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만에 찾아온 무더위였다지요. 십 년만이건 백 년만이건, 올 여름 더위는 정말 지독했던 것 같습니다.
더위도 더위지만, 저는 여름 내 텔레비전 때문에 약이 바짝 올랐습니다. 하루는 더위에 지친 한낮의 도시 풍경을 보여주고는 계곡과 해수욕장을 보여주면서 피서 가라고 유혹하더니, 다음 날은 인파로 발 디딜 틈 없는 피서지와 물놀이 사고 소식을 보여주면서 피서 가봤자 고생만 한다고 약을 올리고, 또 다음 날은 1200도를 넘나드는 용광로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보여주면서 이 정도 더위는 참아보라고 기를 죽이더군요.
헌데 가만 생각해보면, 시뻘건 쇳물이 끓는 제철소야말로 더위의 주범입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온 세계가 유래 없는 무더위, 폭우, 가뭄 따위에 몸살을 앓게 된 이유가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들 하잖아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바로 화석 연료, 즉 석탄이나 석유를 한꺼번에 대량 사용하는 기업들인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철강 기업이라더군요.
그런데 이런 얘기는 하나도 해주지 않고, 그 제철소에서 진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오늘도 이들은 더위를 잊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라니요. 사실, 제철소를 비롯하여 고온의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더위를 잊고 '열'심히 일할 수 있기는커녕, 무더위와 무지막지한 노동강도에 '열'받고 짜증나거나, '열'경련, '열'탈진, '열'사병 등 건강을 해치거나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있는데 말입니다.
주변의 온도에 따라 체온이 자유자재로 오르내릴 수 있는 악어나 뱀 따위의 변온동물과 달리, 사람은 일정한 체온을 유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항온동물입니다. 항온동물은 주변이 추우면 몸 속의 영양분을 사용해서 열을 만들고, 주변이 더우면 땀을 흘려서 몸을 식히게 되지요. 그런데 오랜 시간동안 더운 곳에서 힘들게 일하느라 땀을 너무 많이 흘리거나, 더 이상 땀으로 체온을 식히지 못하면 열경련, 열탈진, 열사병 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열경련이란, 땀을 많이 흘리느라 전해질(소금 성분을 비롯한 우리 몸 속의 이온들)이 부족해져서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몹시 아픈 병입니다. 이럴 때는 소금물이나 이온 음료를 충분히 마시고 시원한 곳에서 푹 쉬면 곧 회복될 수 있습니다.
열탈진이란, 말 그대로 너무 더운 곳에서 일하다가 탈진해서 쓰러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열경련과 마찬가지로 땀을 통해 전해질과 수분을 너무 많이 잃어버린 것이 문제이지요. 대개 이럴 때는 자기 힘으로 소금물이나 이온 음료를 마시기 힘들기 때문에 수액 주사를 놓아서 치료를 하게 되고, 몇 시간만 주사를 맞으면 곧 정신이 돌아오고 기운을 차리게 됩니다.
열경련이나 열탈진은 별다른 후유증 없이 회복되는 가벼운 문제이지만, 열사병은 열경련, 열탈진과 달리 목숨을 잃을 만큼 위험한 병입니다. 열사병은 더위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참고 일하느라 더 이상 땀을 흘릴 수도 없을만큼 수분과 전해질을 많이 잃어버려서 생깁니다. 더운데도 땀을 흘릴 수 없으니 체온이 점점 올라가고, 높은 체온 때문에 뇌손상이나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열사병으로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오는 환자들 중에서 체온이 40도를 넘는 경우에는 약 절반 정도가 사망할 정도로 위험한 상태입니다.
만일 더운 곳에서 일하던 동료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몸에 땀이 별로 없다면 땀도 흘릴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태, 즉 열사병을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시원한 곳에 옮겨서 소금물이나 이온 음료를 먹여도 소용이 없고 옷을 벗기거나 부채질을 해주어도 땀이 나지 않기 때문에 체온을 낮출 수가 없으니, 얼음으로 문지르는 등 최대한 체온을 낮추어 주면서 신속하게 병원 응급실로 옮겨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업 환경이 몹시 더운 사업장의 경우에는 노동자가 ‘더위를 잊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휴식 시간을 더 자주 배치하고, 노동자가 충분히 수분과 전해질을 보충할 수 있도록 넉넉히 공급하고, 시원한 휴식 공간을 제공할 의무가 사업주에게 있답니다. 그리고, 더위 속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열사병으로 쓰러지거나, 단순히 삭신이 쑤시거나(열경련) 기운이 빠져 잠시 쓰러진다고 해도(열탈진), 그것은 당연히 모두 노동재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까 얘기했던 제철소 노동자들 뿐 아니라 수많은 금속 사업장의 주물 노동자, 한낮의 뙤약볕 아래서 더위를 피할 길 없이 일해야 하는 건설, 철도나 도로 보수 작업, 기타 여러 직종의 노동자들이 모두 여름 내내 참기 힘든 무더위와 싸워왔을 것입니다. 사실, 참을 수 없이 더울 때는 참지 말고 쉬는 것이 정답일텐데, 여태까지 별 수 없이 복날 삼계탕으로 잠시 더위를 잊으려 애써왔던 것이 우리네 사정입니다.
이렇게 더위 때문에 건강이 상하는 노동자가 있는가 하면, 한여름 폭염 속에서 에어컨이 너무 빵빵하게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일하느라 병에 걸리는 노동자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냉방병'이라는 말까지 만들어지겠습니까.
냉방병은 아주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제일 흔한 증상은 두통이나 피로감, 전신이 욱신거리는 느낌인데, 이것은 팔다리의 체온이 내려가서 혈액순환을 방해하거나 자율신경계가 혼란스러워져서 생기는 증상입니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 속에서 오랫동안 숨쉬기 때문에 감기 등 콧구멍, 목, 기관지에 염증이 생기기도 쉽습니다. 에어컨 냉각수를 잘 관리하지 않아서 세균으로 오염되면 여러 사람이 단체로 폐질환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런 냉방병은 은행, 백화점, 대형 매장이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주 걸립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업장에서는 "냉방을 할 때는 실내와 바깥의 온도 차이가 너무 크지 않도록 하고, 한시간마다 환기를 해야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라는 상식을 무시하고 노동자의 건강이나 편안함보다는 매장을 찾는 손님들에게 주는 이미지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에게 더 시원한 느낌을 주어 더 많은 상품을 팔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냉방을 하고, 그 결과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손님들은 시원하게 느낄지 몰라도 하루 종일 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냉방병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더워서 죽는’ 위험이 꼭 더운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몇 년 전부터 뉴스에서는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외신 기사를 보도하고는 하는데, 그럴 때 보면 꼭 노동자, 빈민, 노인, 어린이, 환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더위를 견딜만한 냉방 장치나 적절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하여 목숨을 잃더군요. 앞서 말했듯이 제철산업 자본 등의 욕심 때문에 지구 환경이 파괴되어 공포스러운 무더위가 발생하는데,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 계급과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되고 있으니, 정말 억울하고 약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늦었지만 자본가들에게 이 얘기는 꼭 해주고 싶습니다.
“이놈들아, 내 더위 다- 가져가라! 평생 말이다!”
[노동자가 만드는 일터 2004년 9월 / 통권 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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