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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기 외환금융위기의 배경과 의의

이 글은 97년 12월 14일 본 연구소와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가 공동주최한 정세토론회 "한국경제의현황과 노동운동의 대응방향"에서 발표한 글임.


현시기 외환․금융위기의 배경과 의의

 

채만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


들어가면서


1.위기의 배경과 원인에 관한 논의들


2. 위기의 원인과 배경


3. IMF 통제체제와 대응


들어가면서


11월 들어 폭발한 외환․금융위기가 심화되면서 한국 경제는 지금 파국적인 상황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다. 외환 부족으로 원화의 시세는 위기 폭발 이전인 약 2개월 전에 비해서 거의 절반으로 절하되고, 주식지수는 10년 전 80년대 후반의 소위 '3저 호황' 이전의 그것으로 폭락하였다. 신용연계의 파탄과 그에 따른 금융기관의 자금 회수, 또 그로 인한 화폐핍박으로 중소기업은 물론, 공룡과 같은 재벌로 불려 왔던 거대기업 그룹들조차 줄줄이 도산하고 있다.


'한국에서 은행은 파산하지 않는다'는 신화를 깨고 14개의 종합금융회사가 이미 도산 상태에 빠져 있고, 거대 증권회사들도 파산하거나 파산에 직면해 있다. 정부는 예금인출 사태의 표적이 된, 거대 일반은행인 제일은행과 신탁은행의 파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들 은행에 2조 원이 넘는 금액을 긴급 출자하였고, 거듭거듭 '금융 안정화 대책'을 밝히고 있지만, 곳곳에서 예금인출 소동이 벌어지는 등 금융공황은 속히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각 은행의 경영자들이 모여 기업어음의 만기일을 2개월 연장해주기로 합의하고, 한국은행은 일부 금융기관의 파산으로 부실채권화된 시중은행의 콜자금을 보전(補塡)하고 금융기관의 자금부족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12월 12일에 11조 원이라는 거액을 시중은행 등 금융기관에 긴급 공급하고 있지만, 이로써 사태가 호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별반 보이지 않는다.


사태를 폭발시킨 직접적인 계기이지만, 대외적으로는 극심한 외환부족으로 자칫 대외지급 불능사태가 예견되어 11월 21일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구제자금을 요청하기에 이르러, 12월 3일에는 아무튼 IMF와 한국정부 사이에 자금의 수수조건에 합의하여 자금의 일부가 들어오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부족, 외환위기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IMF가 강요하고 한국정부가 수용한 자금지원 조건이 사실상 제국주의적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어서 자본측과 대중의 위기의식이 공히 높아져 있고, 극히 보수적인 국내의 제도언론들조차 '12․3 국치'니, '정축국치'니, '경제신탁통치'니, '경제식민지화'니 하는 등등의 언사를 크게 삼가지 않고 있다. 우호적인(?) 자금지원을 차단하고 사실상 IMF의 뒤에서 강압적 조건들을 주도한 미국의 정부 및 독점자본에 대한 대중의 분노도 높아가고 있다.


석유류 등 주요 생활필수품을 중심으로 물가가 폭등하고 있고, 연쇄적인 도산과 신규 노동인력의 취업난으로 실업이 증대하는 데에다,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대기업들이 현 위기상황을 '정리해고'를 단행할 호기로 삼음으로써 대량의 실업과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 절실한 현실로 돼가고 있다. 그리하여 실업에 대한 위기의식이 전체 노동자계급을 짓누르고 있고, 민중은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 얼마나 그들의 생활을 옥죌 것인지 짙은 불안과 두려움에 감싸여 있다.


그런데 이 파국은 어떻게 온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따지고 보면 우리 정치인, 기업인, 관료들에 대한 외국인들의 '예측불가능'에서 기인"({조선일보}, 97. 12. 12, '만물상')한다는, 정말이지 상식적으로는 예측도 불가능했던 주장에서부터 국민사치․방탕론, 재벌책임론, 김영삼 정권 및 관료의 무능․직무유기론 등등 다양한 주장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논의들은 대개는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략적 의도에서, 혹은 대중을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킬 목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김영삼정권 책임론이 대통령선거 분위기와 얽혀 활발히 주장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사치․방탕론'이, 언제나처럼 권력과 독점자본의 나팔수의 노릇을 하는 교수․기자․기타 사회명망가 등 이데올로그들과 대중언론매체의 위력을 빌려 대중의 순진한 애국주의를 자극하면서 대중적 호소력을 강화해가고 있다. 말하자면, "모두가 내 탓이요!" 하는 식의 일종의 종교적 참회를 대중에게 강요하면서, 그 '탓'을 보상할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각종의 관변단체, 종교단체, 애국부녀회 등의 국수주의 단체, 어용노조, 초․중․고등 학생이 동원되어 '허리띠를 졸라맬 것'과 '이른바 노․사․정 합의와 합심으로 이 난국을 극복할 것' 등등이 결의되고 시위되는데, 거기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의가 개재할 공간은 물론 거의 없다.


위기의 원인이나 배경, 그 의의 그리고 향후 전개 전망 등에 대한 이성적인 논의가 요구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위기의 배경과 원인에 관한 논의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제위기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부르주아 언론과 이데올로그들에게서는 그들의 계급적 한계 때문에 진정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몇 가지 주장에 대해서 간단히 보기로 하자.



① 먼저,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국민사치․방탕론'이라고도 해야 할 주장은 기본적으로는 이성적인 원인 진단이기보다는 원시적 직관에 의존한 주장이고, (일부 순진한(?) 논자의 주관적 의도와 상관없이) 독점자본에 대한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종속과 경제적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이 주장은, 위기가 '외환위기'의 형태로 폭발하였다는 사실과 기왕에 대중에게 주입된 애국주의 및 '수출 = 애국'이라는 의식이 한데 어울리면서 대중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논의의 가치조차 없는 보수언론의 주장은 제껴두자. 대신 그 매체가 갖는(혹은 갖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 진보성 때문에 잘못된 논의가 더욱 혼란과 해악을 끼칠 수 있는 {한겨레}(이봉수, "한국 꼴 난다", {한겨레}, 97. 11. 26)에서의 논의를 보기로 하자.


{한겨레} 신문의 이봉수 부장은 최근의 위기의 원인을 이렇게 말한다.



"요즘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일도 크게 보면 자만심에서 비롯한 자업자득이다. 집 사치, 옷 사치, 차 사치, 외식 사치, 해외여행 사치 등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이 이어졌다. 기업의 차입경영과 과잉투자도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었고, `국민소득 만 달러 시대' 운운하던 정부의 치적 자랑도 너무 앞섰다."



결국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이 위기의 주원인이라는 것인데, 이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을 일삼은 자들은 그의 글의 앞뒤 맥락으로 당연히 '국민'이다. 그런데, 그 국민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것은 노동자계급이니, 그는 결국 '노동자들의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이 위기의 주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같은 글에서 "국민도 정부와 재벌만 탓할 일이 아니다"라든가,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면 가계․기업․정부가 살을 베어 내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할 때, 그 설교의 주요 대상은 당연히 노동자계급이다.


이는 당연히, '임금 동결 = 임금 삭감'이나 '허리 졸라매기' 감수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다만 '보다 설득력 있게'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국민도 정부와 재벌만 탓할 일이 아니다. 이번에 들여오는 구제 금융은 국민저축의 부족분일 따름이다. 국민소득계정에서 경상수지 적자는 다른 나라 국민의 저축으로 메워진다. 국민들은 이제 3~4%의 저성장도 감내해야 한다. 경상수지적자와 인플레를 겪으면서 쉽게 이룩한 고도성장보다 그것이 값진 것일 수도 있다."



이를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한국 노동자계급의 과소비로 경상수지의 적자가 생긴 것이고, 그 부분을 다른 나라의 근검 절약한 노동자계급의 저축이 메우고 있으니 그만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마다 일본이나 미국의 (독점)자본을 배울 것을 설교하는 이봉수 부장다운 주장인데, 좀 다르긴 하지만 여기서도 아전인수격으로 외국의 사례(?)를 인용하여 자기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려는 그의 가예(家藝)는 죽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멕시코는 지난 94년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뼈를 깎는 초긴축으로 95년에는 마이너스 6.2%로 성장률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멕시코가 악몽에서 깨어나는데는 1년밖에 안 걸렸다. 96년에 5.1%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5백억 달러를 받기로 했던 지원금은 절반 정도만 활용했고, 그것도 조기 상환해 나가고 있다. … 칠레 등 다른 중․남미 국가도 경제가 살아나는 곳이 많다."



결국 노동자계급이 '뼈를 깎는 초긴축'을 실행하면 곧 악몽에서 깨어난다는 얘기다.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면 가계․기업․정부가 살을 베어 내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때, 이는 철저히 노동자계급의 '살을 베어 내는 고통'을 요구하는 것이고, 또 기업과 정부가 그러한 고통을 강요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부장의 이러한 주장은 위기의 원인 진단에서부터 철저히 잘못된 것, 혹은 기만적인 것이고 선동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집 사치, 옷 사치, 차 사치, 외식 사치, 해외여행 사치 등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들이 이어졌다"라고 행위주체를 생략하고, 또 '국민'이라는 애매한 말의 뒤에 숨어 얘기할 때, 그는 직접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분수를 모르는 짓'으로 표현했을 때 날아올 반박의 예봉을 피하면서도 자기의 주장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려는 아주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이 부장이 "멕시코가 악몽에서 깨어나는데는 1년밖에 안 걸렸다" 운운할 때, 그의 안중에는 물신화된 '경제성장률'만 있을 뿐 대량의 실업과 장시간․저임금 노동, 자본의 횡포와 폭력, 생활의 파괴, 무권리 상태를 강요당하고 있는 멕시코의 노동자 대중은 없는 것이다.


그는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라는 자신의 주장을 장식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자신의 주장에 그럴 듯한 설득력을 주기 위해서, 엉뚱하게도 제1차 대전 후 영국에서의 '금본위제'의 부활(정확히 말하자면, '금지금본위제'(金地金本位制)로의 잉글랜드 은행권 태환제의 부활)을 끌어오는데, 그에 의하면 당시 처칠에 의한(?) '파운드'의 '과대평가', "판단력이 모자라는 결정"이 "한때 영국경제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원인이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유감스럽게도, 일정한 화폐명의 은행권에 법에 정한 금의 일정 분량을 대응시켜 은행권의 가치를 보증하는 태환제 하에서의 환평가와, 국가지폐화하여 그 가치(가격의 도량표준 혹은 지폐가 대표하는 금량)가 수시로 변하는 불환제 하에서의 환평가의 차이에 대한 철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태환제 하에서 외환시세의 변동이나 외환위기의 양태는 지금 이른바 '관리통화제'라고 불리는 불환제 하에서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결코 비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관리통화제를 채택하는 대신에 금본위제를 부활시킴으로써 영국경제를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고 주장한다면, 혹시 최소한 논쟁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지금 주장은 무지․무식을 과시하는 위에서의 선동밖에는 안 된다. 특히 태환제 ― 그가 말하는 '금본위제' ― 에서는 은행권의 가치를 입법에 의해서 일정한 금량과 직접적․고정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통화의 '과대평가'라는 개념 자체가 허용될 수 없는 것임을 그가 알 리 없을 것이다.)


주제로 되돌아 와서, 위기의 원인을 '국민'의 '낭비', '사치', 혹은 '방탕' 등에서 찾는 주장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위기가 '외환위기'의 형태로 폭발하고, 또 그것을 수반하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요 근거를 찾을 것인데, 이는 몇 가지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으로 타당하지 않음을 예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의 '국민'은 그렇다 치더라도, 94년 이전의 멕시코의 '국민들', 그리고 지난 여름 이전의 태국․필리핀․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의 '국민들'이 '낭비․사치․방탕'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낮은 소득으로?


둘째, 결국 '낭비․사치․방탕' 등 때문에 국제수지가 적자를 누적하고 이 때문에 '외환위기 → 금융위기 → 경제위기'가 오고 있다는 논리일 터인데, 그렇다면 매년 천수백억 달러의 국제수지 흑자를 누적시켜온 일본에서 지난 91년부터 전개되어 오고 있는 금융위기․경제위기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겠는가?


셋째, 일본과 반대로 매년 천수백억 달러의 국제수지 적자를 누적해 오면서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되어 있는 미국에서 대략 지난 93년도부터 거대한 호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 것인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없더라도, 이상의 상반된 예들은 소위 '국민사치․방탕론'이 현시기 경제위기의 원인설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② 현경제위기의 원인을 설명하는 두번째 주장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점론", 특히 "금융 및 기업 부문의 근본적인 결함론"이라고도 해야 할 것으로, 이는 한국정부가 IMF에 제출한 "한국경제계획각서"의 제7항 및 제6항에도 표명되어 있는 주장이다. IMF(미국)의 '구조개혁'(restructuring) 강요를 합리화하는 서양 측의 대부분의 이데올로그들이 이러한 주장에 입각해 있고, 국내에서도 '구조개혁' 혹은 '구조조정'을 강력히 주장하는 논자들이 이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재벌 해체'를 주장하는 이른바'재벌책임론'도 기본적으로는 이 주장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해외의 이러한 논의는 사실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우선 그 가운데 유서 깊고 대표적인 부르주아 기관지의 하나인 영국의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의 "한국, 기적의 종말"(South Korea, The end of the miracle)이라는 특별기사(Nov. 29 - Dec. 5, 1997)를 보면, "문제의 진짜 원인들은 거의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며, 1950 - 53년 후의 폐허에서 경이로운 경제성장을 하는 데에는 국가 주도의(state-guided) 재벌 지배 경제체제가 아주 잘 기능을 했으나, 지금은 그 체질이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식의, 그렇고 그런 얘기를 늘어놓고 있다.


또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경제학 및 경영학 교수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부르주아 기관지의 하나인 {비즈니스위크}(Business Week)의 컬럼니스트인 루디 돈부쉬(Rudi Dornbusch)도 이 잡지(Dec. 8, 1997)에 "한국에서 구제금융 효험이 없을 것"(A Bailout Won't Do The Trick in Korea)란 글을 쓰고 있는데, 그도 역시 유사한 그렇고 그런 말을 하고 있다. 한 번 인용해보자.



"현재의 은행 및 기업의 위기의 배후에는 한국경제의 몇 가지 근본적 문제점들이 놓여 있다. 국가 개입(Statism)이 생산성을 방해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국가는 일본에나 어울리는 방식으로 경제과정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 개입은 수십년 전 발전의 초기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계획과 간섭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경제적 결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장과 탈중앙화(decentralization)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 금융 시스템이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 수십 년 동안 중앙정부(Seoul)가 신용을 배정해 왔고, 금융 시스템은 금전등록기에 불과하였다. 오늘날 그 시스템이 완전히 파산하여, 그것을 치유하는 데에만 국내총생산의 15%가 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혹은 근본적 취약점 내지 결함'의 하나로 노동시장의 이른바 '비유연성'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예의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고도성장의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또 다른 잔재 때문에도 필요한 구조개혁을 단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1960년대 및 1970년대의 군부 지배 정권들은 대부분의 노동조합 활동을 금지함으로써 임금의 인상률을 생산성의 상승률 이하로 훌륭하게 억제해 왔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달래는 한 방식으로, 사용자들은 어떤 노동자가 실제로 도끼로 조장을 살해하지 않는 한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이 법률로 금지되었다. 그 법률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것을 폐지하려는 작년의 시도는 노동자들의 총파업 위협으로 연기되었다. 그 결과 공식 실업률은 3% 이하이지만, … 취업자 10명 중 한 명은 불필요한 잉여인력이다."



그리고 루디 돈부쉬도 같은 글에서, "민주화로 작업장의 상황이 바뀌어, 수년 동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인내심으로 생산성에 뒤지는 임금을 받던 상황이 끝나고, 작업장마다 파업만 일어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들이 문제를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진단할 때 그들의 지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자본 및 금융시장의 전면 개방․자유화 및 이른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골자로 하는, IMF가 강요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타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강력히 실행해야 하는데,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차기 정권의 강력한 리더쉽에 의문을 표시함으로써 넌지시, 그리고 '미국의' 루디 돈부쉬는 노골적으로 이것이 외부의 강제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감추지 않고 있다. 루디 돈부쉬를 다시 인용해보자.



"한국은 쉽사리 위기를 탈출할 수 없다. 약간의 추가적인 통화절하, 개혁, 부실 은행 및 기업에 대한 보조금, 그리고 대출금을 떠받치는 외부의 구제금융으로는 되지 않는다. 지금의 불명예스러운 정권은 선거에서 패할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권이 극적인 타개책을 내놓아야 한다. 한국은 그 시장을 외부의 참여자들에게 완전히(fully) 열어야 한다. 외국의 투자자들이 혼란을 떠맡아서 오래 동안 미루어 온 기업 및 금융 구조개혁을 비타협적으로 해치워야 한다. 정부도 한국의 기업들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의 주장은 추상같아서, 그는 그 글을 "만일 한국이 듣지 않으면, 상업차관의 지불정지(moratorium)가 그 나라와 시장에 이미 배웠어야 할 교훈을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 맺고 있다. 가히 명치시대의 일본의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이나 뱉었음직한 안하무인의 협박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내의 진보진영 일부에서 제기되는 '재벌 책임 → 재벌 해체'론도 큰 범주에서는 이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점론", 특히 "금융 및 기업 부문의 근본적인 결함론"에 든다고 할 수 있는데, 물론 IMF나 기타의 해외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그들과는 다른 동기와 목적의식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일부는 민중주의적 시각에서 말하자면 일종의 '합리적 기업,' '윤리적 기업(?)' 등을 추구하고 있고, 일부는 '반독점' 전술이라는 문제의식에 입각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신자유주의적․제국주의적 입장에 입각한 것이든, 민중주의적 혹은 반독점 전술적 입장에 입각한 것이든, 이들 입장들은 위기의 원인을 해명하는 데에 있어서 공통의 방법론적 오류를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이 오류를 '한국경제'에 특수한 것으로 파악하면서 현재 진행중인 동남아나 일본의 위기를 짐짓 외면하거나, 이들 세 부류의 경제유형간의 억지 유사성을 찾고 있다. 이들의 시각에서는 위기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들 세 부류의 경제구조, 특히 금융 및 기업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들이 끝내 그렇게 주장하는대야 말릴 방법이 없지만, 결코 올바른 주장은 아니다.



③ 김영삼 정권 무능 및 경제관료 직무유기론에 대해서 말하자면, 중앙은행의 총재가 외환위기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필요한 조치를 요구하자, "내가 갱제를 뭐 아는가," "장관들에게 일임해 놓았다"며 태평한 대통령, "펀더멘탈(경제기초)은 튼튼하다"는 아집에만 집착한 경제부총리 등을 가진 국민은 확실히 불행하다. 그리고 어쩌면, 대자적 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한 왜소한 계급으로서의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해태와 무능, 그리고 직무유기는 사실상 위기의 양태 및 진행속도에 약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에 구구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하자.



2. 위기의 원인과 배경



현재 진행중인 외환․금융위기, 경제위기의 원인을 '한국경제'에서 찾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한국경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래야 겨우, '왜 위기가 외환․금융위기의 형태로 폭발하였는가?' '왜 좀 더 빨리나 좀 더 늦게가 아니라 바로 지난 달에 폭발했는가?' 정도일 것이고, 그것도 자본주의 세계시장과의 관련하에서가 아니면 사실은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위기의 본질은 과잉생산 공황이고, 따라서 그 원인도 세계시장에서의 과잉생산․과잉축적이다.


한국에 한발 앞서서 '위기 = 공황' 상태에 들어간 동남아 국가들이나 91년의 이른바 '버블 파탄' 이후 장기적인 침체․저성장 상태에 있으면서 다시 새로운 '위기 = 공황'을 맞고 있는 이웃 일본 등을 잠시 제켜 두자.


그러면, 한국경제의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국제수지의 적자 누적과 몇몇 거대 기업군(재벌)의 도산에 따른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누증인데, 이 양쪽 모두 현시기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극대화된 생산과잉의 직접적 결과이다. 국제시장에서 거의 모든 상품이 과잉상태에 있고, 특히 한국의 주력 수출상품인 자동차, 철강, 메모리 반도체, 석유화학 원료 등은 이미 지난해부터 국내외 시장이 심각한 과잉상태에 있어서 판매 및 수출에 애로가 발생했고, 가격 등의 교역조건이 악화되어 왔다. 그리고 이것이 국제수지 적자, 이윤 압박으로 되면서 재무구조가 부실하여 이자부담이 큰 기업들을 파산시켜 왔다. 금년 정초부터 한보가 쓰러지기 시작하여 위기가 폭발하기 전까지 기아까지 쓰러지면서 위기를 준비해 왔는데, 이들 기업의 도산의 원인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주력 상품의 과잉생산, 이윤압박, 이자부담 과중이었다.


