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비

from 콩이 쓴 글 2005/01/10 21:58
이번 호에서는 좀 냄새나는 얘기를 해볼까 해. 변비. 혹시 식사 직전이라면 밥 다 먹은 다음에 읽도록 하자. 아 그리고 왜 반말이냐고? 별 뜻은 없고, 그냥 친구처럼 편하게 얘기해보고 싶어서.

변비를 한자로 便秘라고 쓰더라구. ‘똥이 비밀스럽게 숨어있다’는 건데, 요렇게 숨어있는 똥은 숙변(宿便, 자고 있는 똥)이라고 불러. 한마디로 똥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대장 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거지. 그런데 똑같은 것을 보고도 서양 사람들은 좀 다르게 생각했었나봐. 변비를 영어로는 콘스티페이션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꽁꽁 뭉친다’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거래. 똥이 대장 속에 오래 머물다 보면 꽁꽁 뭉쳐서 단단해지니까 요걸 표현한 말이겠지. 동양 사람들은 똥이 숨어서 잠을 자는 ‘과정’에 대해 표현하는 반면에 서양 사람들은 똥이 단단하게 뭉쳤다는 ‘결과’에 주목했던 것 같아.

좌우간 동서양을 막론하고 변비는 참 흔한 병이야. 우리나라 전체 인구를 다 뒤지면 1,000명 중 20명 정도는 변비가 있대. 특히 젊은 여성들이 많이 걸린다고 하더군. 20대 초반 여성의 만성질환 중에는 3위(1,000명당 42명 꼴)이고, 20대 후반 여성의 만성질환 중에서는 5위(1,000명당 33.5명 꼴)라고 하니, 나름대로 상위권 맞지?

이렇게 흔한 병이지만 변비 때문에 병원에 가본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하지만 예전에 없던 변비가 갑자기 생겼다면 한번쯤 의사를 만나보는 게 좋을 거야. 대장이나 직장, 항문에 병이 나거나 신경/근육 쪽에 문제가 있을 때 변비가 생길 수 있으니까.

물론 대부분은 별다른 원인이 없는 단순 변비일 가능성이 커. 단순 변비는 병원에 간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굳이 치료받으러 병원에 다닐 필요는 없어. 변비의 진단도 특별한 검사를 하지 않고 환자가 느끼는 증상에 따라서 하거든. 그럼 여기서 변비의 진단기준을 소개할 테니까 내가 과연 변비 환자인지 아닌지 점검들 해보라구.


흔히 똥누는 횟수가 적으면 변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런 건 아니거든. 일단 똥이 물렁물렁하면, 아무리 똥누는 횟수가 적더라도 변비라고 부르지 않아. 그리고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있어서 변비와 설사가 왔다갔다하는 경우에도 변비로 진단하지 않지. 변비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다음 여섯 가지 증상 중에 두 개 이상이 있고, 지난 1년 동안 증상이 있었던 날을 모두 합하면 총 12주, 즉 석 달 정도의 기간이 되어야 해.
1. 4번 중 1번 이상은 똥눌 때 힘이 많이 든다.
2. 4번 중 1번 이상은 똥이 울퉁불퉁하거나 딱딱하다.
3. 4번 중 1번 이상은 똥을 다 누고 났는데도 덜 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4. 똥눌 때 4번 중 1번 이상은 항문이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5. 4번 중 1번 이상은 똥을 누기 위해 손으로 항문 주위를 누르거나 손가락으로 파야 한다. (많이 힘들겠지... ^^;)
6. 똥누는 횟수가 매우 적다.(1주일에 3회 미만)

많은 질병들이 그렇듯이 변비도 딱 부러지는 원인은 없어. 흔히 불규칙하고 섬유질이 부족한 식습관, 운동 부족, 스트레스 등 현대산업사회의 특징들이 변비의 주범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이거야 원, 당장에 ‘현대산업사회’를 갈아엎을 수도 없고... 그래서 치료도 참 어렵지. 제 아무리 전문가라 하더라도 “물을 많이 드세요” “운동을 하세요”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세요” “매일 아침마다 화장실에 가세요” “섬유질을 많이 드세요” 정도의 뻔한 말과 함께 몇 알의 변비약을 쥐어주는 것이 전부니까. 쉽게 말해서 개인의 생활 습관을 바꾸고 스트레스를 풀라는 건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야?

