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삼월. 눈도 좀 오고, 지진해일 걱정도 좀 했지만, 그래도 봄은 왔습니다. 시월엔 비 한 번 내리고 나면 겨울이 성큼성큼 다가오지만, 삼월엔 비 한 번 뿌리고 나면 나뭇가지에 새순이 푸릇푸릇 돋아나지요. 봄이 좋긴 좋아요.

이 오면 밤은 짧아지고 낮은 점점 길어지지요. 지구에 와 닿는 태양의 에너지도 많아지고, 그 에너지를 받은 지구의 환경이 변화합니다. 눈과 얼음이 녹아 강이 불어나고, 겨우내 건조하고 메말랐던 공기가 촉촉해지고, 바다의 온도가 오르면서 해류가 바뀌고, 땅과 바다의 온도와 습도가 변하면서 지구를 휘도는 바람과 구름이 변합니다. 마치 지구 전체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듯 서서히, 그러나 아주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지요.

그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조시간, 즉 하루 중 태양이 비추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점입니다. 낮이 길어지는 것은 지구에 와 닿는 태양의 에너지가 그만큼 많아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구에 커다란 보일러가 가동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눈이 녹고, 기온이 올라가는 근본 원인은 바로 이 보일러 때문이지요.

지구 상의 생물들은 이렇게 거대한 지구 환경의 변화 속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적응을 합니다. 나무등걸 속에 틀어박혀 잠만 자던 곰들이 자명종 없이도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겨우내 따뜻한 땅속에서 웅크리고 있노라고 바깥의 변화를 전혀 볼 수 없었을 벌레들도 알아서 땅위로 올라오고, 우왕좌왕 몰려다니는 것만 같던 철새들도 단 며칠 사이에 칼같이 제 길을 떠나는 것을 보면, 자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달력이나 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대대적인 자연의 변화 속에서, 수많은 생물들의 변화 속에서, 사람의 몸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우리의 몸은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시계에 맞추어 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구 상의 모든 생물들이 따라가는 자연의 시계를 돌리는 힘도 역시 태양에 있답니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강하게 태양이 비추느냐에 따라 생명체 하나하나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농사를 짓거나 꽃피우고 열매맺는 식물을 몇년간 키워본 분들은 아실 거예요. 봄과 여름에 일조시간이 짧으면 꽃과 열매가 적다는 것을 말입니다.

식물이 싹을 틔우고 꽃이 피우고 열매를 매다는 일정들을 자연의 시계에 따라 조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도 태양의 변화와 그에 따른 계절의 변화에 따라 변합니다. 봄이 오면서 일조시간이 길어지면 우리의 몸은 ‘이제 왕성하게 활동할 때가 왔구나’하고 감지합니다. 앞으로 더 많이 움직이고 더 오래 깨어있어야 하는 계절이 돌아왔음을 저절로 아는 것이지요. 이를 대비하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이 먹고 더 많은 에너지를 만듭니다. 그래서 대개 봄이 되면 입맛이 왕성해지고 신진대사가 활발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겨우내 움츠려있던 몸 구석구석이 더 왕성하게 움직이다보면 잠도 더 많이 오고 피로가 더 빨리 찾아오게 됩니다. 바로 이런 현상이 이른바 ‘춘곤증’이라는 것이죠. 춘곤증은 질병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에 따라 우리 몸이 적응해가는 과정이자 ‘봄’이 찾아왔다는 증거입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하는 사춘기를 유독 힘겹게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변함에 발맞추어 몸이 적응해야 하는 과도기가 남들보다 견디기 어려울 수 있는 것이지요.

춘곤증으로 불편을 겪는 경우는 크게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몸의 변화가 느려서 남들보다 더 오랫동안 적응기간을 거쳐야 하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몸의 적응이 너무 급격해서 지쳐버리는 경우이며, 세 번째는 자기 몸의 적응은 정상이지만 생활조건이 너무 팍팍해서 힘겨운 경우입니다.