그런데 과잉생산은 그것이 심화될수록 경쟁을 격화시키고, 이것이 다시 과잉생산을 심화시키는 식으로, 원인이 결과를 낳고 다시 결과가 원인이 되는 파국적 과정을 밟고 있다. 사실 근대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전개과정은 그러한 과정을 되풀이 해 온 것인데, 최근 수년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성립하여 전지구적 차원의 '자유무역'이 강화되고, 유럽연합,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등 각 지역의 경제통합이 가속화되는 등의 움직임도 과잉생산과 경쟁의 격화에 대한 독점자본의 대응이자 과잉생산과 경쟁을 격화시키는 계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멕시코나 동남아, 한국 등의 외환․금융위기를 계기로 미국 등이 가혹한 '구조조정'을 강요하고 전면적인 시장개방․자유화를 강요하는 것도 그러한 과잉생산과 격화된 경쟁을 반영한 '너죽고 나살기'(dog-eat-dog)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잠시 제켜 두었던 일본에 대해서 보자면, 한국과는 정반대로 매년 천수백억 달러씩의 국제수지 흑자를 누적시키고 있는 일본의 경우에도 많은 중소기업이 이윤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도산하고 있다. 그리고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기관은 엄청난 부실채권을 안고 신음하다가 속속 도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거대 산요증권(三洋證券)의 도산에 이어 전국 규모 10위의 호카이도타쿠쇼쿠은행(北海島拓殖銀行)이 도산하고, 지난 11월 24일에는 업계 4위의 야마이치증권(山一證券)이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야마이치증권의 도산은 일본자본주의 역사상 최대규모 회사의 도산인데, 그것이 관리하고 있던 투자는 약 1,880억 달러였다. 현재 일본경제가 겪고 있는 경제․금융위기는 참으로 엄청나서, 즉 일본경제의 과잉생산․과잉축적은 참으로 엄청나서, 어떤 경제학자들은 일본의 전체 은행 및 증권회사의 3분의 1이 조만간 야마이치처럼 쓰러지거나 합병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시아의 위기가 과잉생산 위기요 과잉축적 위기라는 라는 사실을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그들이나 그들의 매체는 좀처럼 말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 드물게 그것을 인정하는 기사가 나와 주목을 받고 있는데, 지난 11월 10일자 {비즈니스위크}에 실린 "디플레이션의 위협"(The Threat of Deflation)이라는 글이 그것이다. 비록 과잉생산(overproduction)이라는 명확한 표현을 기피하고 대신에 과잉능력(overcapacity)라는 다소 부정확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또 불환제인 이른바 '관리통화제' 하에서의 물가와 태환제 하에서의 물가를 무차별적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현시기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과잉생산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그 결과는 더욱 위험스러운 것이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를 인용하자면,



"아시아 전역에 걸친 건축 소동, 미국의 계속적인 경제확장, 그리고 유럽의 경제회복 때문에 모든 곳에서 생산은 소비를 앞서서 내달리고 있다. 소비자의 수요가 아직 강한 미국에서도 이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수년래 처음으로 반도체에서 자동차까지 여러 산업에 걸쳐서 세계적인 과잉능력이 있다. 그리고 아시아가 수출을 늘려 위기를 빠져 나오려 하기 때문에 과잉공급은 더욱더 악화될 것이다. … 결과는, 세계경제가 새로운 시대 -- 디플레이션의 시대를 맞이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점자본 이데올로그들이 제국주의적 야욕에 눈이 어두워, 현재 동남아와 동아시아에서 진행 중인 위기를 강 건너 불인 양하면서, 욕심을 채우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데에 비해서, 위 글의 필자는 "오늘날 세계경제의 최대의 위험은 동아시아의 디플레이션(그는 위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채)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세계경제의 다른 지역에 염려가 되는 것은 디플레이션의 압력이 어떻게 확산되느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그의 지적은 특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930년대의 대공황도 정확히 이러한 악순환적 디플레이션이었다. 1929년에서 1933년까지 물가는 매년 10%씩 떨어졌다. 차입금이 과도하지 않았던 회사들도 도산했고, 실업은 격증했으며, 경제와 증권시장은 깊은 혼절상태에 빠졌는데, 그러한 상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서만 끝날 수 있었다."



그리고 12월 10일에는 로버트 사무엘슨(Robert J. Samuelson)이라는 한 칼럼니스트도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지에 "아시아 커넥션 -- 미국인들이 자기만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미국경제에 훨씬 더 위협적일 것"이라는 글에서,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현재의 상황과 (1930년대) 대공황의 초기 사이에 커다란 유사점이 있음을 알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증시는 세계적으로 폭락했고, 금융위기가 생산과 고용을 위축시켰으며, 정부 관리들은 낙관론을 공언하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실제로 지금 위기는, 우선 일부의 국가에서 폭발했지만, 세계적 성격․원인의 것이고, 미구에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을 강타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실제로, 예컨대 지난 10월 27일에 홍콩 증시의 폭락에 자극받아 자본주의 세계의 주요 증시가 폭락하고, 뉴욕 증시의 다우존스공업지수가 사상 최대폭의 폭락을 기록했을 때, 자본주의 세계는 새로운 '대공황'의 악몽에 떨어야 했다.


10월 27일의 대소동 후 10월 29일에 미국의 연방준비이사회 그린스팬(Alan Greenspan) 의장은 미 하원에서 증언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짐짓 '그 대폭락은 인플레이션과 과도한 투기를 억제하여 미국경제를 건강하게 하는 유익한 사건'이며 '공황의 근거는 아니다'는 요지의 답변을 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비즈니스위크}의 기자는, "그린스팬이 그 모두를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듯 했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일년 내내 그는 '지금 증권시장에는 투기거품이 일어 있어서 결국은 터질 것 아니냐'는 질문 공세를 공개적으로 받아왔다"고 평하고 있다.


상품의 과잉생산 외에 지금 자본주의 세계시장은 투기적인 화폐자본의 엄청난 과잉상태에 있는데, 주지하는 것처럼 이 점이야말로 동남아와 한국의 외환․금융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동남아 국가들이나 한국은 최근에 여러 가지 이유로 급격히 단기외환차입을 증대시켜 왔는데, 세계시장의 포화 및 과잉생산으로 인한 수출증가율의 둔화로 이들 국가의 외환준비금이 줄어들자 이들 국가는 투기자본의 작전 대상이 되었고 이에 따라, 파국적인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지금 세계시장의 투기적 자본의 총액은 통계로 잡히지 않는데, 한 추계에 의하면 94년 하반기 현재 약 20조 내지 35조 달러(약 3경5천조 내지 6경1,250조 원)이라고 한다. 당시 최대경제대국 미국의 연간 국내총생산은 약 6조 달러, 93년도 말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G7)의 외환준비가 약 3,600억 달러, OECD 국가 전체의 그것이 약 6,000억 달러, 그리고 세계 전체의 외환준비가 약 1조 달러에 '불과'한 사실로부터, 그들 투기자본의 규모와 위력이 얼마나 클 것인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투기자본이 이렇게 거대해지는 것은 물론 이미 생산 및 유통 부면도 자본과잉․생산과잉 상태여서 새로운 화폐자본이 마땅히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투기자본의 비대화, 투기의 격화 역시 과잉생산․과잉축적을 반영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더욱 심화되는 것이다.


최근에야 밝혀지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의 은행이나 종금사 등 금융기관과 대기업 등도 동남아 등지에서 무턱대고 투기적 활동을 벌여 오다가 동남아의 외환․금융위기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현재의 외환․금융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데, 이 역시 작년에 특히 국내의 과잉생산으로 이윤율에 심한 압박을 받은 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금사 등이 해외의 자금시장에서 상환기간 1년 짜리 단기 외채를 빌려 국내의 업체들에게 만기 5년 10년 짜리 대출을 하고, 리스자금으로 이용한 것 등도 그러한 상황에서의 일종의 투기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는 지금 대략 92년경부터 시작된 장기호황으로 득의만면해 있지만, 그 역시 호황의 붕괴가 초읽기라고 할 수 있다. 불과 2년여만에 뉴욕의 주가지수는 4,000에서 8,000을 넘는 가히 '수직상승'을 한 후에 지금 불안정한 동요를 되풀이하고 있다. 주가의 폭등은 미국 시장이 극도의 포화상태 내지 과잉상태로서 자본의 이윤율이 급락해 있어서 소자본의 투기가 극심해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공황이 임박했음을 말하는 하나의 고전적 지표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시장에서의 미국경제의 비중에 비추어 그 대호황이 붕괴할 때 올 위기가 얼마나 위력적일 것인가는 우리의 안이한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최근 들어 간간이 1930년대를 반추하는 소리가 들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운위되는 것도 결코 예사일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그 위기가 조만간 급격히 세계화될 조건의 하나도 투기자본화 되어 있는 일본의 외환 누적분이다. 일본은 80년대 후반 이후 일반적 과잉생산과 '0'에 가까운 초저금리로 은행자본을 포함한 대량의 화폐자본이 유망한 투자처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주식이나 부동산시장에 대량으로 흘러 들어가 이른바 '버블'을 생성시켰던 것인데, 90년대 들어와 버블의 붕괴로 타격을 받고, 많은 자본이 미국과 동남아에 투자되었다. 이른바 "엔이 둔갑한 달러"(円が化けた ドル": {日經ビジネス}, 97. 9. 15, ("過剩生産にあえぎ動搖する世界資本主義 -- 世界同時恐慌の足音が聞ごえる"에서 재인용) )인데, 지금 일본은행들의 해외 융자 잔고의 약 56%가 아시아 투자인데, 그 총액은 약 2,650억 달러이다.


특히 동남아 국가들의 통화폭락의 방아쇠가 되었던 타일랜드는 일본의 다국적기업이 가장 깊숙이 들어가 있는 나라의 하나이다. 게다가 타일랜드의 대외채무는 93년 말에 470억 달러였는데 96년 9월에는 770억 달러로 불어나 있었고, 그 증가분의 대부분이 일본은행의 융자여서, 타일랜드의 통화위기가 표면화되었을 때 융자 잔고는 375억 달러였다. 타이에서는 현재 금융기관의 부동산 담보 대출의 약 40%에 해당하는 대략 370억 달러가 불량채권화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주요 대출자가 일본의 다이이치긴교은행(第一勸業銀行), 코교은행(興業銀行), 스미토모은행(住友銀行), 후지은행(富士銀行) 등 일본은행들이다.


일본 국내에서의 타격에 더해서 동남아에서 이들 은행이 받고 있는 타격은 조만간 미국 등 다른 곳에 투자한 자본을 회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이고, 이는 곧바로 아시아의 위기를 세계화하는 파이프라인이 될 공산이 크다고 할 수 있다.


12월 11일․12일 일본은 또한 저락하는 엔화를 방어하기 위해서 보유 미 국채(재무성 증권)의 일부를 팔기 시작하고, 그에 때맞추어 세계의 증시는 또 한번 동반 하락하였는데, 그 귀추 또한 주목된다.


정말 과잉생산에 동요하는 세계자본주의의 동시공황의 발소리가 바로 문전에 들리는 것은 아닐까?



3. IMF 통제체제와 대응



위기에의 IMF 개입 내용은 무엇이며 그것이 한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리고 현재 진행되는 상황에 우리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도의 상세한 발제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하자.


한국정부가 IMF에 제출한 의향서(Letter of Intent)나 '한국경제계획각서'(Korean- Memorandum on the Economic Program)는 현재의 위기의 근본원인이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점'(각서 제7항)이나 '금융 및 기업 부문의 근본적인 결함'(각서 제6항)에 있다는 전제하에 한국경제를 철저히 구조 개혁하는 데에서 위기의 극복방안을 찾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아주 구체적이고 세세한 부분까지 미치는 지침을 담고 있고, 또 그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서 1998년 1월 말까지는 2주마다 IMF의 점검을 받고 1998년에는 2․4․7․11월 등 4번에 걸쳐서 분기별 심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각서 제41항). 그 주요 기조는, 긴축재정 및 금융, 부실 금융기관의 도태․정리, 금융․자본․상품시장의 전면적 개방․자유화, 기업의 지배구조의 개선 및 경영의 투명성 확보,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대 등인데, 전형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격의 것이다.


지침이 너무나 세부적이고 고압적이어서 한국정부의 '정책' 따위가 끼여들 여지가 추호도 없는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 점이 다소 이 각서의 현실성을 훼손하는 요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협상 타결 이후 IMF나 국제 금융독점자본측이 공식․비공식적으로 한국정부의 '합의 이행 가능성' 여부를 문제삼으면서 한국정부와 대중을 길들이려 하는 것도 사실은 그 각서가 너무나 세부적인 데에서 오는 비현실성에 대한 저들의 왜곡된 인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각서가 담고 있는 내용의 문제점은 몇 가지 각도에서 제기할 수 있다.


첫째, 긴축재정, 긴축금융, 고금리 정책, 그리고 노동시장의 유연성 등으로 사실상 대중의 소비수준을 하향 억제하고자 하는데, 현 위기가 사실은 여느 공황과 마찬가지로 과잉생산 위기라 할 때, 그러한 대중소비 억제정책은 오히려 공황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긴축정책과 그에 따른 민생압박에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마련인 크고 작은 사회적 저항엔 어떤 대응책이 있는지?


둘째, 위기의 근본원인은 물론 과잉생산이지만, 그것이 현재와 같은 외환위기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데에는 다분히 한국경제 등이 국제적 투기자본에 무대책으로 노출되어 있는 탓일 것인데, 각서가 추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자본 및 금융시장의 철저한 개방․자유화는 한국경제와 따라서 민중생활을 더욱더 깊숙이 국제투기자본의 자의에 노출시키는 것은 아닌지?


셋째, 각서 내용대로의 '금융부문 구조조정'이란 다수의 종금사, 은행의 폐쇄를 예정하고 있는 것인데, 결국 금융기관의 무차별 연쇄도산을 용인하던가 의도하는 것은 아닌지?


넷째, 외국인에 의한 종합금융회사(merchant bank)의 소유권의 100% 소유, 외국인의 국내 금융시장 자유 진입 및 금융기관의 자유 인수․합병(M&A), 은행을 포함한 외국 금융기관 자회사 및 현지법인의 자유 설립, 외국은행들의 국내 은행 주식의 자유 매입, 외국인 투자 한도 및 주식 소유 한도의 50 ~ 55%로의 확대 등등은 결국 외환․금융위기를 기화로 한국의 주요 기업 및 금융기관의 소유․지배권을 헐값에 탈취하겠다는 의도가 아닌지? 등등.


여기서 우리는 IMF의 성격과 임무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이 IMF는 세계은행으로 불리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더불어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협정의 사물이고, GATT와 더불어 제2차 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 통화․금융․무역질서의 핵심을 이루어 왔다. 그것은 1930년대의 적대적인 블록경제화와 제2차 대전으로 파괴된 국제통화제도와 무역질서를 재구축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하게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고 그 지배하에 있었다. 그 내재적 모순 때문에 70년대 초에 붕괴되고 70년대 중반에 개정되기까지 IMF 협정은 일개 국민통화인 미국의 달러화를 금과 동일시하여 모든 가맹국가의 통화를 이 달러에 대해서 고정적으로 평가하도록 하고 있었는데(제4조 제1항), 그렇게 되기까지의 영국의 이익을 대표한 케인즈(Keynes案)와 미국의 이익을 대표한 화이트(White) 간의 첨예한 대립은 국제통화․금융사에 유명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GATT 역시, 당시 물정에 어두웠던 미 의회의 비토로 애초의 국제무역기구(ITO)안에 훨씬 못 미치는 집행기구 없는 협정에 머물렀지만, 영국의 스털링 지역에서의 차별적 기득권을 지우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한 철저한 미국 이해 위주의 것이었다).


IMF는 애초부터 그러한 성격의 기구였고, 따라서 이번의 '협상'이 사실상 미국 이익 위주의 프로그램의 강요였다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 실제로 이번 '협상'을 사실상 미국이 배후에서 총지휘했고, 그 진행을 감독하기 위해서 재무성 차관보까지 '협상'이 진행되는 호텔에 파견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특히 미국 유학 출신의 경제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일부의 이데올로그, 일부의 지배층은 'IMF 통제체제야말로 미루어왔던 구조조정을 수행할 절호의 기회'라는 식의 발언을 해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특수이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기의 부담이 그들에게 떨어지기보다는 고스란히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에게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위기에 노동자계급이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구체적이고 전반적인 대응방안은 별도로 발제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커다란 원칙을 대략 내오는 것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노동자계급의 대응은 당연히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가장 충실한 방식과 방향"이어야 한다. 가장 노동자계급적인 대응만이 어려움을 헤치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이번 기회를, 그동안 별러 왔던 이른바 '정리해고', 즉 대량해고를 단행할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는 독점자본의 노골적 움직임과 언동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동안 별러 왔던 임금을 동결하고 삭감할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는 독점자본의 노골적 움직임과 언동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당장 대폭적인 기름 값을 올리는 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독점자본의 제1의 대응은 노동자계급과 기타 민중의 생활에 대한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공격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삶은, '경제'니 '국가경제'니 하는 이름으로 추구되는 독점자본의 번영을 위해서나, 기타 그 어떤 것을 위해서 희생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거꾸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경제'니 '국가경제'니 하는 것들이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혹시 누가 교활하게도, 혹은 어리석게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당장 허리띠를 졸라매고 희생할 것을 설교할지 모른다. 노․사․정 합의 운운하는 어리석고 시대착오적인 설교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들은 교활한 기만책동이요, 무지한 자기희생이다.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 '과잉생산․과잉축적'이라는 점을 망각해선 안된다.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그들 스스로 어쩔 수 없이 '과잉투자' 운운하고 있지 않은가? -- 자본주의적 위기의 시대에는 절대적으로, '소비야말로 미덕'이다. 물론 그 궁극적으로는 비극의 전쟁뿐인, 독점자본이 부추기는 '국가주의'․'(기만적) 애국주의'를 극복하고 세계의 노동자가 연대하여 문제에 정식으로 맞대결해야 한다는 정신에서 말이다. 새로운 대공황의 발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점자본이 '소비의 미덕'을, 케인즈주의적 '유효수요'를 대대적인 전쟁의 파괴와 살육에서 찾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 그것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에서 찾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치열한 고용보장 투쟁, 임금인상 투쟁, (유사시의) 전쟁반대 투쟁이 필수적이다.


이미 보도되고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IMF가 강제할 조치 중에는, 긴축재정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일반적인 공격에 더해서, 금융․자본시장에 대한 철저한 혹은 대폭 확대된 개방이 있다. (실제로도 멕시코는 95년의 위기를 겪으면서, 그리고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지금 외국자본에 의한, 예컨대, 은행의 완전소유를 허용하고 있다.) 이는 한편에서는 해외 다국적자본과 한국의 독점자본 = 재벌간의 투쟁이면서 한국 노동자의 잉여노동 및 한국의 자원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권의 확대를 노리는 것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공세에 대해서 역시, 고용보장, 생활임금 보장을 동반한 노동시간 단축, 기타 노동자․민중의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치열한 투쟁만이 방패로 된다.


독점자본 =재벌과 그 이데올로그들은 노동자․민중을 그들에게 종속시키기 위해서 다국적자본에 민족적 이해를 희생시키면서 그들의 계급적 이해를 찾고, 그를 위해서 기만적인 애국주의를 선동한다.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동시에 민족적 이해를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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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과 정경유착

비자금과 정경유착

노태우의 수천 억 비자금 사건이 폭로된 이래 제도정치권의 각 정파는 서로 간에 '너 죽 고 나 살자'는 식의 비난과 폭로로 가히 진흙탕에서 뒹굴며 싸우는 개들의 모습 그대로 를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든 은폐된 사실들이 밝혀 지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리고 다 른 한편 에서는 " 이번 기회를 정격유착의 구조를 뿌리뽑아 깨끗한 정치를 실현해 가는 전 화위 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언제나 들리는 유행가도 어김 없이 들린다. 그리하여 '경실 련 ' 같은, 귀에 달콤한 '대안'으로 대중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을 저지하는 것을 그 사회적 존재 이유로 삼고 있는 몇몇 시민단체들은 발도 빠르게 토론회, 공청회 등을 열고 있고, 거기에서는 심지어 불과 수개 월 전까 지 권력 의 그늘에 숨 어서 민중을 능멸하던 검사 출신 의 변호사들까지 나서서 추 상 같은 어조 로 '정경유 착'을 질타하 면 서 '깨끗한 정치'를 위한 방략들을 제시 하 고 있다.


비 난 폭로 도 좋고, 질타도 좋다. 그 리고 '정격유착을 뿌리 뽑자 '는 다짐은 더 욱 좋다. 문 제는 과연 그러한 비난과 폭로, 질타 그리고 다짐으로 정말 정격 유 착을 뿌리뽑을 수 있는가이다.


유감 스럽지만, 저들의 요 란한 비난, 폭로, 질타, 다 짐 에도 불구하고, 현 재와 같은 한 국 정치 가 그 명맥을 유지 하는 한 정경유착 이 뿌 리뽑힐 가능 성은 전 혀 없다. 저들이 질타 해 마지 않는 바의 자 본과 의 '검은 유착'이야말로 한 국정치 의 풍토 자체이고 영양분 이기 때 문이다. 그리하 여 자본과 의 '검은 유착'없이는 한국정치 그 자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 다.


