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건강연대]의 [노동과 건강]에 실릴 글입니다.
피해자들에게 증거를 요구하기 전에 생존권을 보장하라
- 삼성전자 직업성 암 투쟁의 쟁점
2007년 11월에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발족하며 싸움을 시작한 지 어느 새 2년 반이 흘렀다. 발족 당시에 알고 있던 피해 노동자 수는 여섯 명이었는데, 지금 백혈병, 림프종, 재생 불량성 빈혈 등 림프조혈기계 암 피해자 수는 최소 26명으로 늘었다.
산재보상을 청구하여 직접 투쟁에 참여하고 있는 피해 노동자들도 고 황유미 씨 한 명에서 백혈병 4명, 림프종 1명, 뇌종양 1명이 늘어 어느덧 7명이다.
게다가 반도체 뿐 아니라 LCD 등 삼성전자 다른 계열의 노동자들, 그리고 뇌종양, 유방암, 피부암 등 다른 종류의 암 피해 제보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대책위’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을 이어온 투쟁이지만 요즘 들어 부쩍 언론이 반올림의 싸움에 주목하고 있다. 2010년 3월 31일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백혈병에 걸려 2년을 투병하던 박지연 씨의 사망이 중요한 계기였다. 올 들어 이건희 특별 사면과 경영 복귀, 김용철 변호사의 책 출간 등 불법과 비리로 점철된 삼성의 문제점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계기들이 많았던 것도 이런 관심을 일으키는데 한몫했을지 모른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언론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다행이다. 지금까지 변변한 언론 보도 하나 없어, 반올림의 투쟁을 알리거나 피해 노동자들을 찾아내는데 몹시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 언론들이 발암물질 사용이나 사측의 과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문제다. 구체적으로 어떤 발암물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알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언젠가는 밝혀내야 할 문제겠지만, 지금 이런 식의 접근은 삼성전자 직업성 암 피해 노동자들과 반올림의 투쟁에 백해무익하다. 이 글을 통해 반올림의 핵심 요구와 그에 따른 쟁점들이 제대로 알려지길 바란다.
즉각 산재 인정하라는 요구의 절실함
피해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절대로 직업병이 아니다’라는 회사의 거짓말, 치료비를 지원하겠다는 회유, 혹은 삼성에 몸담고 있는 친인척에게 불이익이 갈 지 모른다는 불안 등 몹시 어려운 여건에도 산재신청을 결심했다.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자식과 배우자가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투병하다가 끝내 세상을 등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던 마음의 고통만이 아니다. 치료비에만 적어도 수천만 원이 드는데다가, 가족들 중 건강한 사람들조차 간병하느라 돈을 벌지 못한 채 몇 달 혹은 몇 년을 버텨야 한다. 특히 피해 노동자들 대부분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처지임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신속한 산재 인정은 반올림의 핵심 요구다. 물론 발병 원인을 철저히 조사해서 미래의 피해를 예방하라는 것도 반올림의 주요 요구다. 하지만 암은 완전한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삼성반도체 피해 노동자들은 산재 판정을 위해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을 기다려야 했다. 2008년 4월에 산재보상을 청구했던 온양공장 백혈병 피해 노동자 박지연 씨도 꼬박 1년을 기다린 후에야 결론을 통보받았고, 그나마 업무관련성에 대한 근거 불충분으로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박지연 씨는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지난 3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산재 판정이 이토록 오래 걸린 까닭은 업무 관련성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며 근로복지공단과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시간을 끈 탓이었다. 그 동안 투병 중이던 노동자들의 가정 경제는 붕괴했다. 삼성전자 LCD공장 뇌종양 피해 노동자 한혜경 씨의 경우, 소득이 전혀 없어 재활 치료는 꿈도 꾸지 못한다. 그 결과 몇 달 사이에 근력과 신체 기능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조차 없게 되었다. 게다가 당장 기초적인 의식주 문제조차 해결할 수 없는 형편이라 하루하루 절망이 깊어만 가고 있다.
산재보험의 취지는 일하다 병들거나 다친 노동자들의 치료와 생계를 위해 신속하게 보상하는 것인데,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이유로 이토록 시간을 끌어야 한다면 과연 제도의 취지를 제대로 살려 신속하게 보상받을 수 있는 암 환자는 몇이나 되겠는가.
업무 관련성 평가를 둘러싼 쟁점
산재 인정 문제에서 또 하나의 쟁점은 증거를 찾는 과정, 즉 업무 관련성 평가 과정에 있다. 근로복지공단이 산안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하 산보연)에 업무 관련성 평가를 의뢰하면 산보연은 이에 따라 역학조사를 실시한다. 이때 역학조사는 피해 노동자가 암 유발 요인에 노출되었는지, 그 노출이 상당한 수준인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방식의 작업환경 평가로는 직업성 암의 업무 관련성을 가늠할 수 없다.