그런데 생활 습관 바꾸기가 어려운 일이라고 짐짓 포기해버린 채 변비약에만 의존하진 말라구. 변비약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야. 대장의 운동성을 늘려주거나 장 속의 내용물을 큼지막하게 부풀려주는 것. 이 중에서 대장 운동성을 늘려주는 약들은 너무 장기간 사용하면 오히려 대장 기능이 더 나빠진대. 하도 약을 먹으니까 결국 약이 없으면 대장이 아예 움직이지 않게 되는 거지. 이런 약은 한 번 먹으면 몇 시간 내로 배가 뒤틀리듯이 아프고 밤새도록 화장실에 들락거리게 될 정도로 효과가 좋지. 하지만 부작용을 잊지 말고 꼭 필요할 때 어쩌다 한 번 먹는 정도로만 사용하라구.

변비가 있으면 쪼그려 앉는 변기가 참 싫지. 5분만 지나면 다리도 저리고, 힘은 힘대로 들고, 그러고도 시원하게 비우질 못하니 그게 참 고역이거든. 그런데 그보다 더욱 곤란한 것은 공중화장실이야.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계속 문을 두들겨대면 그야말로 나오던 똥도 도로 들어갈 형편이잖아.

특히 여성들은 공중화장실 숫자가 턱없이 부족해서 한 칸을 오래 차지하고 앉아있기가 무척 부담스러워. 어린 시절부터 화장실이 부족한 학교(심지어 여학교에도 여자화장실이 모자라거든.)에서 시간에 쫓겨가며 일을 봐야했지. 그래서인지 집 밖에서 아예 똥을 누러 가지 않는 습관이 배어있는 여성들이 참 많더라구. 젊은 여성들에게 변비가 많은 까닭은 혹시 여성 화장실의 부족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봄직 하지?

그러면 우리 일터의 화장실은 어때? 숫자가 모자라거나 너무 더러운 문제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노동자가 똥마렵다고 바로 화장실로 가서 일을 볼 수 있는 일터가 몇 군데나 될까? 라인을 타던 노동자가 “똥 누고 올 동안 기계 좀 세웁시다”라면서 마음 편히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을까. 은행 등에서 창구 업무를 보는 노동자가 (앉아서 일하는 것 자체가 변비에 좋지 않은 데다가) 창구 앞에 줄지어 선 고객들에게 “저 화장실에 다녀올 동안 기다려주세요. 변비라서 좀 오래 걸릴 겁니다”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열차, 택시, 버스 등 운수 노동자들이 지정된 시간과 장소 이외의 곳에 차를 세우면서 승객들에게 “제가 똥이 마려우니 잠시 쉬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에 현대삼호중공업의 엽기적인 소식 들어봤어? 쉬는 시간, 식사시간을 1분이라도 어기면 바로 적어두었다가 임금에서 깐다고 하더라구. 변비 환자들은 어쩌라는 거야. 쉬는 시간을 어기지 않도록 ‘나오던 똥도 끊고’ 일어서라는 거야 뭐야. 본래 주어진 휴식시간에도 마음 편히 화장실에 앉아있기 어려운 노동자에게 규칙적인 생활과 스트레스 해소로 변비를 예방한다는 게 도대체 가능한 일이냐구.

이런 심리적 부담, 초조함, 짜증 등이 모두 장 기능을 더욱 저하시키는 스트레스인 거야. 게다가 이렇게 ‘나오던 똥도 도로 들어가는’ 분위기에서는 자기 스스로 되도록이면 집 밖에서는 화장실에 안 가려고 노력하게 되지. 사실 변비 환자들은 신호가 올 때 얼른 가서 똥을 누어야 해. 그 때를 놓치면 곧 변의(便意. 똥을 누고 싶다는 느낌)가 사라지게 되어 숙변이 더욱 심해지고, 다음 번 똥을 눌 때 훨씬 더 힘들게 되거든. 결과적으로 자본가들은 ‘똥 쌀 시간’조차 아껴서 노동력을 쥐어 짤 수 있으니 신이 날 테고, 그 대가로 노동자들의 변비는 점점 심해지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변비야말로 ‘사회의 병’이라고 생각해. 물 적게 마시고 운동 안 하고 불규칙하게 밥을 먹어서 걸리는 병이 아니라, 학교나 일터에 화장실도 부족하고 쉬는 시간도 모자라서 생기는 병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국가 차원에서 학교와 일터에 공중화장실을 더 늘리고, 학생과 노동자에게 휴식 시간도 넉넉하게 주고, 무엇보다 이런저런 스트레스 안 받을 수 있도록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해 주어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아직은 변비를 가진 노동자들이 적어도 몇 개월이나 몇 년, 길면 거의 한평생을 변비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야. 우리 좀 더 열심히 투쟁해서 변비 없는 세상 좀 만들어 보자구.

 

 

[노동자가 만드는 일터 2004년 12월 / 통권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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