일반적 으로 ' 썩은 정치인' 혹은 ' 구정치 인'으로 치부되는 사람들 은 아예 언급할 가치도 없 다. 자타가 '양심적인 정치인 ', '개혁적 인 세력'으로 공인하 는, 주로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 의 행태를 보자. 그들은 오늘날 민자 당으 로, 민주당으 로, 국민회의로, 그리고 극소수이지만 심지어는 ' 유신본 당'을 자처하는 자민련으 로까지 나뉘어져서, 상대방 의 두목들을 비난하 는 방식으로 사실상 서로를 비난하고 있다. 아니, 갖은 현실적인 힘과 연합의 논리를 동원하면서, '썩은 정치인', ' 구정치인' 에 불 과 한 스 스로들의 두목의 정치적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전사(戰 士)로 나서 고 있다.


민자 당의 운동권 출신 인사들은 누구보다도 앞장서 김영삼 대통 령이야말 로 가장 개혁적 이라 고 주 장하면서 '세대교체', '3김 청산'을 외친다. 김영삼 씨의 대선자금을 밝 히라는 요 구 가 그들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다. '노태우한테서 대선자금을 한 푼 도 받은 바 없 고', '내 임기 중 에는 정치자금을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김영삼 대통 령 의 정치적 주장 이 그들이 딛 고 서 서 상대를 비난하고 새로운 개 혁적 정치를 다짐 하는 발판이다. 그러 한 발판 위에 서의 다짐 이 과연 진실성을 가질 수 있는 것 일까? 심 지어 노태우까지도 현직에 있 는 동안은, 아니 이 번에 용뺄래야 용뺄 수 없는 상황에 처하 기 전까지는 ' 누 구한테 정치자 금을 받았으며, 정 치자금을 받겠다 '고 말한 사 실이 없으며, 오늘 날의 김영삼 대통 령이나 마찬가지 로 ' 그런 일은 있지도 않고 있을 수 도 없으며 있어서도 안된다'며 '깨끗한 정치'를 다 짐했었다 는 사실을 새삼 상 기시켜야 하는 것이 서글프다.


국민회의 의 운동권 출신 인사 들은 어떤가? "김대중 총재께서 다른 사람도 아닌 광주학살 의 주 범 노태 우한테 서 20억 원 을 받았 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정말 당혹스럽고 고 통 스러웠 다. 그러나 정치생명 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러한 사실 을 고해할 수 있는 선생이야 말로 가장 솔직하고 신 뢰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라는 생각을 이제 갖게 됐다." 이 것이 오늘날 그들이 내 뱉는 말이 다. 그들이 얼마나 황 폐해져 있는 가를 알 수 있게 한 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 누구보 다도 열심히 '김대 중 죽이기'에 대항하여 '김영삼 대통 령의 대 선자금 폭 로' 를 위해서 분전하 고 있다.


노 태우 비자금을 폭로하 는 데에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민주당쪽의 인 사들은 어떤 가? 그들은 지난 두 차례의 대선과 무관하다고 말한 다. 따라서 그들은 가장 깨끗 하고 떳떳하 다 고 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가장 단호 하게 '3김 정 치'의 청산을 외치면서 '개혁정 치'의 깃발을 높이고 있다. 그 러나 우리 는 그들에게 그들이 소속된 당은 어떤 자금으 로 유지되 고 있는 지를 물을 것까지 도 없이, 그들 스스로가 지난 총선을 어떤 자 금으로 치루었는 지를 물 어보 고 싶 다. '깨끗한' 그들 일수록 치부하지 않고 검은 돈을 받지 않 았기 때 문에 더욱더 ' 중앙당의 지원'에 힘입어서 지난 총선을 치루고 금뺏 지를 달 지 않았던가? 그러면 '중앙당이 지원'한 그 돈 은 어 떤 돈인가? 진정 그 돈, 즉 중앙 당의 그 재 원(財源) 은 '검은 돈'이 아니 란 말인가?


다 아는 사실이지 만, 이전투구에서 분당의 악감정도 있 고 하여 민주당 쪽이 김대중 씨의 20억 원 수수 를 비난하고 나서자 국민 회의 쪽은 김대 중 씨측이 분당 전 민 주 당의 누구에게는 몇 억 을, 누구에게는 몇 억 을 하는 식으로 돈을 주 었다고 폭로했고, 이에 거 론된 당사자들은 명예훼손이라며 길길 이 뛴 적이 있다. 과 연 그 들에게 정치자금과 관련하 여 훼손될 만한 변변한 명 예가 있는 것일까? 그들의 주장인 즉, 국민회의 쪽이 노태우로부 터 받 은 자금을 분배한 것처럼 말하지만, 자기들 은 그 돈, 즉 노태우로부터 흘러나온 돈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 일 것 이다. 실제 그들이 노태우로부 터 흘러나온 돈을 받지는 않 았 을지 모른다. 또 김대중 씨 쪽으로부터 사선(私線)을 통해서 가 아니라 '중앙당' 을 통해서 '지원'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벌로부터 정치자금 을 안받는다고 말한 적이 없는", 그리하여 " 가장 솔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인 김대중 씨나 그 진영의 시각에서 볼 때는, 지금 길 길 이 뛰고 있는 민주당 측의 인사들이 지난 총선 등에서 '중앙 당의 지원'을 받은 이상, 그 돈 은 노태우한테서 받은 것이든 다른 재벌한테서 받은 것이든 차별성이 없는 것 이다. 또 실 제로도 거기에 무슨 차별성이 있겠는 가? 그리하여 '나 만은 깨끗 하다'는 그 들 의 외침이 야 말로 사실은 위선과 거짓 그것이고, 위선과 거짓을 가지고는 위 선과 거 짓의 성밖에는 쌓을 수 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는 한국정치에서 무엇 이 정 치인 들 을 여와 야로, 각 정파로, 각 계보로 나누고 있는가를 볼 필 요가 있다. 그 것은 다 름 아닌 출신 지역과 정치 자금이다. 그 리고 오늘날 제도정치권에서 가장 선진적 이고 양 심적이라는 사람 들조 차 이 지역과 정치자금 에 따른 정 파, 계보로의 분열에 서 자 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 다. '지역할거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 그들의 논 리조 차 사실 은 '지역 할거주의'에 그것도 음험하게 근거 하고 있 고, 지연과 학연 등을 인연으 로 한 정치자금의 수수관계로 계보들 이 맺어져 있다. 그러한 조건 속에서 어 떻 게 '정경유 착'이 근절될 수 있겠는가?


그 런데 한국정치에서 의 정경유착에 대해서 말해 왔지만, 한국정 치 에서의 그것은 가 장 저 급하고 저열한 형태일 뿐, 현 대 자본주의 부르조아 정치란, 지역성으로부터 는 몰 라도, 정치 자금로부터는 본래 자유로울 수 없고, 따라서 이른바 정경유착으로부터 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정치제도 자체가 비용이 많이 드는 그것인데다가, 국가권력은 잉여가 치 실현의 중 요 한 기 구 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금이 필요한 정치인과 이권이 필요한 자 본의 이해가 서로 맞아 떨어지 면서, 합법적인 형태이건 불법적인 형태이건, 정치자금 의 수수가 이루어 지 고 있는 것이 다.


요즘 미국에서도 '돈 안드는 정치제도'로의 개혁 운동이 한편 에서 벌어 지고 있 는데, 이를 추구하는 미국의 한 의원은 최근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 캠페인(유세)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호텔 방에 돌아오면 으레 연락을 바라 는 20 여 통 의 전갈이 기다리고 있다. 명단을 죽 훑어보면 대개는 누가 누군지 기억할 수 없는 유권자들 이고, 한두 명 만 이 아는 사람인데 그들에게만 전화 연락을 하게 된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그들 이란 바로 대개는 재정 후원인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국의 정치고, 미국의 정치 인들은 그 재정후원인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미국 에서 는 정치 자금이 많은 부분 대중적 모금에 의해서 조달되어서 상당히 투명한 것으로 평 가되고 있 고, 우리 정치계에서도 요즘은 그것을 모델로 '후원회'를 조직하는 것 이 유 행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위 미 국 정치인의 고백은 그것이 그만큼 투명하지 만 은 않고, 결국 정치 인들은 (은밀하 게 거래되는 '재정후원인'은 문제삼지 않더라도, ' 후원 회' 의) 큰손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 다.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저급하고 저열한 형태인 정치자금의 불법적인 수수가 문제의 표적 이다 보니 정치 자금 그 자체 의 본 질에 대해서는 관심이 소홀한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서 는, "재 벌들이 노태우 한테 갖다 바친 수백억 수천억이 땅에서 솟고 하늘 에서 떨어진 것 이 아닌 바에야 이 것은 결국 우리 노동자들 의 피땀을 착취한 것"이라던, 지난 11월 12일 노동자대 회에서의 이소선 어머님의 말씀을 곰곰히 새겨보아야 한 다. 은밀하고 불 법적인 형 태를 취하건, 선관위 '(지정) 기탁금'이라는 합법적인 형태 를 취하건, 자본으로부터의 정 치자금은 결국은 부불(不拂)의 잉여노동이 자 본의 이익과 이 권을 위해서 건네지는 것이 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아가 정경유착 도 "재벌 등 독점자본과 정치 인 과의 '(불법 적인) 정치자금 ' 수수를 통한 유착" 정도로 협소하게 이해되어서는 안된 다. 정치자금을 둘러싼 이러한 정경유착은 그 가장 저급하고 저열한 형태일 뿐이고, 현대자본주의 국가와 정치 그 자체가 정경유착 그 자체라는 점을 상기하여야 한다. 현대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국가의 모든 정책이 사실상 자본의 이익을 위해 서 기안되고 집행 되고 있으며, 국가 그것이 자본의 이익을 지키고 증 진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정경유착의 근절은 결국 자본에 의한 국가 지배의 극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하 고, 그 첫 걸 음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활동을 법률상 그리고 사실상 자유화하는 것 이다. 그 런 데 오 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 활 동은 법률에 의해서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 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 정경 유착의 근절'을 외쳐보았 자 그 외침은 앞 에서 본 것 처 럼 위선과 거짓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에 서 '정경 유착의 근절'을 외치는 사람들이 그 위선의 탈이라도 벗기 위해서 는 자기들의 정치, 자기들의 정당이 있지도 않은 이른바 '국민을 위한 정치'나 ' 국민정당'이 아니라 '자본 가 계급 정치'이고 ' 자본가 계급정당'이 라는 점을 인정하면 서 노동자 계급의 정치활 동 을 자유화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혹 은, 그들이 그렇게 인정하고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의 힘이 성장 하지 않 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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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와 임금에 대해 - 한노정연

 

현대자본주의의 물가와 임금

1. 임금 인상은 물가 인상의 원인이 아니다.

2. 현대의 시지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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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일 전 올해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애초의 억제 목표치에 훨씬 못 미치는 4.7%에 머물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통계 당국의 그러한 발 표를 그 대로 믿자면, 금년에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상당히 상승하 는 것으로 된 다. 과연 정말 그럴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통 계 당 국 의 발표를 검 증할 만한 실증적 자료들이 있어야 하지만, 그러 한 실 증적 자료야말로 통 계 당 국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것들을 포괄적으로 확 보할 수 있는 위치 조건에 있지 않 다. 나아 가, 물 가 경제 현상이라 는 것은 무척 광범위한 것이고 또 다양하게 변 형되고 왜곡 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통계 당국조차도 사실은 그 자료들을 수집하 고 분석하 는 데에 일정한 기 술적 한 계를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술적 한계는 그렇 다 하더라도, 발 표되는 통계라는 것이 통계 당국에 의해서 얼마 나 왜곡 조작되는 것인가를 대강 가늠하게 하는 흥미로운 일화 가 있다. 지난 90 년이 었 던가, 집값과 땅값의 폭등으 로 사회적 분위기 가 흉 흉했을 때의 일 이다. 당시 감사원의 감사 관이 었던 이문옥씨가 재벌들의 부동 산 투기 소 유 자료를 폭로하여 그 흉흉한 분 위 기에 기 름을 끼얹은 적이 있었 는 데, 그때 대통령이었던 노태우가 "어떻게 ' 통계적 여과과정'도 거치 지 않은 자료를 유출할 수 있느냐"며 대노(大 怒)했 다는 보도가 있었다. ' 통계적 여과과 정' - -- 이 말 속에 통 계 당국이 자 료들을 어떻게 처리 혹은 왜곡하고 있는 가가 함축되 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는 물가 상승률에 대한, 혹은 실질 임금의 상승률 에 대한 통계 당 국의 발표는 무언가 '통계적 여과 과정' 을 거친 것으로 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 라고 판단할 수 있다. (대통령의 한 마디가 그 럴 만한 근거가 될 수 있느냐 는 반론을 예 상할 수 있으나, 대 통령의 이 말 은 그것이 보도되기까지 청와대 의 참모 진들, 즉 전문가들에 의 해서 역시 '여과' 되었거나, 아니면 대통 령이 그렇게 발언하도록 그 전문 가들에 의해서 주입된 것이어서, 통계 당국의 자 료처리 관행을 반영하고 있 다고 보지 않으면 안될 것 이 다.)


이렇게 현대자본주의에서 물가와 임금 간의 상 관관계는 국가의 통계에 대한 신 뢰성의 문제 때문에 그것을 실 증 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근거를 잃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임금의 크 기를 둘러싼 자본과 노동간의 투쟁이 격렬해 질 때마 다 자본측은 통 계 당 국의 그러한 '통 계'에 근거해서 노동자들의 임 금 투쟁을 공격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그들의 공격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 인가를 보기 위해 서 현 대 자본주의에서 임금과 물가간에 몇 가지 관계를 고찰 해 보기로 하 자.



1. 임금 인상은 물가 인상의 원인이 아니 다.

자본주의 경제는 그 자체의 운동법칙에 의해서 주기적으로 위기(공황)를 맞 는다. 예를 들면 한국 경제에는 최근만 해도 79 - 83년에 이어 89 - 93 년 에 다시 심각한 공황이 엄습했 고, 격심한 정치 사회적인 격동이 그에 수 반하 였다. 79년에 시작된 공황은 부-마항쟁, 박정 희의 피살, 12 12, 사북 광산 노동자들의 항쟁, 5월의 대투쟁과 5.17, 5.18 광주항쟁과 학살 등등으로 이어 지 는 격 동 의 경제적 원인이 되었던 것이고, 89년 이래의 공황으로 노태 우 민 자당 정 권은 마침내 '총체적 위기'를 선언하고 공안정국을 조성 해 갔던 것이 다.

79년 이래의 공황에서는 부-마항쟁 이후에 전 개된 정치적 격변이 워낙 충격 적인 것이었 기 때문에, 그리고 정치 적 혼 란을 권력 장악 의 지렛대 로 이용하고 있던 전두환 일당의 대중 심리전 으로, 당시 광대 놀음을 하고 있던 신문 방송 TV 등은 "박 대통령 서거 이후의 정 치적 혼란으로 바이 어의 방한이 줄어 드 는 등 경 제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식으로 떠들어 댔다. 완전히 전도(顚 倒) 된 설명이다. 이에 비해서 89년 이 후의 공황 국면에 서는 경제위기의 원인 이 온통 노 동자 계급에 전가되었 다. 자본측 이데올로 그들의 선전은 임금 인상 을 요 구하 는 노동자들의 파 업과 '과도한 임금 인 상'으로 경제위기를 넘 어 ' 총체적 위기 '가 조성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주장에 의하면, 당시 경제위기의 직 접적 원인은 '과도한 임금 인 상'에 의한 인플레이션에 있고 노 동자들의 계속 적인 임금 인상 요 구 와 투 쟁으로 총체적 위 기로 심화되고 있 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노동 운동 진영의 시급한 임무 중의 하나는 노 동자 임금의 인 상이 물 가 상 승의 원인 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에, 상품의 가 치구성에 관한 자본측의 통 계를 인용하여 "상품가치 중에 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8% 정도에 불과하므로, 임금이 평균 10% 올 라 도 그로 인한 물가 상 승은 0.8%에 불과하고, 설령 임금이 20% 오른다 하더 라도 그로 인한 물가 상 승은 1.6%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실 의 물가 상 승 은 그 몇 배 몇 십 배에 이르 고 있다. 이러한 물가 상승의 책임이 어 떻게 노동 자들에게 있느냐?"하는 식의 항 변이 노 동자 진영 의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이러한 항변은 과연 타당한 것 일까? 전혀 그렇지 않 다. 위 항 변대로라면, 임금이 오르면, 그것이 0.8%이든 혹은 그보다 더 적 든, 임 금 인상이 원인 이 되어 물가는 오르는 것으로 된다. 그렇다면, 노동자들 역시 당연히, 물론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물가 상승의 책 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위 항변의 오류는 노동자들도 물가 상승에 책임이 있는데 그 책임을 부인하는 데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인상은 절대로 물가 상승의 원인 이 되지 않는데도, 극히 적은 비율이긴 하지만, 그것을 물가 상 승 의 원 인으로 돌 리는 데에 있다. 임금 인상은 절대로 물가 상승의 원 인이 되지 않 는다.


위의 항변이나 자본측 이데올로그들의 공격은 모두 ' 상품의 가 치 혹은 그 화폐적 표현인 상품의 가격은 고정자 본의 마모 분이나 소 비된 원료 등 불변 자 본의 가치(가격)와 임금 그리 고 이윤의 합으로 이 루어져 있어서 그 세 구 성요 소 중의 어느 하나 의 증감은 상품 가치(가 격) 의 증감으 로 나타난다'고 하 는 잘 못된 이 론에 기초하고 있 다. 이러한 이 론에서는 노 동자 가 임금을 올리 면 상 품가격은 그만큼 상 승하고, 자본가가 이윤을 증 대시키면 역시 가격은 그 증가 분만큼 올라 가는 것으로 된다. 그러나 이는 상품의 가치 혹은 가격에 대한 철 저히 잘못된 이해이다.


상품의 가치 혹은 가격은 그렇게 노동자 혹은 자본가가 임의로 상 승 과 하 락 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지하는 것처럼, 상 품의 가치 혹 은 가 격은 그것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 한 사회적 노동시간 의 크기에 의 해서 객 관적으로 결정된다. 예를 들어, 어떤 상품을 생산 하 는 데에 현재 의 지배적 인 기술적 조 건에서 10시간 의 노동이 필 요하고 한다면, 그 상품의 가 치는 10 시간으로 결정 되어 있고, 그것이 화폐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가격 이다. 그리하 여 그 10시간 중 5시간 이 불변자본, 즉 그것을 생산하는 데 에 들어간 과거 의 죽은 노동을 대 표한 다면 (이것은 주어진 시점에서는 이 미 과거의 것으로 주어져 있다), 너머 지 5시간에 해당하 는 가치가 이번의 생산을 통해서 새로 생산 된 가치, 즉 가치 생산물로서 그것 이 임금 과 이윤 (잉 여가치)으로 분열된다. 여기에서 만일 현재 의 임금과 이윤의 비율이 2 : 3, 즉 노동자 의 임 금 이 2시간 노동에 해당하는 가치이고 자본가에게 귀속되는 이윤이 3시 간의 노동 에 해당 하는 가치인데, 노 동자가 임금 인상 투 쟁을 통해서 임 금의 몫 을 3시 간으로 증대시킨다면, 상품 의 생산물가치 와 불변자본은 주 어져 있는 크기이 고, 가치생산물, 즉 5시간의 노 동에 해 당하는 가 치가 노동자와 자본가의 몫으로서, 즉 임금과 이윤으로 분열하 는 것 이기 때문에 임금은 2시간 크기 의 가치였던 것이 3시간 크기의 가 치로 증대하고 자본가의 이윤은 3시간 크기의 가치였던 것이 2시 간 크기 의 것으로 줄어든다. 즉, 임금이 오른다고 해서 상품의 가 치가 증대하 는 것이 아 니기 때문에 임 금 의 상승은 상품가 격의 상승 을 유발하는 것 이 아니 라 자본 가 몫 인 이 윤을 감소시킬 뿐인 것 이 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즉 임금이 오르 면 상품의 가격이 오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 의 몫인 이윤이 삭감 당 하 기 때문에 자 본가들은 기를 쓰고 임 금의 상승을 저지하려고 하는 것이 다.


이는 물론 임금 인상이 상품 가 격 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가장 추 상적으로, 그리고 평균 적으로 기 술한 것에 불과하다. 구체적으로는 자본의 유기 적 구성 도의 차이에 따라서 그 영 향이 다르게 나타난다. 맑스가 [임금 의 일반적 변동 이 생산가격에 미치 는 영 향]의 장({자본 론} 제3부 제11 장) 에서 분석적으 로 밝 힌 것의 결 론만 요약 하자면, 그 영향은 이렇 다. 임 금 이 오르면, (1) 사회적 평 균 구성의 자본 에서는 상품의 생산가격은 원 래대로 변화가 없고, 이윤은 임 금의 증가분만큼 줄어든 다. (2) 구 성이 보다 낮은 자본에서는 상품의 생산가격 은, 이윤이 내 려간 것 과 같은 비율로는 아니지만, 올라간다. (3) 구성이 보다 높은 자 본에 서는 상품가격은, 역시 이윤이 내려가는 것과 같은 비율은 아니지 만, 내려간 다. "평균 자본의 상 품의 생산가격은 전과 같이 생산물 의 가치와 같기 때 문에 모든 자본의 생산물의 생 산가격 의 총계도 역시 전과 같아서 총 자본 에 의해서 생산되 는 가치의 총계는 같다. 한편에서의 인 상과 다른 편에서 의 인하가 총자본 에서는 상 쇄되어 사 회 적 평균 자본의 수중으로 낙착되는 것 이다." (이 상의 설 명은, 지면 사정으로 중간의 논리 전개가 생략되어 있어서 이 해에 어 려 움 이 있을 것이다. {자본론} 제3부 제11장을 읽어 주기 바란다.)