삼성전자의 사례를 보자. 뇌종양 환자 한혜경 씨는 납이 함유된 솔더크림을 사용하며 인쇄회로기판을 제조했지만, 그녀가 일했던 LCD공장은 아예 다른 업체로 설비가 팔려나가 공정 자체가 사라졌다. TCE를 맨손으로 만지며 반도체칩 마무리 공정에서 일했던 백혈병 환자 김옥이 씨가 기억하는 1990년대의 작업환경은 지금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바로 옆의 도금공정에서 일하던 림프종 환자 송창호 씨의 작업장도 마찬가지다.
비교적 최근에 일했던 다른 피해자들도 몇 년 사이에 공정설비가 바뀌었거나, 예전에는 없었던 환기 장치나 개인 보호구 등이 추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암물질 노출에 대한 근거는 과거 작업환경에 대한 기록, 유사 업종에 대한 연구 문헌, 그리고 당사자나 동료 노동자들의 진술을 통해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회사는 과거 작업환경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보존하지 않고 있거나, 기록이 있더라도 발암물질과 관련된 정보는 갖고 있지 않았다. 고의로 숨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반도체 산업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이나 구체적인 작업환경에 대한 문헌 정보는 국제적으로도 매우 빈약하다. 전자산업은 18개월마다 제품의 성능을 2배씩 발전시킨다는 ‘무어의 법칙’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도체 공정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며, 그에 따라 제조 설비는 물론 소위 ‘레시피’라고 부르는 화학물질 사용 양상도 수시로 변화한다.
한마디로 문서를 통해서는 과거에 발암물질에 노출되었음을 입증할 수도, 노출되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도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문제는 이 상황에 대한 해석이다. 산보연과 근로복지공단은 과거 발암물질에 노출되었음을 입증할 수 없다는 해석만을 채택했다.
결국 남는 것은 당사자와 동료 노동자들의 진술이다. 하지만 산보연과 근로복지공단은 이들의 진술에 대한 회사의 반박을 신뢰했다.
작업장에서 납땜 냄새가 하루 종일 진동했고, 고열로 납땜을 마친 회로기판을 검사하느라 얼굴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아야 했다는 한혜경 씨와 동료의 진술보다는 국소배기장치가 잘 되어 있어 노출수준이 낮았다는 회사의 주장을 근거로 삼았다.
바쁠 때는 반도체 구조 검사용 X선 발생장치를 끄지 않은 채 설비에 제품을 넣거나 빼고는 했다는 박지연 씨의 진술보다는, 문을 열면 X선 발생이 저절로 멈추므로 절대로 노출이 일어날 수 없다는 회사의 주장을 채택했다(얼마 전 박지연 씨의 장례식장에 찾아온 그녀의 옛 동료들은 이런 정황을 전혀 모르는 채 ‘최근 회사에서 설비 도어를 열기 전에 반드시 기계를 끄라고 철저히 교육하고 있어서 일이 더 힘들어졌다’라고 푸념을 하기도 했다).
작업환경 측정은 어떤가. 설비와 공정 기술이 변하고 그에 따라 사용 물질이 바뀐 공정, 예전에 없던 환기 장치가 생기고 개인 보호구가 지급된 상태에서 몇 시간 동안 공기 중 농도를 측정한 뒤 ‘허용기준 이하이므로 업무관련성이 낮다’라고 결론내린다.
간헐적인 순간 고농도 노출은 아예 평가조차 되지 않으며, 실제 작업환경과 다르다는 당사자들의 주장은 묵살된다. 심지어 이미 사망한 노동자들의 경우 이런 문제제기조차 할 여지가 없다. 얼마 전 모 신문을 통해 삼성반도체 퇴직 엔지니어는 ‘외부에서 방문할 경우 통상 쓰던 화학물질을 아예 치우기도 한다’라고 고백했다.
이런 문제들을 방지하기 위해 피해 당사자 혹은 추천인의 참여를 요구했지만, 조사 과정에서 확보한 자료들을 열람할 수조차 없었다. 힘겨운 투쟁을 통해 허락받은 것은 고작 형식적인 입회가 전부였다. 그나마 조사 당시 생존해 있고 건강이 허락하는 당사자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일방적으로 회사 편에서 진행되는 작업환경 평가를 통해 발암물질을 찾아낼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피해자들에게 증거를 요구하기 전에 생존권을 보장하라
반올림의 요구에 회사와 정부가 줄곧 ‘증거를 내놔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놓은 이유는 증거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2년 이상 침묵해오던 삼성전자가 산재 신청자 7명 전원이 불승인 판정을 받은 뒤 갑자기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기흥공장 일부 라인을 언론에 공개하고, 작업환경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하겠다고 공언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지금 투병 중이거나 투병 끝에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속한 보상이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기 위한 철저한 조사는 너무도 중요하지만, 이를 악용하여 기존 피해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짓밟아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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