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남이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고 가다가 기름을 넣으러 주유소에 가본 적이 한번씩은 있을 겁니다.
주유소 노동자들의 업무는 물론 ‘주유’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정말 많은 종류의 일을 하고 있지요. 주유소 입구로 자동차가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자동차를 안내하고, 기름을 넣고, 기름값 거스름돈이나 영수증, 사은품 따위를 가져다주는 일은 물론, 차창을 닦거나 세차를 하고, 수시로 쓰레기통을 비우거나 화장실 등 주유소 안팎을 청소하는 일도 이들의 업무입니다.
주유소에서는 휘발유, 경유 뿐 아니라 각종 세정제, 연료 첨가제 따위의 유기용제를 일상적으로 다루고 있으니, 아무래도 건강에 해롭겠지요. 이런 유기용제들은 쉽게 증기가 되어 아주 작은 입자들로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숨을 쉴 때 공기와 함께 호흡기로 들어옵니다.
휘발유만 하더라도 대략 150~200가지의 화학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휘발유의 증기는 부탄/펜탄 등 알코올계열 물질들이 95%를 차지하고, 2% 이하의 적은 양이지만 벤젠/톨루엔/크실렌 등의 방향족 탄화수소도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밖에 휘발유를 만들 때 원유 이외의 여러 첨가물들이 함께 섞이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납입니다. 물론 납이 환경과 건강에 안 좋다고 알려진 뒤로는 납이 들어가지 않은 ‘무연 휘발유’를 사용하고 있지요. 하지만 휘발유에 첨가되는 화학 물질들이 정확히 무엇무엇이며, 그 물질들이 과연 건강에 어떤 악영향을 주는지 미처 밝히지 못한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주유소가 도로 바로 곁에 있는 터라, 주유소 근처의 공기에는 자동차 배기가스가 뒤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운전이나 배달을 하느라 하루 종일 도로에서 보내는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주유소 노동자들도 온종일 이런 공기를 마시면서 일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물질들은 눈, 코, 목구멍 등의 점막을 자극하거나, 주로 호흡기를 통해 몸으로 들어옵니다. 그나마 고농도의 오염물질을 들이마실 위험은 적지만, 낮은 농도라 해도 장기간 노출되면 몸에 해롭다고 하지요.
주유소 노동자들은 크고 작은 사고의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제일 큰 사고의 위험은 화재이겠지만, 하루에도 수백 대의 차량이 들락거리는 주유소 앞마당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부딪히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지요. 게다가 사방이 뻥 뚫려 있는 곳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일하다보니 취객, 강도, 손님이나 심지어 직장의 동료나 상사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일도 흔합니다.
미국의 경우, 1980년대에 16-17세 사이의 청소년 노동자들의 사망재해 원인 중 첫번째는 교통사고이고 두번째는 배달/건설/주유소 근무 과정에서의 각종 사고, 세번째는 기계와 관련된 사고나 폭력/폭행에 의한 사망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올해 초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조사한 결과, 아르바이트 노동자 가운데 무려 34%가 성추행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조사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자들 중 30%는 시간 외 근무를 강요받았고, 28%는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임금을 받아야만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기본권은 말 그대로 땅에 떨어진 상태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밥먹듯이 일어나는 걸까요?
주유소 노동자들 중 상당수는 비정규직입니다. 특히 단기간 아르바이트직으로 청소년들을 많이 고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은 2교대로 하루에 9시간씩 주6일을 일하고 월 1백만원 안팎의 임금을 받습니다. 물론 이것은 공식적인 구인광고에서 하는 소리이고, 방학이 되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 학생들이 많아지면 임금은 더욱 낮아집니다.
막상 취직이 되면 말이 좋아서 주유 서비스지, 사실은 청소부터 시작해서 갖은 잡심부름까지 시키는대로 해야 합니다. 임금도 지각을 한 번 했다는 둥 손님에게 불친절하여 불만이 접수되었다는 둥 말도 안 되는 핑계로 깎이거나, 애초에 약속했던 것보다 적은 액수를 주기까지 합니다. 수당이나 보너스는 당연히 없고 오히려 아무 대가없이 억지로 시간외 근무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유소에서는 나이 어린 청소년이나 학생 아르바이트를 뽑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노동권에 대해 배울 기회도 없었고, 어디에 하소연할 길도 알지 못합니다. 설령 부조리함을 느끼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단기간 아르바이트로 들어온 대다수의 주유소 노동자들은 ‘더러워도 몇 달만 버티자’ ‘며칠만 더 참다가 월급은 받고 나가자’고 참기 일쑤입니다.
기본 노동권을 박탈하되, 노동자가 저항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정유회사들이 주유소 노동자로 나이 어린 아르바이트생들을 대거 활용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런 고용 정책은 다른 회사, 다른 주유소와의 고객 유치 경쟁에서도 자본가에게 대단히 유리한 상황을 줍니다.
정유회사들이 이익을 늘리려면 다른 주유소의 단골 손님들을 빼앗아야 합니다. 자동차를 모는 사람들의 수는 거의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대부분의 주유소들은 고객에게 만족, 기쁨, 감동을 준다면서 서비스 경쟁을 합니다. 그런 서비스 경쟁을 위해서는 경품 행사/할인 행사 등 달콤한 유혹으로 구매자의 눈과 귀를 홀리는 방법도 있지만, 가장 값싸고 효과적인 방법은 주유소 노동자들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손님이 주유소에 머무르는 단 몇 분 동안 최대한 기분 좋을 수 있도록 좀 더 큰 몸짓과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걷지 않고 뛰어 다니고, 기름을 넣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차 유리나 백미러를 걸레로 닦도록 시키는 것이지요.
예전에 어떤 정유회사에서 ‘주유소에 가면 내 여자가 있다’는 광고를 한 적이 있었는데 혹시 기억나세요? 생일이나 기념일에 자기 회사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으면 축하 나팔도 불어주고 폭죽도 터뜨리면서 특별 서비스를 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생일이며 이런 저런 기념일을 챙겨주는 사람을 일컬어 ‘내 여자’라고 하는 성차별적인 발상도 참 언짢았는데, 게다가 노동자들로 하여금 생면부지의 손님 생일까지 요란을 떨면서 축하하도록 강요하면서 ‘고객 감동’을 주겠다는 어이없는 발상에 몹시 불쾌했던 광고였지요.
하지만 오늘도 정유자본의 이윤을 위해 주유소 노동자들은 더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도록 교육받고, 인격 무시와 폭언/폭행에도 미소로 답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손님을 가장한 모니터 요원이 언제 찾아와서 자신을 평가할지 모르고, 그에 따라 하루 아침에 해고당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말입니다. 심지어 요즈음 어느 정유회사에서는 다른 서비스 직종에서 고객을 ‘모셔본’ 경험이 있는 ‘젊은 여성’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주유소에 들를 때마다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볼 일입니다. 우리는 ‘고객’과 ‘알바생’이 아니라, 같은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는 평등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노동자가 만드는 일터 2004년 8월 / 통권 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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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유~~ 어딜가나 일상적인 착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인지 이젠 제 감각도 무디어져 가는 것 같아요. 도심에서 매일마다 마주치는 사람들인데, 별 생각없이 지나쳐왔다니...
자일리톨께 - 그러게요. '예민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가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