이렇 게 임금의 상승은 물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89 - 90년의 위기와 투 쟁의 시 절에 이러한 견해는 많은 논쟁 끝에 결국 당시 의 한 지도적 인 노 동 운동 단체에 의해서 원 칙적으로 수용되었 다. 그러나 그들도 끝 내 오 류를 다 버리지는 못했다. 왜냐 하면, 그들 은 위와 같은 상품가 격 과 임 금의 관 계는 " 원리적으로 그리고 자본주의의 '자유경쟁 시대 '에 는 타당 하나 독점 자본주의 시대에 는 임금이 오르면 독점자본은 그 것을 가격에 전가한다"고 주 장했 기 때 문이다.


물론 임금이 오르면 독점자본은 그 시장 지배 력을 이용하여 임금의 상 승 분 을 가격에 전 가하고 그들의 이윤 이 줄어드는 것을 저지할 수 있다. 앞의 노 동운동 단체가 본 것은 바로 이 측면이고 그러한 한에서 타 당 성 이 있다. 그러 나 물가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회적 평균가 격 혹은, 같은 말이지 만, 사 회적 총 가격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회적 평균가격 혹은 총가 격은 당연 히 사회적 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 이 기 때문에 독점자 본이라 고 하 더라도 임금이 오르내린다고 하여 이를 증감시킬 수는 없다. 독 점자본이 가격 에 전가 하는 부분 은 결국 비독점자 본의 상품가격의 인하로서 나타나고, 결국 은 사회적 총잉여가치 의 독점 자본과 비독점자본간 의 분배 비 율만이 바뀔 뿐이 다. 즉, 임금이 올라가면 그만큼 사 회적 총잉 여가치는 줄어 드는데, 독점 자본이 차지 하는 잉여가 치의 크기가 독점의 힘 으로 변 하지 않 는다면, 비독점자본측의 잉여가치는 그만큼 더 줄어드는 것이 다.


그리하여, 독점자본주의 시 대에도 임금의 인상이 물가 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은 그 이전의 시대에 서나 마찬가지이다.



2. 현대의 시지포스

이상에서 우리는 '임 금의 인상' 혹은 '상승'이라는 개념을 사용했 는데, 현대 자본주의에서 임금 은 정말 상승 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매년 되풀이하고 있는 '임금 인상'은 정 말 임금을 인상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리스의 한 신화를 생각하게 된다. 그 신화에 보면 시지포스는 신들의 비위 를 거슬렀다 는 이유로 하데 스 (저 승 의 신)에게서 비탈에 바위를 밀어 올리라는 형벌을 받는데, 그 바위 는 밀어 올리면 다시 굴러 내려와서 시지포스는 계속 해서 그것을 밀어 올리지 않으면 안된 다. 현대의 노동자들이 바로 정확히 그 시 지프스의 운명에 있 다. 노동 자들은 매년 임금을 올려놓는 다. 그러면 그 임 금은 어느새 다시 굴러 내려 와 있고, 그것을 다시 굴려 올 리기를 거듭하고 있다. 그 때문에 노동자 임 금은 인상 혹은 상승되 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 승과 하 락의 진 동 운동을 매 년 되풀이하고 있 는 것이다.


노동자 임 금의 이러한 진동 운 동은 애초에 는 산업순환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었 다. 즉, 경 기의 호황과 번영 국면에서는 노 동력에 대한 수요가 강해짐 에 따라서 임금이 상승 하 다가 공황이 엄 습하 면 산업예비군이 급증하여 그 때문 에 임금 은 하락하 고, 다시 호황 국면에 접 어들면서 서서히 상승 한다고 하는 운 동을 계속하였 다. 여기에서 는 임금의 상승 과 하락은 그 명 목의 화폐임 금에 표 시된다. 예 를 들 면, 호황 국면에 월 80 딸라를 받던 노동 자는 번영 국 면에서 는 월 100딸라를 받다가 공황이 닥치 면 실직하 던가 직을 유지한다고 하더 라도 그 임 금은 50딸라로 떨어진 다.


그런데 현대자본주의에서는 노 동자 임금의 이러한 진동 혹 은 순환 운 동 은 은폐된 형태로 나타나고, 더구나 산업순환의 주기에 따른 진동으 로보 다는 매 년의 진동 으로 나타난다. 즉 매년 임투를 통해서 임금을 올려놓 으면, 그 하락 이 명목적으로는 표시되지 않으면서도 임금 은 실질적 으로 하 락해 버려 그 다 음 해 임투가 임박한 시기의 실질임금은 생계비 즉 노 동 력의 생산비 이하로 내려와 있게 된다. 그리하여 현대의 시지프 스는 그것 을 다 시 밀어 올리 지 않으 면 안되는 것이다.


노동자 임금의 이러한 은폐된 하락을 유발하 는 것은, 주지하는 것처 럼, 현 대자본주의의 체질로 되어 버 린 인플레이션이고, 이 인플레이션은 ' 관리통 화제 '라고 이름 붙여 진 태환정지 하의 현대의 통화제도 즉, 현대 의 불환통 화제에 기초하고 있 다. 총자본의 이익을 대표하는 국가의 경제 사회 정책에 따른 불 환 통화의 증발이 현대자본주의의 물가 상승의 주 요 형태 인 인플 레 이션을 유 발하고, 그에 비례해서 노동자의 임금은 비탈 아래로 굴 러 떨 어지 는 것 이다. 그리고 그 비율, 즉 임금이 떨어지는 비율, 물가가 상승하는 비율의 실체는, 그 것을 측정하는 방법론상의 기술적 한계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 인 의도에 의해서도 왜곡되고 은폐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과거 역사에서 (금과 신용화폐인 은행권과의) 태환정지나 불환국 가지폐의 발 행 같은 불환통화제는 자본주의가 전쟁이나 극심한 천 재 지 변 혹 은 격렬한 공황에 빠졌을 때에 긴급피난적 조치로서 취 했던 것이 다. 그 런데, 1929년에 발발한 대공황 때문에 1930년 대 초에 자본주의 각국 은 태환 을 정지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 현대자 본주의 에서는 이 불 환통화 제가 '관 리통화제' 라는 이름으로 이론화되고 합리화 되면서 일상적 인 것으 로 되어 있 다. 60년대 초부터 자본주의 국제통 화제도를 위기로 몰아넣으 면서 거듭되다 가 70년대 초 에 는 결 국 당시 의 국제통화제도였 던 본래의 IMF체제를 붕괴 시킨 '골드 러시 '(gold rush)는 물 론, 92년 의 유럽연합의 통화위기, 작년 말 에 발발한 후 잠 시 잠잠하다가 최근 재발하고 있 는 멕시코의 페소 화 위기, 딸라와 엔 화간의 상대 적 가치의 급격한 변화 등등 거 듭되는 통화 금융상의 위 기 를 거치면서도 제도 로서 의 금본위제로의 복귀 는 꿈도 꿀 수 없는 조 건에 있는 것이다. 이는 말 할 것도 없이 현대자 본 주의가 항상적으로 위 기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 을 의미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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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운동& 협동조합노동조합운동

농민의 협동조합 운동과 협동조합 노동자들의 노조운동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1)

“민주노총이라고 다 민주노조이냐?”

“구조조정으로 힘들면 나가면 된다. 일 할 사람 많다”

한국 변혁운동이 일주체이며 450만 농민을 대표한다는 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농민 지도부의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바로 엊그제 민중연대 토론회에서 나온 말이며 요즘 민중연대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농민운동 진영에서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협동조합 노동자들의 노조운동에 대한 이야기이다.

농민을 위한 협동조합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운동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살인적인 시장개방과 자본과 권력의 사농정책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한 잔의 농약에 맡겨야 하는 물러설수 없는 막판까지 내 몰린 한국 농민들의 모습속에서 협동조합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모습의 한 형태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 문제를 해석하고 풀어야 할 것인가?


본 자료는 위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이 아닐지언정 함께 고민하며 고민을 풀기 위한 단초를 마련하고자 작성되었다. 그리고 또 한편 아직도 협동조합과 협동조합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고민이 미천한 전국의 동지들에게 함께 고민할 것을 그리고 함께 풀어 볼 것을 요구하는 10만의 협동조합 노동자 중 한명의 동지의 간절함으로 읽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선적으로 협동조합 노동조합 운동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농민들이 조직한 협동조합의 현황과 함께 협동조합을 평생일터로 삼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현황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로부터 이 문제를 풀어 보고자 한다.

우선 현 한국 사회의 협동조합은 450만 농민 중 200만이 농민이 조합원으로 조직되어져 있다. 또한 한국의 농민은 협동조합을 통해 국가권력으로부터 농정자금을 지원받고 있으며 협동조합은 농민의 농업 전반에 대한 지도, 지원 사업을 자기 본연의 사업으로 삼고 있다. 또한 협동조합은 농민을 위한 경제사업과 더불어 신용사업이라는 종합경영체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농업협동조합에 있어 품목 조합이라 불리우는 있는 축산업협동조합은 소, 돼지, 양, 꿀, 닭, 우유 등 축산업을 하는 농민들이 만든 조직이며 1개 면단위로 조직된 농업협동조합에 반해 축산업협동조합은 시⋅군단위로 지역조합이 조직되어져 있으며 각 농민들은 임기 4년이라는 조합의 장인 조합장을 직접 선거로 선출을 한다. 또한 협동조합은 노동조합의 그것과 동일하게 직접 선거를 통해 자체 감사 및 이사 그리고 대의원 등을 선출하여 이사회, 대의원 대회, 전 조합원 총회를 자기 조직의 의결단위로 구성할것을 협동조합 규약으로 규정 하고 있다. 또한 노동자 계급 대중과 마찬가지고 농민 또한 부족하지만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협동조합을 통해 자본시장에 개입할 수 있도록 농업협동조합법상 규정되어져 있다.

이러한 농민 조합원들의 손으로 조직된 지역 및 업종조합과는 달리 농협중앙회가 존재하며 농협중앙회는 중앙회장과 농업경제사업 및 축산업경제사업과 신용경제사업 등 부문사업 대표이사를 포함한 이사회 대의원 대회을 규정하고 있으며 농협중앙회장은 지역과 업종(품목)조합의 조합장들로 구성된 농협중앙회 대의원 대회에서 선출에 대해 추천권을 가지고 있는 등 조직 운영에 있어 형식상 직접 민주주의의 상이 제도적으로 보장 되어져 있다.


이러한 협동조합을 일터로 삼아 살아가는 협동조합 10만의 노동자들은 농협중앙회 5만의 노동자들과 지역과 업종(품목) 조합의 5만의 노동자 등 전체 10만의 노동자가 있다.

10만의 협동조합 노동자들은 한국노총을 상급조직으로 하는 정규직 중심의 ‘농협중앙회노동조합’과  비정규직 중심의 ‘농협중앙회 민주노조’ 및 민주노총 사무금융노련 산하 ‘축협중앙회노동조합’과 ‘전국농협노동조합’ 그리고 ‘전국축협노동조합’으로 조직 되어져 있다.

즉 3개의 기업별 노동조합과 2개의 초기업별 전국 단일노조로 조직이 구성되어져 있으며 농협중앙회 민주노조와 전국농협노동조합을 제외한 나머지 3개의 노동조합은 여타의 협동조합 노동조합(예를 들면 수협노동조합, 신협노동조합 등)과 함께 ‘전국협동조합노동자연대’라는 연대의 틀을 구성하여 연대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협동조합으로 조직된 농민들과 협동조합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협동조합 노동자들은 교섭테이블에서 노동자와 사용자라는 각각의 반대편에서 교섭투쟁에 임함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노⋅농연대의 깃발아래 연대투쟁을 전개하기도 한다.

정리해고제를 통한 인력감축, 직장폐쇄, 구사대와 폭력배를 동원한 노동자 농성장 침탈, 노동조합 농성장에 도청장치 설치 및 동향 파악, 지불능력을 근거로 임금저하 요구, 희망⋅명예퇴직을 빙자한 인원감축, 년봉제 도입과 퇴직금 누진제 폐지와 신규 채용시 비정규직 채용, 각종 파업 파괴 행위 - - -


위에 열거한 모든 내용은 한국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자본과 공권력을 앞세운 국가권력으로부터 자행되는 노조운동 탄압의 몇 가지 사례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노조운동 탄압 사례들이 농민들이 만든 협동조합에서, 농민의 이름으로 자행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투쟁의 현장에서 투쟁의 결의를 드 높이기 위한 투쟁의 노래인 농민가가 농민의 입을 통해 불리면서 노동자들의 농성장이, 파업의 대오가 파괴되고 있다는 매우 충격적 현상이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농민의 위해서 농협을 개혁해야 한다는 미명아래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완결을 앞두고 있는 현 한국 사회에서 협동조합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수가 있을 것이다.

협동조합은 그 조직 자체가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층민중이라 하는 농민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지위향상을 위해 활동하는 경제적, 정치적 운동체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인간에게 개방된 조합원의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조합원에 의해 민주적 관리가 되고 자본의 조달에서부터 그렇게 조달된 자본의 민주적 관리 및 협동조합 이외의 그 어떠한 조직과의 관계에 있어 자율과 독립성을 획득하고 협동조합 구성원들을 상대로 교육, 훈련, 및 정보의 공유 등을 운영의 원칙으로 삼고 협동조합간의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그 관계의 기본 원칙으로 삼고 각 지역사회에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는 ICA 협동조합 관련 7대 원칙 선언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듯히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그 사회 체제 전반을 거부하거나 극복을 자기 조직의 존재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순응하면서 독점에서 소외된 소자본으로서 농민들의 지위향상을 그 존재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 한국사회에서 협동조합이란 어떠한가? 협동조합 7대원칙에 근거한 협동조합인가? 농민들의 정체⋅경제⋅사회⋅문화적 지위향상을 위해 투쟁하고 활동하는 운동체적 조직인가?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한국의 협동조합은 결코 ‘아니 올시다’ 이다.

한국의 협동조합은 지난 노무현 정권의 FTA국회비준의 과정이나 WTO에 대한 대응 투쟁의 과정이나 농민들의 쌀 수입개방 반대 투쟁, 농민 생존권 쟁취 투쟁의 과정속에서 협동조합은 최소한의 농민의 조직이라는 자기 조직의 존재규정 조차도 망각한 행위들을 자행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의 전도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기 까지 하였다.



농민 협동조합 운동과 협동조합 노동자들의 노조운동[2]


지난 3월 8일 농림부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농림부 관련한 업무보고 과정속에서 협동조합의 광범위한 구조조정과 함께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을 골자로 한 농림부 04년 업무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날 농림부는 업무보고 이후 업무보고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04년 주요 정책 과제 중 4번째로 “농협개혁 및 산지 유통혁신”이라는 제목의 정책 과제를 제시한바가 있다.

이날 농림부는 현재의 1300여개 되는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을 2004년도내로 500여개로 축소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의 구조조정 발표하였다.

또한 이러한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 구조조정을 위해 현재 금융기관 중 농‧축산업 협동조합에서 유일하게 취급하고 있는 정책자금 관련한 대출 업무 권한을 일반은행에서도  취급 할 수 있도록 관련규정을 제정하고 또한 현재 시‧군‧면 단위로 규정되어 있는 농민 조합원의 협동조합 조합원 가입 자격 제한을 두지 않고 어느 지역에서 농‧축산업을 하더라도 전국 어디에서나 협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농협법 개정안을 오는 6월 국회에 제출할 것과 동시에 현재 순 자본 비율 2%로 규정하고 있는 농협구조개선법에 의한 부실조합 판정 기준을 05년 3%, 06년 4%대로 점차 증대하는 것 등 지역과 업종(품목) 구조조정에 대한 업무계획을 발표하였다.


3월 8일 농림부 장관을 동원하여 발표한 협동조합 개혁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정부의 방침이 과연 기존의 김영삼이나 김대중 정권과는 다른 방침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과정을 살펴보면 그 의미를 찾을수가 있다.


협동조합에 대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지난 1999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9년 3월 8일 당시 농림부 장관은 청와대 업무보고 이후 기자회견의 과정에서 협동조합 관련한 중장기적 계획안을 발표한바가 있다.

이날 발표 내용을 자세히 보면 우선 2001년까지 당시 분리되어 있던 농협중앙회, 축협중앙회, 인삼협중앙회를 하나로 통합한 통합농협중앙회를 출범시키겠다는 내용과 더불어 당시 202개의 축산업협동조합을 100개로 줄이는 등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산업협동조합을 50% 이상을 합병 및 퇴출 등의 방식으로 줄이겠다는 것과 함께 이렇게 합병되고 퇴출된 농협중앙회와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의 경제사업과 신용사업을 분리하여 분리된 신용사업을 하나로 묶어 농협은행을 출범시키겠다는 3단계 협동조합 개혁 방침을 발표하였다.


자본과 권력의 이러한 중장기적 협동조합 신자유주의적 개혁 방안은 농업협동조합법이라는 법률적 강제를 동원하여 농민의 자주적 조직인 중앙회를 국가권력이 개혁이라는 이름하에 2000년 7월 1일 농협중앙회, 축협중앙회, 인삼협중앙회가 통합한 통합농협중앙회를 출범시키면서 1단계 신자유주의적 협동조합 구조조정이 일단락 된바가 있다.

당시 3개 중앙회가 통합되면서 약 30% 이상의 노동자들이 통합농협중앙회 출범이라는 미명하에 부당하게 해고를 당했으며 통합농협중앙회의 회원조합인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은 신용사업 전산망의 단일화되는 등 합병의 내부 통일성을 가져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자본과 권력은 농업구조개선법의 제정과 함께 통합농협중앙회를 동원한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에 대한 2단계 신자유주의 협동조합 구조조정을 시작하게 된다.

우선적으로 자본과 정권은 제반 부르조아 언론을 동원하여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이 농민을 위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자본 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하고 부실화 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책임으로 협동조합 노동조합의 책임론을 사회적을 부각시키면서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전 사회적으로 확산시켰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속에서 2000년 통합한 통합농협중앙회는 그 다음해인 2001년 3월 87개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 사업장에 대한 통폐합을 부실극복이라는 미명하게 추진을 했으며 이후 2001년 9월 농민의 자주적 조직인 협동조합을 국가권력이 통제하고 개입 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농업구조개선법을 임시국회에서 제정을 하면서 법적 제도적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획득하였다.

이후 농림부와 통합농협중앙회를 동원한 국가권력은 2002년 2월 농업구조개선법에 근거하여 105개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 사업장에 대해 합병 대상 조합으로 선정하고 실질적 합병 및 퇴출작업이 진행이 되었다.

또한 2004년 2월 동일한 방법으로 89개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업 협동조합에 대해 합병 및 퇴출 사업장 명단을 발표하였으며 같은해 3월 초 현재 1300여개의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을 500개로 04년 말까지 줄이는 것을 주 내용하는 농림부 04년 사업계획안을 발표되면서 2단계 신자유주의 협동조합 구조조정이 본격화 되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2단계 신자유주의 협동조합 구조조정은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업 협동조합을 500개로 줄이겠다는 것과 동시에 사업장 합병 과정에서 인위적 인원감축과 더불어 퇴직금 누진제 폐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연봉제 도입, 노동조합 무력화라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협동조합 노동자들에게 대한 공격의 정도는 매우 살인적인 것이다.


이러한 중앙회 통합-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의 합병과 더불어 인위적 인력감축과 노동시장유연화 정책으로 표현되는 신자유주의 협동조합 구조조정은 결국 더욱 더 극대화된 이윤추구 사업장으로서의 협동조합을 건설한 뒤 농협은행 출범이라는 3단계 신자유주의 협동조합 구조조정의 시작을 의미한다.

현재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으로 통합되어 있는 협동조합의 종합경영체제를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으로 분리하고 이렇게 분리된 중앙회 신용사업과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의 신용사업을 하나로 묶어 거대화된(중앙회와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의 신용사업의 예수금 합계가 200조를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며 200조가 넘는 예수금을 가진 금융자본의 출현은 한국  금융시장의 대 변화를 예고하는 의미를 가진다) 농협은행의 출범 시키겠다는 한국의 신자유주의 세력들의 거대한 음모는 결국 협동조합의 완전한 재편을 통한 농촌의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칠레와의 FTA 체결에 이어 양자간 무역협정 체결의 현실화와 함께 지난 94년 UR협상에서 10년간 유예가 되었던 한국사회 쌀 시장 개방, 200만 농민이 협동조합으로 조직되어져 있고 한국사회에서 450만이나 되는 농민계급을 50만으로 줄이고 400만을 산업노동자화 하겠다는 노무현 정권의 농업구조조정은 한국 사회에서 1차 먹거리 산업을 포기함과 동시에 농민을 사(死)하는 정책인 것이다.


협동조합의 신용사업은 농협은행으로 분리가 되면서 경제사업만으로 운영되는 협동조합은 위에서 지적을 했듯히 死농정책하에서 협동조합의 퇴출을 의미하는 것이며 200만 농민을 포함한 450만 농민과 10만 협동조합 노동자들의 고용과 생존권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협동조합 개혁의 문제는 농‧축산업 관련 학계와 함께 전농, 한농연을 포함한 농민 단체, 1300여개의 협동조합의 조합장들과 협동조합 노동자들간에 항상 뜨거운 감자로 존재했다.

