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밭을 돌보는 농민의 손길이 바빠지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곡식과 채소를 키워내는 것이 하늘과 땅의 힘이라지만, 곡식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에 커간다는 말처럼 파종부터 수확까지 사람의 노동을 빼놓고는 어느 것도 이루어질 수 없겠지요.
농약 치기
농사일치고 쉬운 것이 없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농약치기는 여러 모로 힘든 일입니다. 무거운 약통이나 약줄(호스)을 둘러메고 일해야 하니 어깨며 허리며 뻐근한 건 물론이고, 숨쉴 때마다 독한 농약이 생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 찝찝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어느 동네에서건 잊을만 하면 한번씩 가슴 철렁한 농약 중독 사고가 일어나지만, 전국의 들판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농민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보호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잘해야 얄팍한 면 마스크 하나 정도겠지요.
농약은 주로 숨을 들이쉴 때 호흡기를 통해 우리 몸에 들어오기 때문에 마스크로 코와 입을 막아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조그만 화분 몇개에 약을 뿌리는 일이라면 모를까, 기다란 논두렁에 제초제를 뿌리거나 넓은 논을 누비면서 살충제를 뿌릴 때는 얇은 면 마스크 한장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오히려 면 마스크를 착용한 채 장시간 일하다 보면 섬유 사이사이로 농약이 배어들어서 약을 더 많이 마실 우려가 크지요.
하지만 면 마스크가 아니라 튼튼한 방독면을 쓰더라도 농약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습니다. 피부로도 흡수가 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농약을 칠 때는 팔다리와 얼굴이 다 가려지도록 긴 옷을 입고, 약을 치고난 직후에는 옷을 모두 벗고 비누로 온몸을 씻어내는 것이 좋습니다.
도시에서도 아파트 단지나 공원의 화단과 가로수를 가꾸고 돌보는 노동자들도 때마다 농약을 집중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봄 여름에 길을 지나다니다 보면 이런 대대적인 방역 작업을 한번쯤 마주치게 되는데, 여기서도 어김없이 노동자의 몸을 지켜주는 것은 하얀 면 마스크 달랑 하나 뿐이더군요. 골프장의 잔디를 가꾸는 노동자나 하루 종일 골프장을 다녀야 하는 경기보조원 노동자들도 농약 중독의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게다가 농약 중독의 위험은 농약을 사용하는 일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닙니다. 농약을 제조하거나 농약 원료를 사용하여 다른 화학물질을 제조하는 공장의 노동자들도 급성이나 만성으로 농약에 중독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가 농약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곡식과 채소, 과일, 우리가 먹는 거의 모든 농산물에는 잔류 농약이 조금씩 남아있게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요새 시쳇말로 '웰빙' 바람이 불면서 농약을 적게 쓰는 유기농 농산물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있다지요.
농약을 적게 쓰면 사먹는 사람들도 마음 놓이고, 농민의 입장에서도 안전하고, 환경의 측면에서도 좋은 일이지만 막상 그렇게 녹녹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농약을 줄이는 만큼 일손이 많이 필요한 반면 수확량은 줄어드는데, 농민들 대부분은 그런 부담을 기꺼이 받아들일만큼의 여유가 없는 형편이니까요. 사먹는 사람들 중에서도 비싼 유기농 농산물을 부담없이 사먹을 만큼 다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것은 아니지요.
아니, 정작 현실은 더 나쁩니다. FTA다 뭐다 해서 농업조차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시장으로 끌려나오고 있으니까요.