첫 번째 경우처럼 몸의 변화가 느린 사람들은 봄볕이 한창인데도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와 비슷합니다. 자연은 이미 생기가 넘치는 봄이 완연하지만, 자기 몸은 아직 한겨울과 같은 것이지요. 기운도 없고, 입맛도 없고, 날씨가 따뜻해져도 몸에 활력은 돌지 않고 축축 늘어지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별로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2-3주일만 지나면 계절 변화에 충분히 적응하게 될테니까요. 늦잠자는 사람을 자명종으로 깨우듯이 대자연의 자명종을 활용하면 좀더 빨리 적응할 수 있습니다. 대자연의 자명종이란 다름 아닌 봄 햇살입니다. 모든 동식물들이 봄 햇볕에 따라 적응해가듯이 우리 몸도 마찬가지거든요. 여기에 더해서 봄철 나물이나 봄철 과일들을 많이 섭취하면 더욱 도움이 되겠지요. 다만 교대 근무 때문에 생체 리듬이 뒤섞여버린 경우에는 아무리 봄 햇살을 많이 쬐고 제철 음식들을 섭취해도 좀처럼 몸이 적응하기 힘듭니다. 주야 교대 근무로 인해 몸의 질서가 헝클어져서 대자연의 시계에 발맞추지 못할 지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지요.

두 번째 경우처럼 몸이 너무 빨리 적응하는 경우에도 피로가 찾아옵니다. 아직 쌓인 눈이 다 녹지도 않았는데 너무 일찍 겨울잠에서 깨어난 셈이랄까요. 처음 며칠은 활력이 넘치는 듯 하지만, 아직 그 힘을 유지할 만큼 충분한 에너지를 대자연이 공급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 안가 지쳐버리게 됩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충분한 휴식이 중요합니다. 휴대전화를 많이 쓰는 날에는 배터리가 떨어져서 전원이 꺼지지 않도록 평소보다 더 일찍 충전을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평소보다 더 일찍, 더 푹 쉬어주는 것이 지친 몸을 다시 추스르는데 필수적입니다. 겨울엔 안그러다가 봄만 되면 꼭 오후에 잠이 쏟아진다면, 바로 그 때 잠깐씩이라도 눈을 붙이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우리 몸의 배터리가 바닥나기 전에 재충전하는 방법입니다.

춘곤증에 시달리는 세 번째 경우는 자기 몸의 적응 과정은 지극히 정상이지만 생활과 노동 조건에 문제가 있어서 고통을 받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기술직이나, 장시간 휴식없이 일해야 하는 운전직, 서비스직, 컨베어 벨트를 따라 그때그때 휴식을 취하기 어려운 제조업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노동 조건에서는 단 몇주간의 춘곤증이 대단히 고통스럽습니다. 춘곤증 때문에 발생하는 안전사고는 또 얼마나 위험한가요. 그래서인지 시장이나 병의원, 약국 등에서는 ‘춘곤증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을 위한 특판’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리나봅니다. 굳이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봄이 되면 잠을 쫓기 위해 연거푸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들이키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요.

하지만 춘곤증은 ‘쫓아내거나’ ‘극복하는’ 문제나 질병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하는’ 자연의 명령입니다. 긴 겨울을 보내고 새봄을 맞이하는 만물들이 봄의 활기와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 겪는 과도기인 것입니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는 오후 두세 시면 길거리에 강아지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나라의 기후조건이 워낙 나른하기 때문에, 점심 먹고 두어 시간은 남녀노소 누구나 졸음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공장도 사무실도, 길거리의 상점들도 모두 문을 닫고 낮잠을 자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우리나라에는 유독 춘삼월에 춘곤증이 심하니, 그 한달 만이라도 공장과 사무실, 학교에 낮잠 시간을 두면 얼마나 좋을까요. 봄철에 적응이 더딘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와 봄볕을 한시간씩 쬐고, 적응이 너무 빨라서 피로한 사람들은 단잠을 통해 재충전을 하고, 그럼 더욱 활기차고 안전한 봄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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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9 09:57 2005/03/29 0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