논의의 중심꺼리임과 동시에 협동조합 개혁의 상에 대해서도 농민단체와 학계 그리고 각 노동조합간에도 이견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며 이러한 상황속에서 노무현 정권은 한편으로는 공권력을 동원한 밀어붙이기 개혁 정책과 더불어 사안별 농민단체 또는 학계와의 교류속에서 신자유주의 협동조합 구조조정을 자행해 왔다.


전농을 포함한 농민단체는 협동조합 개혁 관련해서 농협중앙회의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면서 이차적 과제로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농협중앙회 개혁의 중심내용은 현재의 농협중앙회를 신용사업부문(농협은행), 경제사업부문(업종‧품목 연합회)과 지도 관리사업 부문이라는 3부문 사업으로 분리할 것과 함께 농협중앙회의 시‧군 지부 폐쇄를 주장하고 있으며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의 개혁은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삭감과 인력감축 등 소위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저비용 고효율 구조로 전환할 것과 동시에 농민을 위한 협동조합에서 협동조합 노동자들은 희생과 봉사를 전제로 하는 협동조합 활동가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필요 없다 라는 논리속에서 노동조합 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다.



농협중앙회의 신경분리와 시군지부 폐쇄로 표현되는 농민단체의 농협중앙회 개혁 방안은 일부 협동조합 노동자들과 농‧축산업 관련 학자들과 농림부 정부 관료들도 동의를 하고 있는 내용이다.

농민단체의 농협중앙회 개혁 방안 중 현재의 농협중앙회를 3개 부문 사업체로 분리할 것을 주장하는 방안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이라는 종합경영체제를 가지고 있는 농협중앙회가 농민을 위한 경제사업을 등한시 하고 돈벌이 장사인 신용사업에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농민을 위한 농협중앙회 건설을 위해 현 농협중앙회의 신용사업을 경제사업과 분리하여 독립법인화 하고 경제사업은 활성화됨을 전제로 각 업종(품목)연합회로 구성할 것과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의 지도 관리 사업만을 전담하는 비영리 단체로서 농협중앙회 재편이다.

이와 더불어 농민단체는 현재의 농협중앙회 시‧군지부가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업 협동조합과 경쟁을 하고 있고 지역의 농민들에 의해 이윤을 획득하면서 실질적으로 농민에게 환원이 안되고 있기 때문에 농협중앙회 시‧군지부의 폐쇄를 주장하고 있다.


농민단체는 농협중앙회의 신경분리와 시군지부 폐쇄를 통한 농협중앙회 개혁과 더불어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에 있어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노동조합 무용론 주장은 전농 경북도연맹의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 개혁 관련한 사업계획(농협임금 재조정 투쟁 계획안 참조)과 각종 협동조합 개혁 관련한 토론회 등을 통해 주장되고 있다.

농민들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지위향상을 위해 자주적으로 조직된 협동조합이 농민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협동조합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 한국사회에서 농민의 생존권은 벼랑 끝에 내 몰리고 있는 상황인데 협동조합 노동자들은 과다한 임금수준과 안정된 고용수준이 과연 가능한 것이냐? 라는 논리속에서 지역과 업종(품목) 조합을 평생일터로 삼고 노동하고 있는 협동조합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공격을 협동조합 개혁이라 주장하고 있다.


농민단체의 협동조합 개혁 방안(농협중앙회의 신경분리와 시‧군지부 폐쇄 / 지역과 업종(품목) 농‧축협의 노동시장유연화와 노동조합 무용론)은 현재 전농이 결합하고 있는 민중연대와 한농연등이 결합하고 있는 농민연대등 전국적 조직내에서 일정정도 협동조합 개혁의 방안으로 자리잡히고 있는 상황이며 특이나 민주노동당의 4-15총선 공약 중 협동조합 개혁의 내용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가 않는 상황이다.

이러한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한 협동조합 개혁 방안은  신자유주의 협동조합 개혁 세력과 함께 그 내용의 일정정도 일치를 확인할 수가 있으며 이러한 일치의 지점은 노무현 정권이 이후 협동조합 개혁은 실질적 협동조합의 주체인 농민들과의 다양한 소통을 통해 풀어가겠다고 이야기 한 점과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노무현 정권과 신자유주의 협동조합 개혁 세력은 지난 4월 15일 총선의 결과를 등에 업고 “신자유주의 개혁만이 살길이다” 라는 광범위한 개혁 드라이브를 통해 일부 농민단체와 함께 한국 사회 협동조합이 재편을 가속화 할 것으로 예상이 되며 이 상황속에서 협동조합을 둘러싼 10만의 협동조합 노동자들과 200만 협동조합 농민 조합원을 포함한 농민의 생존권은 벼랑끝으로 내 몰릴 것이다.

(3)에서 계속



농민 협동조합 운동과 협동조합 노동자들의 노조운동[3]

자본과 정권은 농민이 만든 협동조합을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할 것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강도 높게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협동조합의 주인인 농민들은 농민을 위해, 그리고 ‘개혁’을 위해서 협동조합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자본과 정권 그리고 농민의 개혁의 내용은 그 자체로만 보면 차이점이 존재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의 협동조합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라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게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지 언정 결과적으로 협동조합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공격의 칼날의 번뜩임은 별반 차이가 없는 상황이다.


협동조합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자본과 정권 그리고 농민들의 태도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동자 계급의 이름으로 노동자-농민 연대의 이름으로 협동조합 개혁투쟁의 상과 내용은 무엇인가?

민중연대전선에서 협동조합 개혁 투쟁을 어떻게 배치하고 자본과 정권을 상대로 어떻게 전선을 칠 것인가?


자본과 정권은 그리고 농민단체들의 협동조합 “개혁” 주장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자세히 들여다 보면 본질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국가권력으로부터의 협동조합 관련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현 국가권력의 신자유주의 협동조합 정책하에서 협동조합의 구조와 모양을 바꾸자는 것이다.


자본과 정권은 WTO, FTA로 표현되는 신자유주의 시장개방정책 하에 그리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서만이 살아남는 자본간의 경쟁시장 하에서 협동조합을 그대로 방치한 채로 협동조합의 모양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중앙회의 통합과 지역과 업종(품목)조합의 합병, 그리고 중앙회와 지역과 업종(품목) 조합을 통 털어 협동조합 노동시장의 유연화,

그리고 중앙회와 지역과 업종(품목)조합의 신용사업을 하나로 묶어 농협은행 출범과 협동조합은 경제사업 전담이 바로 신자유주의자들의 협동조합 구조조정의 내용이다.


이러한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협동조합 구조조정은 좁게는 협동조합 10만 노동자들의 일터를 앗아가며 노동시장 유연화가 정착된 살인적인 작업장만이 남는 결과를 낳는 것이며, 넓게는 협동조합을 통해 최소한의 경제적 지위향상과 더불어 1차 먹거리 산업을 책임지는 농민계급의 조직 대오를 무력화 시켜 농업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 농민단체는 현재의 협동조합 개혁의 최 우선 과제가 농협중앙회가 농민을 위해 운영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농민을 위한 경제사업을 활성화를 요구하고 있다.

농협중앙회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하여 신용사업은 농협은행으로 경제사업은 각 경제사업연합회로 분사를 하고 농협중앙회는 지역과 업종(품목)조합을 상대로 하는 지도, 관리 업무 중심의 비영리 농협중앙회로의 전환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지역과 업종(품목)조합은 농민이 만든 조직이기 때문에 그리고 농가부채라는 농민대중의 빚에 근저이기 때문에 농민을 상대로 한 대출 금리를 인하시키고 금리 인하 관련해서는 지역과 업종(품목)조합에서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개혁하여 충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친절하게도 농민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해야 하는 지역과 업종(품목)조합에서 노동조합이 무슨 필요가 있는냐? 라는 문제제기속에 협동조합 노동조합의 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자본과 정권, 그리고 농민단체의 요구는 신용사업과 경제사업 분리 관련해서 농협중앙회만을 할 것인가? 아니면 농협중앙회와 지역과 업종(품목)조합을 함께 할 것인가? 라는 차이만 있을 뿐 협동조합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더불어 신경분리를 통한 농협은행 출범과 함께 신자유주의적 협동조합 재편이라는 큰 틀에 대해서는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협동조합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신자유주의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

우선 첫 번째로 현재의 협동조합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전선을 ‘개혁’ 대 ‘반 개혁’에서 ‘신자유주의’ 대 ‘반 신자유주의’로의 전선의 이동을 광범위하게 조직해 들어가야 한다.


자본과 정권 그리고 농민단체는 공히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협동조합 노동자들의 가슴에 칼을 겨누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자본과 정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체제로부터 요구되는 봉건적 요소인 농업에 대하여 구조조정을 통한 死농 정책에 의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민 계급의 최후의 보루인 협동조합의 무력화 하고 있다.

자본과 정권이 신자유주의 협동조합 구조조정 정책에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결과적으로 동의하는 농민단체들의 협동조합 개혁 요구는 결국 신자유주의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동조자일 뿐이다.

농민단체의 신자유주의적 요구에 대해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협동조합 구조조정 정책에 맞서 반 신자유주의의 기치아래 치열한 이데올로기 전선을 치고 새롭게 전선을 복구해 들어가야 한다.


두 번째로 신자유주의 협동조합 구조조정 반대 투쟁의 전선에서 협동조합내 공공성 확보와 계획농정을 통한 협동조합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 쟁취를 위한 협동조합 개혁 투쟁의 상과 요구를 정립해 들어가야 한다.


사적소유가 인정되고 그것만이 사회 발전의 기본 동력인양 치부되고 있는 자본주의국가,

이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피 터지는 계급투쟁을 통해 최소한의 공공성을 확보해 들어가는 우리들의 투쟁이 있다. 물론 이러한 우리들의 투쟁은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두려워하는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달콤한 당근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위한 국가차원의 공공성 확보, 바로 이점으로부터 협동조합의 개혁의 실마리를 찾아 들어가야 할 것이다.

1차 먹거리 산업인 농업은 결국 전체 민중의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이러한 농업을 현재와 같이 무한정 자본의 경쟁의 논리속에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국가 차원에서 생산과 소비가 계획되어지고 강제되어 지는 국가적 통제를 요구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1차 먹거리 산업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에 있어서는 국가기간산업화 하고 이를 전제로 생산과 유동을 협동조합이 책임지고 생산의 주체인 농민의 생존권을 협동조합을 통해 국가가 보장해주는 구조와 체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되고 유통되는 1차 먹거리 산업에 대한 소비는 전량 국가가 책임지고 소비하는 즉 농업에 있어 계획 경제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길만이 농업이 살고 농민이 살고 농민의 조직인 협동조합의 공공성을 확보해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조금 더 농업에 있어, 협동조합에 있어 계획 경제적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현재 한국 농업의 문제점 중에 몇 가지 중요한 점은 바로 시장의 무분별한 개방이라는 개방농정이며 또한 생산의 통제가 불가능함으로 인한 생산량의 폭등이다.


개방농정과 생산량 폭등으로 인해 생산의 주체인 농민은 1년 농사를 질 때마다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농사를 짓고 있으며 이러한 도박농사로 인해 하루 하루 농가부채가 늘어가는 과정이다.

한국 농민의 도박농사는 결국, 국가가 특정한 생산량에 대한 대출 금리 인하 및 저리로 농정자금 지원을 무 계획적으로 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국가의 농정자금이 필요한 농민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하게 옆집, 앞집과 동일한 특정한 생산품을 생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러한 구조가 결국 생산량의 폭등과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정한 생산량을 지원하기 위한 국가 농정자금이 협동조합을 통해 대출되어 지는 구조속에서 어찌 보면 협동조합의 대출 회수는 불가능한 구조이며 이러한 부실채권으로 인한 협동조합의 부실은 구조적 문제인 것이다.

국가의 농정과 협동조합의 구조적 문제속에서 ‘협동조합을 농민의 품으로’를 요구한다는 것은 협동조합의 사회적 구조를 모르고 주장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결국 자본주의 국가 체제내에서 협동조합의 개혁은 협동조합의 공공성 확보와 계획된 농정 구조뿐인 것이다.

전 국토를 기후 및 기타 농업 생산의 주요한 요소별로 구분하여 각각의 토대에 근거한 생산물과 생산량을 국가가 계획하고 이를 생산의 주체인 농민들로부터 생산을 조직하는 협동조합, 이러한 과정속에서 협동조합의 손실분은  국가차원에서 책임지고, 농민에 의해 계획 생산된 생산물을 국가가 소비를 책임지는 구조로 표현되는 협동조합의 공공성 확보와 계획 농정은 일국차원의 1차 먹거리 산업 사수는 최소한의 개량적 요구이자 자본주의 국가에서 최대한 쟁취할수 있는 구조적 요구인것이다.


세 번째로 지금 현재 10만의 협동조합 노동자들과 농민 200만이 조직된 협동조합은 전체 민중운동 진영내에서 가장 치열하게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깃발을 움켜쥐어야 한다.

협동조합은 특이나 농민이 조직한 협동조합은 농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지위향상을 위해 투쟁을 하는 조직이다.

협동조합에서 노동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협동조합 활동가 이자 가장 계급적 노동자들은 협동조합의 이름으로 200만 조직된 농민 조합원을 포함한 450만 농민을 조직하고 교육시키고 반 신자유주의 전선으로 떨쳐 일어서게끔 조직하는 임무와 과제가 있다.

이와 동시에 10만의 협동조합 노동자들은 협동조합이라는 사업장에서 노동자로서 훈련되어지고 조직되어지는 과정을 가져가야 한다.

이러한 협동조합 농민과 노동자는 바로 반신자유주의 전선에 노동자, 농민이라는 이름으로 연대의 깃발을 움켜쥐고 민중연대 전선속에서 신자유주의 분쇄 투쟁의 한길로 나서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강조하고자 한다.

노동자를 때려잡는 개혁,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를 길거리로 내모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지금 민중운동 진영내에서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농성장이 침탈당하고 파업가가 농민가에 의해 밀려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주장이 민중운동 진영내에서 개혁이라는 탈을 쓰고 노동자 농민에게 칼뿌리를 겨누고 있다.

지난 탄핵정국에서 아직도 시뻘건 동지들의 피가 묻어 있는 손을 뒤로 감춘 노무현이를 사수하기 위해 수십만개가 모였던 광화문의 촛불처럼

전선을 쳐야 하다. 반 신자유주의 전선을, 그것도 확실하게 쳐야 한다, 노동자 농민을 위한 협동조합 개혁이 이름으로 협동조합의 공공성 확보와 계획농정 쟁취 투쟁을 위하여[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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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민주노총에 채용된 간부들도 고용안정을 위해 노조를 결성하고 교섭투쟁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지난 8월 31일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3명의 국부장이 해고 및 직권면직을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0여년동안 사무금융노련의 이름으로 활동을 했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연맹이라는 회사로부터 말이다.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조합에서 근무하고 있는 채용직 노동자들의 수가 얼추 300여명에 이르고 있는 노동조합이라는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들

이들은 지난 전노협시절부터 30여만원도 채 안되는 할동비 명목을 받으면서도 치열하게 노조 활동을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다. 생계를 위해 노동조합 사무실에 출근전에 우유 및 신문 배달을 하면서 생활비를 마련하고 조합원들을 만나기 위해 밤새 술잔을 기울이던 노동자들 - - -

 

"야 우리도 노동조합을 만들자" 라는 그 누구의 제안에 대해 쓴 웃음 지우며 희생하고 봉사해야 하는 우리가 무슨 노동조합이냐? 라면서 현장으로 현장으로 내 달렸던 동지들

음 이제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자본조차도 최소한의 징계 절차를 거치는 것이 요즘의 추세인데 노동조합연맹에서 절차는  커녕 당사자 소명기회조차 주지 않고 해고를 시키는 현실앞에서

최소한의 동지적 애정조차 포기하고 있는 노동조합이라는 회사앞에서 "노동조합"의 깃발을 움켜쥐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말이다. 

 

아래 내용은 사무금융연맹에서 부당하게 해고 및 징계를 받은 노동자들의 피맺힌 울부짖음이다

 

사무금융연맹 사무처성원 3인 부당해고 철회

서명운동



“부당해고 억울합니다! 저희들을 복직시켜 주십시오!”

지난 8월 31일 사무금융연맹 사무처성원 3인은 자본과 정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5년, 10년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해온 연맹에 의해 날치기 부당해고를 당했습니다. 87년 연맹 건설 이후 사무처성원 중징계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사무직 노동운동의 미래를 일구어가고 있는 연맹 조직과 산하조직 동지들 모두의 가슴에 크나큰 상처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저희 사무처 간부 3인은 개인적으로 연맹 조직과 조합원의 신뢰와 사랑이 새겨준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온 활동가이자, 또한 노동운동 과정에서 가족들과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책임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이번 연맹의 부당해고는 활동가로서의 명예와 생활인으로서의 생존권 모두를 앗아간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부당해고라는 연맹 초유의 사태가 장기화되어 저희 3인 뿐 아니라 연맹 조직과 산하조직 동지들의 가슴에 패인 상처가 더욱 깊어지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루빨리 부당해고가 철회되고 연맹이 정상화될 수 있도록, 그리고 저희들의 13년 노동운동이 헛되지 않도록 동지들의 지지서명을 부탁드립니다.

-사무금융연맹 정소성 조직쟁의국장, 김금숙 여성국장, 김호정 정책기획부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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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수 소장의 글 - 민주주의와 노동운동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

― ‘민중탄핵’ 논쟁의 재검토, 그리고 확인해야 할 전술 원칙 ―


채만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소장)




I. 남구현․이해영․최형익


1. ‘민중탄핵론’과 남구현 등의 비판


지난 3월 당시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 등 야 3당이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를 결의함으로써 촉발된 소위 ‘탄핵정국’은, 주지하는 것처럼, ‘대통령 탄핵’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혹은 “탄핵반대”를 외치는 소부르주아 대중의 소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이른바 ‘좌파 진영’1) 내부에도 논쟁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예컨대, 주로 인터넷상의 Another0415(www.another0415.net) 싸이트를 통해서 진행된 ‘민중탄핵론’ 논쟁이 그것이다.

우선, 당시 ‘민중탄핵론’으로 지칭되던 입장은, 물론 논자에 따라서 그 견해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1) ‘탄핵정국’은 4월 15일로 예정되어 있는 국회의원 총선거를 겨냥한 여․야의 선거전략으로서 기획된 것이라는 것,

2) 이른바 ‘수구반동 세력’이 주축이 되어 발의․가결된 것이긴 하지만, 노무현 신자유주의 정권의 반노동자적․반민중적 성격을 고려할 때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도 그 탄핵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

3) ‘탄핵정국’의 본질이 의회권력을 둘러싼 독점부르주아 정파간의 권력투쟁임을 고려할 때, 정부의 영향력 하에 있는 TV 등의 ‘공영방송’이나 “한겨레”․“오마이뉴스” 등 이른바 ‘진보언론’과 ‘진보적인 시민운동단체들’ 등,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동원되고 있는 ‘탄핵무효’․‘탄핵반대’ 기치 하의 ‘촛불집회’ 등이 자칫 신자유주의 개혁의 주체인 노무현 정권에 의한 절대적인 권력 독점, 즉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

4) 따라서, ‘수구반동 세력’에 대한 규탄이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권의 반노동자적․반민중적 정책에 “면죄부”를 주지 않도록, 그리고 ‘탄핵무효’․‘탄핵반대’를 외치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대중선동․대중동원이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불러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

5) 그를 위해서는 오히려 노무현 정권의 반노동자적․반민중적 성격을 대중적으로 선전․부각시켜야 한다는 것,2) 등등.

그런데 이러한 ‘민중탄핵론’에 대해서는 이른바 시민운동으로 대표되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로부터만이 아니라 언필칭 ‘좌파 진영’의 일부로부터도 강력한, 아니 적대적인, 비판이 제기되었다. 남구현․이해영․최형익 등 세 분 교수의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2004. 3. 23.)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전에도 지적한 것처럼,3) 남구현 교수 등은 이 글에서 ‘민중탄핵론’을, 그리고 누가 보기에도 특히 ‘탄핵정국’에 대한 나의 태도를 염두에 두고, “좌익공론적”이니, “정치적으로 유해하고 무책임한 것”이니, “좌익소아병적”이니, “양비론”이니, “이론적으로 오류이자, 실천적으로 위험한 것”이니, “좌파이론의 퇴보”니, “노동자 운동을 협소한 노동자주의에 가두는 몰계급적 관점”이니, “반동적 사회주의”니 등등,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적대적 규정들을 다 동원하여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비판’이란 것이 사실은 당시 제출된 대로의 ‘민중탄핵론’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그들 세 교수가 그것을 왜곡․곡해하여 ‘비판의 적(的)’으로서 주관적으로 설정한 그것에 대한 그것이었고, 더구나 그 행론(行論)도 당구풍월(堂狗風月), 즉 서당개 풍월에 불과한 지식과 야마시(山師) 기질, 즉 사기꾼 기질까지 발휘한 그것이었다. 즉, 그 ‘비판’은 기껏 돈키호테의 돌진에 불과했다.4) 그들의 그러한 사고와 ‘비판’은 물론 그들의 소부르주아적 존재조건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었다.5)



2.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 혹은, 사기


그들의 행론․지식이 왜 당구풍월에 불과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대략 논한 바 있기 때문에,6) 여기에서는 내가 왜 그들이 “야마시 기질, 즉 사기꾼 기질까지 발휘”하고 있다고 규정하는지에 대해서 예를 들면서 언급해야겠다.

