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꼭 십년 전, 그러니까 1993년도에 "엄마의 바다"라는 TV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인 김혜자와 고현정과 고소영 자매, 유복하던 세 모녀의 삶이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갑자기 가난 속으로 추락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지요.

왜 난데없이 드라마 얘기냐구요? 사업가였던 그 집안의 아버지가 사업에 문제가 생기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심장마비로, 즉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죽었거든요. 딸들이 혼기 꽉 찬 아가씨들이었으니, 이 아버지는 50대 초반 정도였을 겁니다. 1993년의 드라마에서는 50대 남성의 죽음, 그게 참말로 어이없고 불쌍한 일이던 것이지요.

그 즈음부터였던가요. YS의 신한국 건설과 대기업들의 신경영전략을 앞 다투어 떠들어주던 신문과 방송 한 켠에 '40대 가장이 과로사로 쓰러져간다'는 기사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 말입니다. 그 뒤로 우리나라 40대 남성의 사망률은 세계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지요.

요새는 어떤가요. 며칠 전 신문에는 '과다한 업무… 명퇴 스트레스…30代도 과로로 쓰러진다'는 기사가 실렸더군요. 이제 40대의 과로사는 당연한 것이고, 30대도 위험하다는 겁니다.

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지난 십 년 동안 병원도 많아졌고 의학도 발달했고 사람들의 평균 수명도 늘어났는데, 어째서 정작 열심히 일해온 우리 노동자들은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속절없이 쓰러져가는 걸까요? 그것도 점점 젊은 사람들이 쓰러지게 되는 걸까요?




어떤 사람들은 주40시간 근무를 하거나 주5일제가 도입되는 걸 보면 부분적으로나마 노동강도가 줄어들고 있는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이 곧 노동강도를 줄이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더 집중해서 더 열심히 일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노동강도가 높아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고용불안은 또 어떤가요? '평생직장'이라는 말은 이제 석기시대 유물보다 더 오래된 말이지요. "자식 시집장가 보낼 때까지는 일해야지"라고 말하면 사치스러운 바램이고, 요새는 '사오정(45세 정년)'이라는 둥, '삼팔선(38세가 되면 해고될 위험이 높아진다는 말)'이라는 둥, 정말 살벌한 말들이 유행입니다.

그러니 노동자는 짤리지 않으려고 더 아둥바둥 열심히 일하거나, 아니면 언제 짤릴지 모르니 한 푼이라도 더 벌어두자는 마음에 잔업·특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결국 해고에 대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스트레스까지 쌓여가는 것이지요.

이처럼 노동자가 견뎌내야 할 노동강도와 스트레스는 날로 커져왔지요. 고도의 노동강도와 고용불안, 노동통제로 인한 스트레스, 바로 이것들이 뇌심혈관계 질환의 주범이랍니다.

요즘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신문과 방송에서는 뇌심혈관계 질환을 조심하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뇌심혈관계 질환은 특히 겨울철에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조심하라고 하던가요? 담배를 끊어라, 운동을 해라, 체중을 줄여라… 심지어 '스트레스를 받지 마십시오'라고 충고하기까지 합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못하나요? 저는 이런 충고를 들을 때면 약이 바짝 올라서 이러다가 뇌심혈관계 질환에 걸릴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약이 올라도 모두 맞는 말씀이니 우리 모두 담배도 끊고 운동도 열심히 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그러나 금연과 운동을 위한 노력보다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마른 걸레 쥐어짜듯' 노동자의 육체적·정신적 힘을 최대한 쥐어짜는 노동현실을 바꾸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노동자의 뇌심혈관계 질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예방 대책입니다.

 

 

[노동자가 만드는 일터 2004년 1월 / 통권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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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0 21:34 2005/01/10 2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