악명 높은 몇가지 농약들
우리나라에서는 200여종의 살균 살충제와 75종의 제초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초제 중에서도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이 '그라목손'입니다. '파라쿼트'라고도 부르지요. 그라목손은 나뭇잎에 닿으면 한겨울 낙엽처럼 말라비틀어져 떨어지고, 풀에 닿으면 닿는 족족 말라죽는 '풀약'(제초제)입니다. 잡초들을 없애기 위해 널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라목손은 우리 몸 중에서도 특히 폐에 치명적인 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양에 폭로되면 24시간 이내에 목숨을 잃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아주 적은 양으로도 서서히 폐가 굳어서 결국은 몇일, 또는 몇주 안에 사망한다는 점이지요. 그라목손의 치사량은 체중 1킬로그램당 30밀리그램으로, 그라목손 원액으로 따지면 반 숟가락만 마셔도 사망하게 되는 무서운 농약입니다. 그래서 그라목손 중독을 치료하는 전문가들은 그라목손의 생산과 판매를 아예 금지하지 않는 한, 그라목손으로 인한 사망을 줄일 수 있는 대책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워낙 치명적인 독성을 가진데다가 농촌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농약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례는 대부분 그라목손이 원인입니다. 하지만 우리 농촌에서는 아직도 이 무시무시한 농약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잡초들을 시시때때로 베어냈을 테지만, 지금은 농촌에 일손이 모자라서 일주일만 지나면 수북하게 자라나는 잡초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도 그라목손이 널리 쓰이는 원인 중 하나일 겁니다.
몇일에서 몇주 안에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그라목손과 달리, 오랜 시간 몸속에 쌓여서 서서히 나쁜 영향을 미치는 농약들도 있습니다. DDT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DDT는 유기염소계 살충제로 곤충의 신경을 마비시켜 죽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만한 독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살포하면 좀처럼 씻겨가지 않고 사람이나 동물의 몸 속에 한번 들어오면 오랫동안 축적되어 각종 신체 기능을 방해하며, 동물에게 암을 일으킨다는 부작용이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환경에 오랫동안 잔류하는 문제 때문에 1970년 세계보건기구에서 사용을 금지한 이후,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사용이 중단되었지요.
그 전에는 이, 벼룩, 모기를 박멸하기 위해 집 주변은 물론 내복이나 사람의 몸에 직접 살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말도 안되는 얘기 같지만 불과 사오십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던 일이지요. 지금도 DDT와 비슷한 성분의 디코폴, 엔도설판, 테트라디폰 등의 농약은 급성 독성이 약하다는 이유로 아직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농약이란 말 그대로 농작물을 키우고 보관하는데 쓰이는 여러 종류의 약제들입니다만, 농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쓰인 경우도 있습니다. 제일 유명한 사례가 아마 '에이전트 오렌지'일 겁니다.
에이전트 오렌지는 베트남 전쟁에서 쓰인 고엽제로 악명을 떨쳤지요. 1킬로그램 당 30그램 정도의 다이옥신을 함유하고 있으며, 식물의 성장호르몬을 억제해서 말라죽게 만듭니다. 문제는 식물의 호르몬 뿐 아니라 사람의 호르몬도 교란시킨다는 것입니다. 베트남 참전 군인들은 아직도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걸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농약 사고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혹시 사고로 농약을 마시게 된 경우에는 즉시 병원으로 옮기되, 병원에 가기 전이라도 즉시 토하면 몸 안으로 흡수되는 양을 줄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미 의식이 혼미하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토하다가 더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므로 억지로 토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부식성이 강하거나 석유 성분이 함유된 농약의 경우에도 토하면서 오히려 목 안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토하면 안됩니다.
1999년 대한의사협회 학회지에 따르면 1년에 약 1,700명이 농약을 마시고 목숨을 잃는다고 합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지난 몇 년 간 급성 농약 중독으로 인한 사망은 늘어났을 거라고 하는군요. 왜냐하면 급성 농약 중독 사망 중 음료수로 오인하고 잘못 마시는 사고는 5% 정도일 뿐이며 나머지 90% 이상은 자살을 위해 스스로 농약을 마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자살이 늘어난 만큼 급성 농약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도 늘어났을 거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런 경우엔 농약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무겁게 짐지운 절망이 사망의 원인이겠지만, 이래 저래 농약 걱정 없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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