전에도 지적한 것처럼, 남구현 등은 ‘탄핵정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리켜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고 쓰고 있다. 전후 맥락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보다 길게 인용해보자.


 ‘노동자 계급을 제외한 모두는 반동’으로 보는 관점은 라쌀레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7) 맑스의 언급을 굳이 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타 소부르주아계급의 투쟁 역시 혁명적일 때가 있다. 참정권 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지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 그것이다.8)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의 개혁성이 한계가 있다고 이를 반대함으로써 사실상 그 사회의 수구보수 세력의 이해에 기여할 경우, 주창자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 사회의 가장 반동적 계급의 이해에 복속하게 되는 사태를 초래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9)


이제 명확해졌다. 그들이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고 할 때, “이러한 경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바로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의 개혁성이 한계가 있다고 이를 반대함으로써 사실상 그 사회의 수구보수 세력의 이해에 기여할 경우”, 그리하여 “가장 반동적 계급의 이해에 복속하게 되는 사태를 초래하는” 경우이다. 여기에서,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뒷 부분의 “가장 반동적 계급의 이해”는 “지배계급의 가장 반동적 분파의 이해”로 그 서술이 수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소위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그들이 ““가장 반동적 계급”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말하자면 ‘반동적 부르주아지’는 서로 별개의 계급이 아니고 동일한 (독점)부르주아지의 두 분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맑스는, 혹은 맑스나 엥겔스는, 남구현․이해영․최형익 등 세 분 정치학 박사님들께서 말씀하시는 그러한 경우를 가리켜, 즉 그러한 의미로, ‘반동적 사회주의’를 말한 적이 있는가?

혹시 누가 있어 나의 과문과 무지를 힐난할지 모르겠지만, 결단코 그러한 적이 없다.

맑스와 엥겔스가 어떠한 형태로든 ‘반동적 사회주의’에 대해서 논급하고 있는 것은, 󰡔공산당 선언󰡕(맑스․엥겔스, 1848)을 위시하여 󰡔독일의 이데올로기󰡕(맑스․엥겔스, 1845-46), “독일의 현상”(엥겔스, 1847), “공산주의의 원리”(엥겔스, 1847), “국가 폐지라는 슬로건과 독일의 ‘무정부의 벗’에 관하여”(엥겔스, 1850) 등, 5편의 글이다. 그런데 이들 글의 어디에서도, 그리고 물론 다른 어디에서도, 맑스와 엥겔스는 ‘반동적 사회주의’라는 규정을 저들 세 분 교수님들이 주장하는 의미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는 저들의 주장은 순전히 자신들의 소부르주아적 주장에 맑스주의적 의상을 입히고, 거기에 거짓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사기일 뿐인 것이다.10)



3. 개혁


한편, 내가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은, 저들 세 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의 개혁성이 한계가 있다”(원문대로!)는 이유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 ‘개혁성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그 개혁의 반노동자성․반민중성․친독점자본성․친제국주의성 때문에 비판하고, 반대하고, 규탄하는 것이다.

‘개혁성의 한계’ 운운하는 저들의 발언은 ‘맑스주의자’, 즉 유물론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사실은 그들 자신이 주관적․관념론적 사고의 소유자임에 불과함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민중탄핵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풍차를 향해서 돌진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지금 ‘개혁’이라는 구호․규정 하에 현실적․객관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보는 대신에, ‘개혁’이라는 어휘의 주관적․사전적 의미에 자신의 영혼을 팔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집행자로서의 노무현 정권, 독점자본의 선전도구, 여론 조작도구로서의 ‘언론’ 등이 요구하는 대로 말이다.

이른바 ‘개혁’과 관련하여, ‘탄핵정국’에서의 발언만을 예로 들더라도, 나는, 저들처럼 ‘개혁성의 한계’ 운운하는 대신에, 그것을 “몰계급적 선동”, “오늘날 민중의 생존권을 파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구현”으로 규정했다.11) 뿐만 아니라, 3월 16일자 ‘민주노총 단위노조 대표자 결의대회 참가자 일동’ 명의의 한 ‘결의문’12)이 “노무현 대통령이 총선 승리만을 추구하고 개혁정책을 외면해 온 결과는 노동자 민중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민생파탄으로 이어져 왔다”고 쓰고 있는 데에 대해서, 밑줄까지 그어가며 명확히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었다.

즉, “이는 완전히 현실에 대한 도착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고,” “진실은, 노무현 정권이 ‘개혁정책을 외면해 온 결과’로”, 즉 남구현 교수 등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개혁성의 한계’ 때문에, “노동자 민중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민생파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이 바로 개혁정책을 강행해 왔기 때문에, 김영삼 정권 이래, 특히 김대중 정권 이래 신자유주의 개혁 정책을 강행해 왔기 때문에 노동자 민중은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몰리면서 민생파탄이 벌어지고 있는 것”13)이라고!

이른바 ‘개혁’에 대한 이러한 성격 규정과 비판은 물론 남구현 교수 등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글들 속에서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개혁’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여 ‘개혁성의 한계’ 운운하는 자신들의 “현실에 대한 도착된 인식”을 드러내면서, 마치 그것이 우리의 인식인 양 도착된 제시를 하고 있다. 저들이 돈키호테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도착된 저들의 사고방식 때문이지만, 이렇게 명백히 제시된 나의 비판조차 보지 못하고 있음을 볼 때, 그것은 그들의 불성실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적대’하고자 하는 계급적 열정 때문에 자신들이 적대․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를 자세히 읽어보는 성실성은 설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실성 대신에 들어서는 것이 왜곡․곡해․날조․모략, 그리고 자가당착과 주관적 환상이다.



4.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저들의 그러한 왜곡․곡해․날조․모략, 그리고 자가당착은 지난 6월 하순에 발표된 남구현 교수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민주주의 문제와 신자유주의 지배전략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탄핵․선거국면을 지나면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마치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제기되었으며, 전체 좌파진영은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방향성을 상실하였다.

일부에서는 독재가 사라졌으므로 민주주의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으나, 민주주의 문제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갖추어지는 것으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14)


참으로 가증스러운 왜곡․날조․모략이자 자가당착이다. 그리고 “전체 좌파진영”이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방향성을 상실하였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략일 뿐만 아니라 “전체 좌파진영”(물론 자신들은 제외시키고 있겠지만)에 대한 모욕이다.

도대체 자신의 ‘비판’의 대상으로 되었던 누가 “독재가 사라졌으므로 민주주의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으”며, 누가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마치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제기”하였단 말인가? 집시법이나 테러방지법 및 NEIS 파동, 그리고 부안사태 등의 소동을 예를 들면서 노무현 정권이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다고 규정한 것은 물론이고,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고 문제를 제기한 것 자체가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제기한 것 아닌가!

“민주주의 문제만 제기하는 정치주의적 관점이나 신자유주의 문제로만 몰아가는 경제주의적 관점” 운운이라든가, “탄핵 국면에서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한 필자와 같은 이론가” 운운하고 있는 데에서도15) 짐작할 수 있듯이, 자신들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마치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제기’했고, 제기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방향성을 상실”하였고, 또 상실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민주주의’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권이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회 권력까지 거머쥐게 되면 민주주의가 치명적으로 침해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 반면, 즉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 반면, 저들이야말로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권 하의 상황을 ‘독재가 사라진’ 민주주의로 파악하고, 그리하여 오로지 그러한 주관적 환상에 근거해 움직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선동에 놀아나던 정치적 광기를 가리켜 “지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혁명적인” “운동” 운운했던 것 아닌가! 즉, ‘민중탄핵론’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노무현 정권을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로, 그리하여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반노동자적으로 규정한 반면에, 남구현 교수 등은,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도 ‘탄핵 반대’를 외친 사람들은 그 신자유주의에도 불구하고 그 정권이 민주적이기 때문에 그 정권을 지켜야 한다고 했던 것 아닌가!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권과 그 아래에서의 상황을 그들은 그렇게 민주적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에 ‘민중탄핵론’을 “좌익공론적”이니, “좌익소아병적”이니 “반동적 사회주의”니 하면서 그토록 적대했던 것이고,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한 필자와 같은 이론가” 운운하는 가소롭기 그지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아닌가!16)



5. 대중


‘탄핵정국’에서 ‘민중탄핵론’이나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경계론’에 대한 비판자들이 들고 나오던 전가의 보도의 하나는 ‘대중’이다. 그것은 지난 3월 17일 민교협, 교수노조, 학단협 등의 주최로 열렸던 “탄핵관련 긴급토론회: 탄핵정국과 한국민주주의의 위기”에 발제자․토론자로 참석했던 교수․변호사․시민운동단체 지도자들이 그랬고,17)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가 그랬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역겨운 형태로 그것을 표출한 것은 남구현 교수의 다음과 같은 가소로운 ‘야유’이다. 즉,


일부에서는 4․15 총선 이후 의회와 대통령 권력을 집권당이 장악하게 되어 사실상 파시즘적 권력을 휘두를 것이고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불어 노동자 민중운동은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보았으며, 그렇게 된 원인으로 탄핵 국면에 민주주의를 제기한 필자와 같은 이론가와 신자유주의 전선을 이탈한 환멸스러운 대중을 거론하기도 하였다.(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함)18)


4․15 총선으로 형성된 제도정치 구도도, 노동운동의 상태도 결코, 남 교수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어해 갈 수 있는 최대의 힘은, 남 교수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자․민중의 대중 투쟁’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봐라! 대중투쟁이지 않은가!” 하는 식으로 의기양양하면서, “일부에서는” “환멸스러운 대중을 거론하기도 하였다”고, 가소로운 야유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우선,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 등이 탄핵 국면에서 제기한 것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대중’에의 굴종 혹은 추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과거 같았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을 의회쿠데타[으-하!하!하!하! 이 망상!: 인용자]는 이제 의회소동으로, 탄핵정국은 탄핵 게이트로 넘어가고 있다. 쿠데타가 해프닝으로 변질되게 하도록 한 결정적 주역은 수십만 대중들의 단호한 직접행동이었음을 명백하다[원문대로!: 인용자] 한마디로, 대중들의 직접 정치행동이 빈사에 빠진 노무현 정권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해낸 게 현 사태의 규정적 핵심이다.

... 보다 심각한 문제는 여전히 이러한 사태에 대해 좌파의 무능함이 여실히 증명되었다는 점일 것이다[그러니, 광화문에 나가 촛불을 들고 ‘탄핵무효’를 외쳐라! 대중에게서 배워라!: 인용자]19)


그런데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대중’은 누구인가? 남구현 교수가 오늘날 입에 달고 사는 ‘노동자․민중’의 대중인가? 아니면, 천둥벌거숭이의 소부르주아 대중인가? 다시, 세 분 교수님들의 그 유명한 말씀을 인용해 보자.


 ‘노동자 계급을 제외한 모두는 반동’으로 보는 관점은 라쌀레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맑스의 언급을 굳이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타 소부르주아계급의 투쟁 역시 혁명적일 때가 있다. 참정권 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지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 그것이다.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의 개혁성이 한계가 있다고 이를 반대함으로써 사실상 그 사회의 수구보수 세력의 이해에 기여할 경우, 주창자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아이쿠, 고맙기도 해라!: 인용자] 우리 사회의 가장 반동적인 계급의 이해에 복속하게 되는 사태를 초래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자, 명확하지 않은가? 그가 “지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혁명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규정한 대중이 ‘노동자․민중’의 대중, 보다 정확하게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아니고, ‘소부르주아계급’이고, 그 ‘소부르주아 대중’인 것이! 그가 그것을 명확히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을 따라 배움으로써 ‘좌파의 무능함’을 치유 혹은 극복하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 즉, ‘좌파’로 불린 노동자계급의 선진부대에게 ‘소부르주아 대중’에게 복속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타계급과의 동맹/연대/연합”20)이라는 혁명적인 언사로 말이다!

자, 그렇게 그들은 ‘탄핵국면’에서는 ‘좌파’의 ‘무능’을 질타하면서 ‘소부르주아 대중’을 상찬하고, 그들에게 복속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지금은? “타원크레인 노동자, 병원 노동자, 궤도 노동자, 사내 하청 노동자” 운운하면서, “환멸스러운 대중을 거론하기도 하였다”며, 정말 환멸스러운 야유를 내뱉고 있다.

지금 그가 입에 달고 있는 ‘노동자․민중’으로서의 ‘대중’이, ‘탄핵국면’ 당시 그들이 그토록 상찬하면서 따라 배우라고 했던 ‘소부르주아 대중’의 동태나 ‘탄핵무효․반핵반대’ 소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겠는가에 대해서는, 결코 ‘좌파적’이지도, ‘맑스주의적’이지도 않은 󰡔디지털말󰡕의 5월 7일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그 대강을 시사할 것이다.


“‘기대할 것도 바랄 것도 없다.’ 대체로 냉랭한 반응이었다. 원래 이 기사는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부에 바라는 각계의 목소리를 들어 봄으로써 40여 년만에 의회권력마저 교체한 명실상부한 ‘개혁여당’의 과제를 환기시켜 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한가한’ 생각이었다. 직접 들어본 각계의 ‘기대치’는 결코 높지 않았다. 특히 민중운동진영[물론 세 분 맑스주의 교수님들은 빼놓고!: 인용자]의 ‘냉소’는 짐작을 훨씬 뛰어 넘었다. 이는 곧 지난 노무현 정부에 대해 민중들의 실망감이 얼마나 큰가 보여주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읽으셨소, 교수님들? 그리고 왜 내가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당신들을 그토록 경멸하고, 당신들이 치켜세우는 그 ‘대중’을 ‘천둥벌거숭이의 소부르주아 대중’이라고 부르고, 그들의 정치적 광기에서 ‘파시즘의 망령’을 보았는지 아시겠소? 



II. 이광일


한편, 나는 뒤늦게 󰡔진보평론󰡕 제20호(2004년 여름)에서 ‘민중탄핵론’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과 맞닥뜨려야 했다. “[특집] 한국사회 진보적 사회운동”의 한 꼭지로 실린, 이광일 성균관대 강사의 “신자유주의 시대 진보적 정치운동 노선의 방향 모색”이 그것이다.

이광일 씨의 이 글은 물론 남구현 교수 등의 글처럼 파렴치한 왜곡․날조․모략, 그리고 맹목적인 적대감으로 채워진 글도 아니고, “대통령 탄핵은 ‘헌정위기’, 혹은 ‘민주주의의 위기’는 아니었다”21)는 서술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국회에서의 탄핵소추안 가결을 저들처럼 터무니없이 ‘의회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민중탄핵론’을 비판하는 글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모종의 강한 당파성에 기초하고 있고, 바로 그 강한 당파성 때문에 그 당파성의 성격을 밝히면서 강하게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러한 글이다. 또한, 중요한 논점을 둘러싸고 오해와 전후당착, 그리고 개념 규정상의 동요 혹은 일관성 상실이나 그릇된 전제를 보여주고 있고, ‘민중탄핵론’에 대한 그의 비판 역시 다분히 그러한 오해와 당착, 그리고 동요와 그릇된 전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점 또한 명확히 밝혀지지 않으면 안 된다.



1. 노무현 정권의 성격, 그리고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


노무현 정권의 ‘역사적 위상이나 성격’과 관련한 논의부터 보기로 하자.

우선, 이광일 씨가 노무현 정권이나 열린우리당을 “‘진정 자유주의’(true liberalism)를 지향하는”22) 정치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 규정은, ‘진정 자유주의’라는 사유 자체가 대단히 사변적일 뿐만 아니라, 그가 노무현 정권을 기본적으로 “종속적 신자유주의와 무장한 세계화의 화신”23)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순전한 형식논리를 빌어서 ‘주관적인 지향’과 ‘객관적인 성격’은 다를 수 있다고 반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또한 그들의 무엇보다도 강한 지향이다.

이광일 씨가 쓰고 있는 것처럼 노무현 정권이나 열린우리당의 ‘역사적 위상이나 성격’은 그야말로 “종속적 신자유주의와 무장한 세계화의 화신”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자유주의’와 구별․혹은 병치(倂置)되는 “‘무장한’ 세계화”를 강조해서는 안 된다. 양자(兩者)는 병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장한) 세계화’야말로 신자유주의의 한 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른바 ‘세계화’ 그것이 ‘무장했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그것은 본질적․경향적으로 ‘무장한 세계화’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신자유주의의 이른바 ‘세계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현대 제국주의, 즉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이고, 그 주요한 주체의 하나인 다국적독점자본, 다국적독점금융자본의 잉여노동․잉여가치 착취 활동과 영역의 확대․심화이고, 제국주의 열강의 제3세계에 대한 지배․착취의 강화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배․착취의 확대․강화 자체가 어떤 형태로든 힘, 즉 폭력에 기초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고, 그러한 착취 및 지배의 강화는 “노동자 분신”이나 “농민 자살”24)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계급적․민족적 저항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폭력, 즉 무장을 불가피하게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여기에서 이 문제를 특히 제기하는 것은, “무장된 세계화에는 반대하는 ‘개혁시민운동’”25),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는 반대하지 않는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의 위선과 정치적 위험성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이광일 씨는 쓰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노무현 정권에 의해 가속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무장한 세계화에 대한 적극적 지지는 진보정치운동이 나가야 할 노선의 방향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원문대로!]. ... 무장한 세계화에 대해서는 시민운동진영에서조차 광범위하게 반대하고 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른바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조차도 한국사회의 ‘지체된 민주화’ 효과에 눌려 아직 명확한 반대의사를 제출하지 않고 있다. 즉, 이들은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인 (시장)합리성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과잉평가하는 오류를 방치하며 수정하지 않고 있다.26)


이러한 서술, 혹은 이른바 ‘세계화’에 대한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의 그러한 대응에서 우선 읽을 수 있는 것은, ‘무장한 세계화’와 ‘(무장하지 않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기계적․절대적 구별․분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그렇게 구별․분리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른바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이 소위 ‘무장한 세계화’에는 반대하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화’(?)에는 반대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그 양자가 그렇게 절대적으로 분리․구별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이유 때문일 뿐이다.

하나는, 그 양자를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지적 능력, 그 양자의 필연적 연관을 파악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의 결여. 다른 하나는, 다름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들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과 열린우리당 혹은 노무현 정권간에 ‘경향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정치적 커넥션’!27) ― 이 ‘정치적 커넥션’은 물론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이나 그들 단체를 주도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물질적 이해관계와도 불가분리하게 결합되어 있다.28)

참고로,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의 노무현 정권에 대한 지지, 그리하여 그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서 “아직 명확한 반대의사를 제출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소위 “한국사회의 ‘지체된 민주화’ 효과에 눌려” 그렇다고 파악하는 것은, 그들이 주관적․환상적으로 그렇게 사고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 어쩌면 그 때문에 예컨대 ‘민주 대 반민주’라는 환상적 전선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타당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다시, “이들은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인 (시장)합리성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과잉평가하는 오류를 방치하며 수정하지 않고 있다”고 파악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파악하는 데에는 저들의 “과잉평가하는 오류” 이전에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인 (시장)합리성의 효과”의 존재를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광일 씨 자신이 이렇게 쓰고 있다. 즉,


신자유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자신을 확대하면 할수록 모든 사회관계들을 파편화시키고 분절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사는 삶이라는 발상 자체를 부정한다.29)


신자유주의에는, 부산물로서든, 무어든, “합리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독점)자본의 탐욕뿐이다. 더구나 ‘시장의 합리성’을 인정하는 것은 경제과학의 그야말로 ‘자유주의’ 혹은 ‘고전파적’ 사고로의 퇴행이다. 시장에 존재하는 것은 합리성이 아니라 탐욕, 경쟁, 그리고 무정부성일 뿐이다. ‘시장합리성’이란 자본의 이데올로그들이 창조한 신화이고 선전일 뿐이다.

노무현 정권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과 관련하여 한 마디 더 덧붙인다면, 나는 이광일 씨가 노무현 정권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는 데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1) 군부독재 하에서의 자유주의적 정치세력, 특히 “이른바 재야 민주화운동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자유주의 좌파, 혹은 ‘민중지향적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2) “이 정치세력들은 군부, 수구파시스트세력들과 정치적으로 대결해 왔음에도 한국사회의 발전방향 등에 있어서는 그들과 근본적으로 대립하지 않았”고,

3) “물론 정책 수준에서 이들 사이에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 사이에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였던 핵심요인은 권력에의 접근가능성이었다”고 파악하는 점.30)

4) 그리고, 한국사회의 “지배엘리트들은 그들이 파시스트이든, 자유주의 정치세력이든 항상 [미 제국주의와의 : 인용자] ‘초민족적 계급동맹’의 일원”31)이었으며, “70년대 이후 파시스트 ‘개발독재세력’과 ... ‘민중지향적 자유주의 정치세력’ 사이에 조성된 오랜 대립은 신자유주의로 수렴, 해소되었”으며, “노무현 정권은 자유주의세력이 걸어온 이러한 역사적 궤적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32)고 파악하고 있는 점, 등등.

