉 현장을 바꾸는 예방투쟁으로 이어지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할까?’라는 질문이었죠. 하지만 언어의 벽 때문일까요. 제 제안은 ‘어떻게 해야 사고성 재해와 직업병을 더 잘 예방할 수 있을까?’라는, 조금 다른 내용의 질문으로 해석되어 여섯째 질문으로 추가되었어요. 아쉽더군요.
사진4 - 소집단 토론을 할 네 가지 주제들. 한국말을 쓰지 않는 국제회의에서는 ‘외국어성 난청’이 생기는 것 같다. 아무리 잘 아는 쉬운 단어라 해도 일단 뇌 속에서 한국말로 바꾸어야만 뜻이 통하기 때문에 귓전을 휙휙 스치는 빠른 외국어는 알아듣기 어렵다. 이걸 보완하는 의미에서 워크샵 진행팀은 참가자들의 얘기를 간단히 요약해서 큰 화면으로 보여주었다. 그나마 다행히 ‘읽기’는 조금 되는지라 무척 유용했고 고마웠다. 하지만 참가자들 누구도 ‘외국어성 난청’ 질환자, ‘언어 소수자’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안로브를 비롯한 국제연대 회의의 큰 숙제라고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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