대립하는 양대 정치세력 사이에 ‘한국사회의 발전방향 등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대립하지 않았으며, 대립과 갈등의 핵심요인은 권력에의 접근 가능성’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대립이 “신자유주의로 수렴, 해소되었다”는 것은, 그 양대 세력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노무현 정권을 가리켜서 ‘좌파 정권’이니 ‘친북 세력’이니 하며 각을 세우고 있는 “수구정치세력들 또한 신자유주의세계화의 가속에 의한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면 될수록”, 즉 반노동자․반민중적인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강행되면서 노․자간, 독점자본과 인민간의 대립과 갈등, 투쟁이 증폭되면 될수록,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가 ‘진정 자유주의세력’의”, 즉 노무현 정권이나 열린우리당의 “행보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33)고 전망할 수 있는 근거도 바로 그러한 계급적 이해의 동일성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이른바 ‘과거사 청산’을 둘러싸고 서로간에 ‘연좌제’니 뭐니 하면서 벌이고 있는 희극성 이전투구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역사적으로 계급적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34)

여기에서 ‘그 양대 세력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점은, 예컨대 이번의 ‘탄핵정국’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기본적으로, 노동자계급운동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개혁


다음엔 이른바 ‘개혁’에 관한 논의에 대해서 보자.

이광일 씨는 이렇게 쓰고 있다.


노동법개정을 둘러싼 [1996년 말-97년 초의: 인용자]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개혁 프로그램’의 실체를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35)


그 ‘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통해서 확인된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개혁 프로그램’의 실체”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반노동자성․반민중성 그것이다. 또한, 이광일 씨는, 어떠한 동기에서든, 이렇게 쓰고 있다.


...은 오히려 다가올 수도 있는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으로의 전화를 경계하고 막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36)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의 등장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당연히 ‘개혁’을 주관적․환상적으로 ‘바람직한 것’으로만 파악하는 대신에 그 객관적 ‘실체’와 그것이 야기할 수 있는 효과․영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하는 자세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개혁’에 관한 이광일 씨의 인식은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 등이 가당찮게도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의 개혁성이 한계가 있다고 이를 반대함으로써 사실상 ...” 운운하는 것과는 천양지차로 다르다.

그러나 이광일 씨의 경우, 이러한 객관적 인식이 시종 여일하게 유지되지 못하면서 심한 동요와 전후당착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서술을 보자.


노무현정권은 수구파시스트정치세력들과 타협하며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수행해 온 ‘개혁 실패’의 산물일 뿐이다. 한국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의 실패는 진보정치세력의 급진성과 전투성 때문이라기보다 권력의 독점 혹은 분점을 위해 파시스트 정치세력들과 타협을 반복해 왔던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그 오랜 ‘조합주의’ 때문인데 ....37)


그 개혁은 ... (정치)부패청산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다.38)


이번 ‘탄핵정국’은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대결’, 정확히 이야기하면 [한나라당이나 자민련 등의 : 인용자] 파시즘에 대항해 모든 민주세력들이 벌인 ‘반파시즘투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과 반개혁’, ‘민주 대 반민주’라는 성격이 부각되었던 것은 ...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집권과 그들의 개혁실패가 가져온, 이른바 ‘지체된 민주주의’(creeping democracy)의 정치적 효과이다. ... 이들[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 등: 인용자]이 ‘개혁과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으로 다시 부각되었다....39)


자, 서술이 이렇게 되면, 여기서의 ‘개혁’은 (노동자․인민의 입장에서도) 무언가 이루어야 할 ‘바람직한 무엇’, 남구현 교수 등이 “개혁성이 한계가 있다고 ...” 운운할 때의 ‘개혁’과 사실상 같은 의미가 된다. 그 ‘개혁’이 갖는 객관적인 성격, 그 친독점자본적․반노동자적․반민중적 계급적 성격은 탈각되어 버리고, 주관적 환상만 남는다.

물론, 이때의 ‘개혁’의 의미는 “‘더 많은 민주주의’의 실패”라든가, “지체된 민주주의”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주로 ‘정치개혁’을 염두에 둔 것이고, 그 ‘실패’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한 항변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객관성․계급성을 잃은 ‘주관적 환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선, 저들이 떠들어 온 ‘정치개혁’을 ‘더 많은 민주주의’의 보장이나 “(정치)부패청산”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사실이나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저들의 선전과 자신의 주관적 소망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정치개혁’의 실제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1961년 5월의 군사 쿠데타 이후 권력의 주체가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어 온 ‘구악 일소’니, ‘사회정의 구현’이니, ‘사정’이니, ‘정치개혁’이니 하던 소동이 결국 무엇이었는가를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부패의 청산’이 아니라 ‘부패구조의 개편’이었고, ‘불법적’ 정치자금 배분구조의 변경이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 자신의 고백에 의하더라도 노무현 정권이나 열린우리당은 결코 ‘깨끗한 손’이 아니다. 철면피하게도 “한나라당의 10분의 1밖에 안 된다”는 말을 당당히 내뱉고 있다. 그런 ‘도덕성’ 위에서 벌이는 ‘정치개혁’이라면, “10분의 1 대신에 10분의 9”를 차지하기 위한 소동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훨씬 더 논리적일 것이다.

나는 ‘탄핵정국’의 한 가운데에서 쓴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는 글에서 이미 이러한 판단을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수십억․수백억의 뇌물․정치자금을 건넨 재벌총수들에 대한 검찰의 ‘처벌’을 보면서, 다른 글에서 나는 이러한 판단을, ‘바다에 내던져지는 잔혹한 극형을 선고받는 상어’의 우화를 원용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했었다.


그들 ‘정치개혁’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정적에 대한 탄압이었고, 새로운 권력집단 중심의 ‘정치자금 배분구조의 재편’, 즉 ‘부패구조의 재편’이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개혁’도 그러한 것으로서 ‘10분의 1’ 대신에 ‘10분의 9’를 점하기 위한 ‘개혁’에 불과하다.

설마?

그렇게 순진하다면, 저 서슬 퍼렇던 검찰의 정치자금 수사가 수백억․수십억의 불법정치자금을 건넨 재벌총수들을 어떻게 처벌했는가를 보라. 그들을 구속 처벌하는 것은 그들이 저지른 용서할 수 없는 뇌물죄 등에 비해서 너무나 관대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잉여노동착취에 고통받도록 잔인하게 처벌하지 않았는가! 바로 상어를 바다에 내던진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잔혹하게도 노무현 대통령은 5월 25일 청와대에서 삼성그룹 회장, LG그룹 회장, 현대자동차 회장 등 재벌총수 15명을 비롯한 대기업 대표 18명과 간담회를 갖고, “기존 思考의 틀, 예컨대 형평성이나 특혜와 같은 시비, 이런 사고의 틀을 근본적으로 깨고,” 규제개혁을 위한 정부․경제단체 간 협의사항을 직접 점검하여 투자를 가로막고 있는 규제를 개별적으로 검토, “적극적으로 풀어나가겠다”는 처벌을 추가하였다!40)


또한,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는 글에서는 나아가, “게다가 사실은,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자․민중으로부터의 착취 그 자체이지, 그 착취된 잉여가치가 이건희의 주머니로 들어가든, 노무현이나 이회창의 주머니로 들어가든 중요하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문제이고 그들의 투쟁이고,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개혁’”이라는 말로, 이른바 ‘정치개혁’에 대한 소부르주아적 관점을 비판한 바 있다.41) 좀 더 명확히 얘기하자면, ‘정치개혁’이란 것이 설령 ‘부패청산’ 작업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르주아 지배의 합리화이고, 따라서 그 강화이지, 결코 노동자․민중적 프로젝트는 아니다. 그것이 ‘개혁’이란 이름으로 마치 ‘전국민적’ 프로젝트인 것처럼 선전되는 것은, ‘전국민적’이라는 설정 자체가 그러한 것처럼, 노동자․민중에 대한 부르주아지 및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이데오로기적 지배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아무튼, 이러한 견해가 이미 명확히 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광일 씨가 사실상 아무런 사실상의, 그리고 논리적 근거도 없이 ‘(정치)개혁’이라는 선전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3.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경계론’


‘탄핵정국’에서 “탄핵무효”를 외치던 ‘정치적 광기’를 가리켜서 “소부르주아계급의” ‘혁명적 투쟁’으로서의 “지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라고 규정한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가 그 전형적인 인간들이겠지만, 아무튼 노무현 정권과 그 아래에서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민주주의’라고 파악하던 사람들은, 동일한 현상을 내가 “파시즘의 망령”, “소름끼치는 정치적 광기”42)로 규정하고, 또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의 가능성을 제기했을 때, ‘파시즘’이라는 말에 놀라 그것을 상당한 충격, 아니면 도무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망발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상대방이 무슨 얘기를 하는가를 차분히 파악하지도 않은 채, 그토록 자기 멋대로의 반응을 보일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예컨대, 왜곡과 모략이 그들의 장기이긴 하지만,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는 다음과 같이 초들고 나섰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중들의 탄핵반대 시위는 민주주의와 계급투쟁을 예비하는 중요한 정치학교의 성격을 지닌다. ... 그런데 좌파 일각의 대응은 그러한 태도를 취하기는커녕 탄핵반대가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에 자리를 내주는 것 내지 몰계급적 입장이라고 비판하였다.


‘신자유주의=파시즘’이라는 등식 역시 현실의 복잡한 제 관계들을 가리는 극히 단순화되고 과장된 도식일 뿐이다. ....

... 현 노정권과 그 지지세력을 한 움큼으로 싸잡아서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단정하는 것은 이론적 오류이자, 실천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

나아가 민중탄핵론이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노무현정권=파시즘이라는 도식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마치 구체적 현실인 것으로 상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나아가 만의 하나 노정권이 파시즘화될 경우 필연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는 대중운동의 역할과 가능성을 아예 원천적으로 부정한다.43)


이들에 의하면, 탄핵국면에서의 논쟁에서 나는, 그 당시의 사태를 보면서 ‘소부르주아 대중’의 그러한 정치적 광기가 자칫 불러올지도 모를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파시즘’이라는 등식”에 기초하여, “노무현정권=파시즘이라는 도식” 아래 “노정권과 그 지지세력을 한 움큼으로 싸잡아서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단정”한 것이 된다! 다시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마치 구체적 현실인 것으로 상정” 혹은 “단정”한 것으로 된다! 그런 터무니없이 미친놈이 된다. ― 명백한 왜곡․날조․모략 아닌가?!

“‘신자유주의=파시즘’이라는 등식” 운운하면서 그들은 혹시 내가 󰡔노동자 교양경제학󰡕에서 신자유주의를 설명하면서 주요하게 “파쇼국가화”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점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44)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다. “파쇼국가화”란, 다름 아니라, 신자주의의 이른바 ‘세계화’, ‘지구화’, ‘경제적 재생산 과정에서의 국가 배제’, ‘규제완화’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와 함께 일부에서 횡행하는 ‘국가약화론’에 대한 비판이었고, 신자유주의, 즉 착취와 빈곤의 강화 혹은 심화에 따른 대중의 저항과 그에 대한 독점자본으로서의 대응으로서 ‘계급지배도구로서의 국가’45)의 기능이 어떻게, 얼마나 강화되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나는 거기에서 미국에서의 수감자 수의 증대, 일본의 군국주의화, 김대중 정권 하에서의 국가보안법 구속자 수의 증대, 그리고 ‘지적재산권’ 보장을 위한 경찰과 사법기구 등 국가의 억압기능의 증대 등등을 예로 들면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물론, 국가의 이러한 억압기능의 강화 및 증대를 ‘파쇼화’로 규정하는 것이 ‘파시즘’의 개념과 관련하여 타당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서 간단히 보기로 하자.)

‘파시즘’과 관련한 이광일 씨의 논의로 가 보자.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문제, 혹은 그 ‘경계론’에 대한 이광일 씨의 태도는 남구현 교수 등보다는 훨씬 개방적이자 유보적이지만, 역시 상당히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또 이중적이다.

우선 그는 ‘파시즘’이라는 술어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을 들어 사실상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주지하듯이 파시즘은 역사특수적인 물적 조건을 기반으로 할뿐만 아니라, 흔히 언급하듯 최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공개적 테러독재’이다. 파시즘의 지배는 ‘일반민주주의’에 동의하는 모든 민주, 진보세력들의 정치적 패배를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노무현정권을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보거나, 혹은 선험적으로 그렇게 발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탄핵정권을 단지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로, ‘민주세력 대 수구정치세력’의 대결로 협소하게 규정하는 인식만큼이나 커다란 실천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46)


이 인용문의 전반부의 명제, 즉 “파시즘은 역사특수적인 물적 조건을 기반으로 할 뿐만 아니라, 흔히 언급하듯 최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공개적 테러독재’”이며, 따라서 “파시즘의 지배는 ‘일반민주주의’에 동의하는 모든 민주, 진보세력들의 정치적 패배를 의미한다”는 것이, 후반부의 판단의 전제이다. 그리고 이 명제는 타당하면서도, 동시에 부족하고,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타당한 이유는 ‘파시즘’의 개념을 그렇게 협소하게 파악하는 것이 (부르주아) 아카데미즘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명제는 그러한 전통 위에서 전적으로 타당하기에는 많이 부족하고 엄격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론적 전통에 의하면, ‘파시즘은 역사특수적인 물적 조건을 기반으로 한다’는 추상적 조건 규정만으로는 부족하고 “독점자본의”라는 주체가 명시되어야 하고, 또한 거기에 다시 “그 위기”라는 구체적 조건이 명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부족한 것은 “선전․선동을 통한 소부르주아지 혹은 ‘중간계급’ 대중의 포섭과 동원”이라는 핵심적인 조건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위 명제는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아카데미즘의 전통에 따라서 ‘파시즘’의 개념을 그렇게 협소하게 파악하면서, 동시에 거기에 “흔히 언급하듯 최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따위의 엄격하지도, 과히 아카데미즘적이지도 않은 개념을 혼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렇다. 즉, 일상의 정치생활에서 ‘파시즘’ 혹은 ‘파시즘화’, 그리고 그 위험을 얘기할 때, 우리는 통상 ‘엄격하고 협소한 아카데미즘적인’ 개념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흔히 언급하듯’ 하는 개념을 염두에 두는 것이라고. 더구나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이나 제3세계의 ‘군사파쇼’ 등처럼, 앞에 형용어가 붙는 ‘파시즘’의 개념은 특히 그렇다. 즉, 그것은 억압적 정치체제를 가리키고, 그러면서도 ‘선전․선동에 의한 소부르주아지의 대중의 포섭과 동원’을 그 요건으로 염두에 두는 것이다.

사실 같은 글에서 이광일 씨도 ‘수구정치세력’이라는 용어와 ‘수구파시스트 정치세력’이라는 용어를 사실상 동일한 세력을 지칭하기 위해서 동원하고 있다. ‘파시즘’의 개념을 그렇게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그 ‘역사특수적인 물적 조건’의 존재를 부인한다면,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용어법이다. ‘파시즘’ 없는 두려운 ‘수구파시스트 정치세력’의 존재를 말하는 당착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론 내가 지금이나 ‘탄핵국면’ 당시나 “노무현정권을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보거나, 혹은 선험적으로 그렇게 발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협소한 ‘파시즘’ 개념을 가지고 제기된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혹은 ‘그 경계론’을 재단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또한, “노무현 정권을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과 ‘파시스트화 경향’을 강화시킬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47)라든가, “‘파시즘화 경향’과 ‘체제로서의 파시즘’ 사이의 정치적 간극을 명확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48)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서는 타당하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혹은 ‘그 경계론’을 제기한 나나 ‘민중탄핵론’을 비판하는 데에는 동원될 필요가 없는 군더더기, 혹은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해를 야기하는 부정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문면에서 명확한 것처럼, 우리가 제기했던 것은 당시의 소동, 당시의 정치적 광기가 노무현 정권의 권력 독점과 더불어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으로 발전․전화될 위험성을 경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광일 씨가 극히 추상적으로나마 그 ‘가능성’을 제기한 의도야 우리와 다르지만, 아무튼 “다가올 수도 있는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의 전화를 경계”49) 운운한, 바로 그것이 우리의 문제의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고로, 남구현 교수 같은 이는 예컨대, “[탄핵정국과 4․15총선을 통해서: 인용자] 변화된 정치지형 속에서 신자유주의 반대전선은 무너지지 않았다”거나, ‘탄핵 반대’를 내세웠던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사정 대표자회의’니, ‘사회적 합의주의’니 하면서 노동운동이 심각한 위기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 “... 노사정위원회․사회적 합의주의 역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운운하고 태평하게 지껄여대고 있다.50) 하지만, ‘탄핵정국’의 연장선상에서 4․15총선을 통해서 형성된 제도정치구도는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이제 권력 내부의 암투와 노동자․민중의 저항 이외에는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이는 데에 더 이상 어떤 장애도 없게 되었다”51)는 게 나의 판단이다.



4. 대중


‘민중탄핵론’에 대한 이광일 씨의 평가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좌편향을 범했다’는 것이다. “‘민중탄핵론’을 둘러싼 논쟁의 뒤에 어른거리는, 과거 대중운동과 격리된 진보정치세력들이 노정하곤 했던 ‘좌우편향의 그림자’를 정확히 보는 것이 필요하다”52)라는 서술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평가는 전혀 잘못된 전제와 ‘민중탄핵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 차리리 그에 대한 선입관에 근거해서 내려진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내가 앞에서 “‘민중탄핵론’을 비판하는 데에는 동원될 필요가 없는 군더더기, 혹은 오해를 야기하는 부정적인 요소”라고 지적했던 명제들, 즉 “노무현 정권을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것과 ‘파시스트화 경향’을 강화시킬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라든가, “‘파시즘화 경향’과 ‘체제로서의 파시즘’ 사이의 정치적 간극을 명확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등의 발언이 결코 그냥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중탄핵론’ 혹은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 경계론’에 대한 일정한 선입관을 반영하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선입관 위에서 이와 같은 평가가 내려지고 있는 것이다.53)

다음에는, 그 평가에는 이른바 ‘대중’의 문제가 주요하게 개재되어 있는데, ‘파시즘’ 문제와도 어울리면서 이 ‘대중’의 문제가 전혀 그릇되게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중의 정치의식이 어떤 계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상승하는가, 노동자 계급 운동이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정세 속에서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가, 등등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의식이 없거나 기본적으로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광일 씨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진보적 역할’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신자유주의시대에 변화하고 있는 국민국가의 위상 및 역할에 조응하여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더 이상 대중이 직면한 삶의 고통을 자기문제화 할 수 없”고, “따라서 ‘진보’라는 담론을 더 이상 내세울 수 없”다며, “‘진보’로 표현될 수 있는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의 ‘역사적 임무’는 이제 마감되었다”54)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주의 정치세력’으로 하여금 그렇게 그 ‘역사적 임무’를 끝낼 수밖에 없도록 만든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아래에서 고통받고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농민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합리성[이것이 신화․선전일 뿐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다: 인용자]으로 스스로의 개혁성을 극대화시키려 하지만, 기존의 비대칭적, 억압적인 사회관계들을 자본이 압도하는 것으로 재편하는데서 그 존재이유를 찾기 때문에, 이미 그것은 ‘정치적인 것’ 혹은 ‘’정치‘이다. 따라서 시장의 전제에 맡겨진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그들 가운데 다수는 여성이다―와 이주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할 의미 있는 정치적 기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들은 스스로 조직하고 투쟁할 뿐이다. 바로 이것이 신자유주의시대 노동자 분신의, 농민 자살의 근본 이유이다.55)

그리하여 정당하게도 이렇게 주장한다. 즉,


지금 글로벌 신자유주의, 무장된 세계화로 고통받는 대중의 삶을 생각할 때, 그것을 강제하는 사회관계들, 그것의 정치적 응집체인 노무현 정권의 해소 및 극복은 한시도 간과할 수 없는 핵심사안임이 분명하다.56)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정말 절실한 현실적인 실천이라는 문제에 이르면, 앞에서 본 것처럼, 그는 ‘대중’을 거론하면서, “좌우편향의 그림자”를 거론하면서, “스스로 조직하고 투쟁”하려는 노동자들에게 ‘소부르주아 대중’의 꽁무니를 따르고, ‘탄핵반대’의 촛불을 들고 신자유주의의 집행자, 신자유주의 정권을 보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가 어떠한 수법을 써서, 보다 정확하게는 어떤 궤변적 논리를 동원해서, 전진하려는 노동자 계급 운동을 그렇게 소부르주아 대중의 꽁무니에 묶어두고, 신자유주의 권력의 지지대열로 편재시키려 하는지를 보자. 그는 말한다.


내용적으로 ‘민중탄핵론’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무장한 세계화에 대한 반대를 핵심 내용으로 하기 있기에, 그리고 이미 살펴본 것처럼 노무현정권이 그 정점에 있기에 구조적으로 항상 유효한 전술이다.57)


‘민중탄핵론’이 이렇게 “구조적으로 항상 유효한 전술”이었다면, 그의 언설은 여기에서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소부르주아적 존재조건이 강제하는 열정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언설은 그리하여 이렇게 이어진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주장은 하나의 화두와 같은 것이다”라고. “화두와 같은 것”이라니?! ― 쉽게 말하자면, 그냥 스쳐가듯 발설할 수는 있겠지만, 진지하게 제기하고 실천적으로 추구하지는 말라는 뜻일 게다.58)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민중탄핵론’을 “신자유주의와 그 집행자로서의 노무현 정권이라는 구체적 정세 속에서 유효한 전술”로 규정하는 대신에 시쳇말로 뜬금없이 “구조적으로”라고 규정하고, 게다가 “항상” ‘유효한 전술’이라고 규정했을 때, 사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글은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이것은 ‘민중탄핵론’을 구체화할 경우, 현재의 정치지형, 사회관계들의 배치 등을 충분히 고려함을 의미한다. 명료하지는 않지만, ‘민중탄핵론’에는 노무현정권을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보거나, 아니면 그러한 성격으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발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자, 얼마나 흥미로운가! “‘하일 노무현’을 저지해야” 한다거나,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명백히, 당시의 언필칭 ‘진보적 언론’, ‘진보적 지식인’과 그 단체들, ‘진보적 시민운동 단체들’, 게다가, 오늘날 ‘사회적 합의주의’에 집착하는 이수호 민주노총 집행부와 민주노동당 등까지 나서서 소부르주아 대중을 동원하여 벌이던 정치적 광기를 보면서,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의 등장 가능성을 경계한 것이었다. 민주노총․민주노동당 등조차 전도된 현실인식에 기초해서 ‘개혁!’, ‘개혁!’하며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을 옹호․보위하고 있는 현실이 초래할 위험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문면에서 다툼의 여지가 없이 명확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광일 씨는 자신의 당파적 선입관을 개입시켜서 우리가 “노무현정권을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보거나, 아니면 그러한 성격으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더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극히 협소하고 불충분하게 규정된 ‘파시즘’ 개념을 동원하면서, 그리고 그것도 “명료하지도 않은” 판단을 내세워, ‘민중탄핵론’을 좌편향으로 단죄하고 있다.

이른바 좌편향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가 제기하는 또 다른 논점은 ‘대중’, ‘진보정치세력들의 정치적 역량’, 혹은 전술의 ‘현실적합성’이다. 그는 말한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검증할 수 없었던 진보정치세력의 현존재와 그들의 과소한 정치적 영향력이었다”라고.59)


대략 맞는 말이다. ‘진보정치세력’이 아니라 ‘혁명적인 노동자 정치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직 과소하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검증할 수 없었”다는 말은 부정직한 레토릭이다. 인터넷상의 정치공간을 위시해서 여러 대중적 정치공간에서, 그리고 수많은 노동현장에서 ‘진보적 지식인’ 등이 소부르주아 대중을 선동하여 벌이는 일대 신자유주의 정권 보위소동을 냉소하고, ‘민중탄핵론’으로 그와 싸우고 있었던 것을 이광일 씨 자신 명확히 확인․검증하고, 그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위 인용문 가운데 ‘...’로 생략한 부분. 그 부분은 이렇다. “그 대중의 촛불 속”! ― 말하자면, 그의 소망은 ‘진보적인 노동자세력’을 그 소부르주아 대중의 촛불 속에서 검증하고 싶었다는 것이고, 그런데 그걸 검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 등이 그 때문에 히스테리를 부리면서 ‘좌익소아병’이라고 적대했던 것처럼!60)

‘정치적 역량’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광일 씨는 말한다.


사회경제적, 정치적 ‘위기’는 지금 그러한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작 그 위기를 해소,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이, 헤게모니가 누구의 손에 있는가에 따라 그 성격과 깊이를 달리한다.


지금 글로벌 신자유주의, 무장된 세계화로 고통받는 대중의 삶을 생각할 때, 그것을 강제하는 사회관계들, 그것의 정치적 응집체인 노무현정권의 해소 및 극복은 한시도 간과할 수 없는 핵심사항이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민중탄핵론’에서 주장하는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친다는 것에 대한 규범적 정당성을 넘어서는, 현실정합성을 보장하는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것은 결국 수구파시스트세력은 물론 열린우리당으로 상징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들, 그리고 경향적으로 이들과 ‘정치적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는[이를 인정하는 한에서 정직하다: 인용자], 하지만 무장된 세계화는 반대하는 ‘개혁시민운동’을 포함, 이들을 지지하는 대중들과 대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진보정치운동세력들의 역량을 고려할 때,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61)


이광일 씨는 지금, “노무현정권의 해소 및 극복은 한시도 간과할[정확하게 말하면, ”지체할“: 인용자] 수 없는 핵심사항”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러한 ‘규범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민중탄핵론’에서 주장하는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친다는 것”이 ‘현실정합성’이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진보정치운동세력들의 역량을 고려할 때,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는 표현으로 그 ‘현실정합성’을 완곡하게 부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민중탄핵론’으로 상징되는 선진적인 노동자․민중조차 “열린우리당으로 상징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들, 그리고 경향적으로 이들과 ‘정치적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는, ‘개혁시민운동’”, 즉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꽁무니에 묶어두고, 그 지지자의 대열에 세우려 하고 있다.

‘정치적 역량’과 ‘현실정합성’ 여부를 묻는 그의 화법이 그럴 듯하게 들리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민중탄핵론’에서 주장하는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친다는 것”을 은연중에 마치 조직과 ‘세력’의 당장의 생사를 건 봉기라도 되는 것처럼 과장하여 제시하기 때문이다.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 등이 터무니없게도 “과거 같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을 의회쿠데타” 운운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친다는 것은 그렇게 당장이 생사를 건 봉기․반란을 일으키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제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노동자 대중의 정치의식의 고양, 정치적 조직의 확대를 위해 그러한 전선을 치자는 것이다.

이 교수의 소설(所說)에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상승하고, 확대․강화되는가 하는 문제의식조차 없다. 있는 것은, “선거는 정치의 전부일 수 없지만, 대중이 지배세력, 지배권력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지표”62) 따위의 정태적인 진단밖에 없다. 게다가, 각종의 잡다한 ‘포스트주의’에 안달하는 요즘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유행어를 빌려서 얘기하자면, 여기에서 ‘대중’이라고 ‘호명’된 사람들은 천둥벌거숭이의 소부르주아 대중과, 그들 및 자본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일부 노동자․민중이다.

‘민중탄핵론’ 등이 당장의 목표로 삼는 것은 ‘반신자유주의 봉기’나 ‘반란’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낙후된 대중의 정치의식을 개발․상승시키고, 그들을, 어쩔 수 없는 노예의 언어로 말하자면,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적인 정치적 대오’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지금 중요한 작업의 하나가 바로 독점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의 전달 벨트인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대결이다. 


5. 기타

이광일 씨의 ‘비판’ 혹은 ‘진보적 정치운동 노선의 방향 모색’과 관련해서는, 이상에서 논의한 문제점 외에 󰡔진보평론󰡕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민주노동당 강령 논쟁’63)에 관한 인식이나, 특히 “향후 진보적 정치운동노선을 생각할 때, 첫 번째 관심은 이들 논의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긴장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인데, “그것은 바로 ‘제도정치’와 ‘운동정치’ 간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64)라는 등의 인식에 관해서 상세히 논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면상의 문제와 내 자신의 시간상의 문제로 결론만을 말하는 식으로 간단히 처리하자.

우선, 이광일 씨가 ‘진보진영’ 혹은 ‘진보적 정치운동’ 등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노동자․민중운동의 현 상황을 보면, 더구나 이광일 씨처럼 거기에 ‘시민운동’의 일부까지를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을 한 그릇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광일 씨와 같은 ‘진보적 지식인’에게 절실한 문제의식은 ‘진보적 정치운동’이겠지만, 지금 한국의 노동자계급에게 절실한 문제의식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정치운동’이다.

한편 그는 ‘민주노동당의 강령 논의’까지를 언급하면서, “총노선에 대해 민주노동당, 사회당 그리고 ‘노동자의 힘’ 등 진보진영 내부에서의 이견은 보이지 않는다”며,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획득하기 위한 방식과 대안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65) 그러나 그의 판단이 객관적 상황과 합치하기 위해서는 그 ‘총노선’의 외연과 내용이 사실상 무의미할 만큼 넓어지고 희석되어야 하고, 그 ‘총노선’이 의미 있는 내용을 가진다면, 거기에는 엄청난, 많은 면에서 화해할 수 없는 이견이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기저에 흐르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긴장’은 “‘제도정치’와 ‘운동정치’ 간이 관계를 둘러싼 문제”가 아니라, 보다 깊은 정치노선, 사상․이념상의 차이이다. 예를 들면, 표현된 강령을 기준으로 판단하자면 ― 또 그것이 올바른 판단 기준일 것이다 ―, 민주노동당의 기본노선은, 본인들이 주관적으로는 어떻게 인식하든,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소유가 아니라 그 사적소유에 기초한 ‘소부르주아 평등주의’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 여러 단체는 이와 전혀 다르고, 그 차이는 결정적이다.

한가지만 더 얘기하자. 이광일 씨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동일성’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그 어느 때보다 구조적으로 위협받고 있다”66)고 쓰고 있다. 즉 그에 의하면,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동일성’이 민주주의 핵심인 셈이다. 그러나 계급사회에 그러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그렇게 파악하는 것은 선전이고, 관념론적 사고의 소산일 뿐이다.

계급사회에 존재하는 것은, 민주주의든, 아니든, 단지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인가’(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니면 ‘다수에 의한 소수의 지배인가’(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일 뿐이다.




III.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


이제 결론을 내야 할 때가 되었다.

이 치열했던 논쟁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 등이 진한 적대의식으로 사기를 쳐서라도 관찰시키려 했던 것의 바탕에는 도대체 어떤 문제가 놓여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 문제이다. 저들이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사기를 치면서까지, “중간계급에 대한 정교한 계급론적 문제설정을 망실”했느니 어쩌니,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라는 진보적 정세분석론의 원칙과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했느니 어쩌니 하면서,67) 그토록 집착한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을 부인하고, 노동자 계급 운동을 그들이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이라고 부르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운동에 종속시키려는 것이었다.

‘탄핵정국’이라는 ‘구체적 상황’은 바로 엊그제 우리가 경험한 대로이고, 또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논쟁의 세세한 문제점이 무엇이었는가는 명확해졌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문제, 즉 그러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맑스(와 엥겔스)는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했는지를, 저들 세 분 ‘맑스주의’ 교수님들의 사기적 언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맑스와 엥겔스 자신의 발언으로 들어보기로 하자. 물론 “맑스는” 어쩌구 운운하는 저들의 사기적 언설을 상기하면서.

그런데 예비적으로 얘기해두자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의 관계,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은 19세기 중엽 독일의 ‘노동자 계급 운동’에서도 중요한 문제의 하나였고, 이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좌․우 편향, 기회주의가 발생하곤 하였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반동세력들과 권력을 다투고 있던 1848년 혁명 이후의 수년간에는 그러한 혼란은 더욱 심각했다. 

그리하여 맑스와 엥겔스도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1850년 3월에 동맹원들에게 보내는 중앙위원회의 호소”(Karl Marx/Friedrich Engels, "Ansprache der Zentralbeho"rde an den Bund vom Ma"rz 1850", MEW, Bd. 7, SS. 244-254)라는 짧은 글이다.

시대와 국가, 그리고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이 다르고, 또 정치세력의 성격과 그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특히 전술 운용의 주체인 노동자 정치조직의 상태와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맑스와 엥겔스의 견해, 그들이 제시하는 전술 원칙이 현재의 우리 상황에 그대로 대입될 수는 물론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 글은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일반적인, 극히 중요한 전술 원칙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체적 상황의 차이 등 이런저런 요소를 고려하면서 읽는다면, 예컨대 지난 ‘탄핵정국’과 같은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명확히 알 수 있다.68)

우리의 전술 운용과 관련하여 중요한 부분을 보기로 하자.

우선 당시 논란의 대상으로 되었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 혹은 그 정당의 구성은 이러하였다.


독일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가 1848년에 인민에 대해서 연출한 역할, 이 그토록 배반적인 역할은 다가올 혁명에서는, 오늘날 반대파 속에서 1848년 이전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동일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에 의해서 계승될 것이다.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이전의 자유당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이 당, 민주당은 세 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I. 대부르주아지 가운데 봉건주의와 절대주의를 즉각적으로 완전히 타도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가장 진보적인 부분. ...

II. 민주주의적-입헌주의적 소부르주아...

III. 공화주의적 소부르주아. 그들의 이상은 스위스 류의 독일 연방공화국이며, 그들은 지금 스스로 적색 혹은 사회민주적이라고 자칭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소자본에 대한 대자본의 압박, 소부르주아에 대한 대부르주아의 압박을 폐지하려고 하는 경건한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69)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이들 집단은 그 구성원의 성분과 정치적 지향에서 열린우리당이나 노무현 정권의 주요 인사들보다 훨씬 ‘진보적’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열린우리당이나 노무현 정권보다는 민주노동당 쪽에 더 가까운 집단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을 가리켜서 맑스와 엥겔스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가 1848년에 인민에 대해서 연출한 역할, 이 그토록 배반적인 역할은 다가올 혁명에서는, 오늘날 반대파 속에서 1848년 이전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동일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에 의해서 계승될 것”이며,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이전의 자유당보다도 훨씬 더 위험”하다고 판단․규정하고 있다. “맑스는” 운운하는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 등과는 그야말로 정반대의 판단․규정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반동적 신자유주의의 ‘화신’이라면,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의 정치적 정책 성격은 무척 ‘진보적’이지만, 동시에 특유의 계급적 성격으로 각인되어 있다.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위해서 전체 사회를 변혁하려는 것과는 아주 멀고, 그들에게 현존의 사회가 최대한 견딜 수 있고 편안하게 되는, 그러한 사회상태의 변화를 위해서 노력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엇보다도 관료제도의 제한에 의한 국가지출의 축소, 그리고 주요 세금의 대토지소유자 및 대부르주아에게의 부과를 요구한다. 그들은 나아가 공공신용기관의 설립과 고리대 단속법(Gesetze gegen den Wucher)을 통해서 그들 자신과 농민이 자본가로부터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유리한 조건으로 대부를 받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소자본에 대한 대자본의 압박을 제거할 것, 나아가 봉건제의 완전한 일소를 통해서 농촌에 부르주아적 소유관계를 실시할 것을 요구한다. 이 모두를 실시하기 위해서, 그들은, 입헌주의적이든 공화주의적이든, 그들과 그들의 동맹자인 농민을 다수이게 하는 민주적인 국가체제를, 그리고 현재는 관료에 의해서 집행되고 있는, 자치제 재산 및 일련의 기능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자신의 수중에 주는 민주적인 자치체제를 필요로 한다.

자본의 지배와 그 급속한 증대는 부분적으로는 상속권의 제한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는 가능한 한 많은 일을 국가에 이관함으로써 억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자에 관해서는 그들이 앞으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임금노동자로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확고히 하고 있는데, 다만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는 노동자들에게 보다 나은 임금과 보다 안정된 생존을 원하고, 국가에 의한 부분적 고용과 자선적 조치를 통해서 이를 달성하기를 원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많건 적건 은폐된 적선을 통해서 노동자들을 매수하고자 하고, 그들의 상태를 당분간 견딜 수 있게 만듦으로써 그들의 혁명적 힘을 분쇄하려고 한다.70)


그리하여 이들 소부르주아 정치세력에 대한 노동자 계급 운동의 기본적 태도에 대해서 맑스와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에 대한 혁명적 노동자당의 관계는 이렇다. 즉, 혁명적 노동자당은 자기가 타도하려고 하는 분파에 대항해서는 그들과 함께 한다. 그들이 자신들을 강화하려고 하는 모든 경우에는 그들에 반대한다.71)


구체적 상황에 따라서 시기별로 다를 수밖에 없는 전술 원칙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혁명이 더욱 발전하는 동안에 소부르주아 민주당이 독일에서 일시적으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와 특히 동맹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1.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억압을 받고 있는 현재와 같은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2. 그들에게 우위를 가져다 줄 그 다음의 혁명 투쟁에서,

3. 이 투쟁 후에, 타도된 계급 및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시기.72)


그리고 이제 피억압 상태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가 도처에서 억압을 받고 있는 지금,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대동단결(allgemeine Einigung)과 화해를 설교하고,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손을 내밀어 민주당 내의 모든 색조를 포괄하는 거대한 반대당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특유한 이해를 뒤에 숨기고 일반적인 사회민주주의적인 미사여구가 만연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정한 요구들은 사랑스러운 평화를 위하여 분출되어서는 안 되는 당조직 속으로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통합(Vereinigung)은 단지 그들에게 유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전적으로 불리하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힘들여 획득한 자신의 모든 독자적인 지위를 상실하고, 다시 공식적인 부르주아 정당의 추종자로 전락할 것이다. 이러한 연합은 그리하여 결연하게 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다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들에게 갈채를 보내는 합창단으로 복무하도록 저자세를 취하는 대신에, 노동자들, 무엇보다도 동맹은 공식적인 민주당과 나란히 독자적인 노동자당의 비밀 및 공개적인 조직을 만들고, 각 단위조직(jede Gemeinde)을 부르주아적 영향을 받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와 이해가 토론되는 노동자협회의 중심, 중핵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공동의 적과 맞서 싸우는 경우 결코 특별한 통합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한 적과 직접 싸워야 되게 되자마자 양당의 이해는 일시적으로 일치하게 되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장래에도 이러한 단지 일시적이고 타산적인 연합은 저절로 회복될 것이다.73)


요지는 공동의 적과 맞서 싸우는 경우에도 조직적․정치적 독자성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반동적 세력과의 투쟁에서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양태와 그 투쟁의 승리 후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그 성과의 독점, 그리고 그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응 원칙을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1987년 우리 사회에서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 흥미 있을 것이다.


소부르주아 대중은 ...[투쟁에서는 주저하고 우유부단하고 빈둥거리지만: 인용자]... 승리가 결정되자마자 그것을 스스로 독점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진정하고 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며, 소위 지나침을 방지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승리의 과실로부터 배제한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로 하여금 이를 못하게 할 힘은 노동자들에게 없지만, 그러나 무장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는 것을 어렵게 할 수 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지배가 처음부터 몰락의 씨앗을 품고 나중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에 의해서 그들을 축출하는 것을 현저하게 용이하게 할 조건을 강요할 힘은 있다. 노동자들은 충돌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투쟁 직후에도 무엇보다도 우선 진정시키려고 하는 부르주아지의 기도를 최대한 저지해야 하고, 그들의 현재의 테러리스트적인 미사여구를 실행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혁명적인 흥분이 승리 직후에 다시 억압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투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투쟁 후에도 노동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요구와 나란히 자신의 고유한 요구를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는 민주주의적 부르주아가 정부를 그 수중에 장악할 준비에 착수하자마자 노동자들을 위한 보장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들은 꼭 필요한 경우에는 이 보증을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일반적으로 새로운 지배자로 하여금 가능한 한 모든 양보와 약속을 확약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는 그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74)


다음엔, 공동투쟁에서의 승리 후의 대응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특히 투쟁의 방향이 이제는 과거의 동맹자인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에게 돌려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냉정하고 침착한 사태 파악과 새로운 정부에 대하여 숨김없는 불신을 통해서, 시가전의 승리 후마다 나타나는 승리에의 도취와 새로운 사태에의 열광을 가능한 한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공식적인 정부들과 나란히 자신의 혁명적인 노동자 정부들을 ― 그것이 자치체 협의회나 자치체 의회의 형태로든, 노동자 클럽이나 노동자위원회를 통해서든 ― 창설하여, 단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노동자들의 지지를 잃도록 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전체 노동자 대중이 뒤에 서 있는 단체들(Beho"rden)에 의해서 감시받고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하자면, 승리의 첫 순간부터 불신은 더 이상 패배한 반동당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동맹자에게, 공동의 승리를 독식하려고 하는 정당에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75)


다음에는, 직접적으로는 비록 선거와 관련한 것이지만, 노동자 계급 운동이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꽁무니에 묶어두고, 노동자들을 그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 하는 ‘진보적 지식인’, ‘민주주의자들’의 기만적 언설에 농락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특히 깊이 새기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을 얘기하고 있다.


도처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후보와 나란히 노동자후보를 내세우는 것.... 당선의 전망이 전혀 없는 곳에서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힘을 타산하고, 자신들의 혁명적 태도와 당의 입장을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들의 후보를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들은 이 경우에, 예컨대 그렇게 함으로써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반동파에게 승리의 가능성을 준다고 하는 식의 민주당의 허튼소리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모든 공문구는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를 기만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독자적인 행동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이 성취할 것임에 틀림이 없는 진전은 몇몇 반동분자의 대의기관 출석이 초래할지 모르는 불이익보다 한없이 중요하다. 민주당이 처음부터 반동분자들에 대해서 단호하고 위협적으로 행동한다면, 선거에 있어서의 그들의 영향력은 이미 사전에 없어졌을 것이다.76)


그렇다. 맑스와 엥겔스는 “독자적인 행동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이 성취할 것임에 틀림이 없는 진전은 몇몇 반동분자의 대의기관 출석이 초래할지 모르는 불이익보다 한없이 중요하다”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후보와 대항할 것을 요구하면서 “노동자들은 이 경우에, 예컨대 그렇게 함으로써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반동파에게 승리의 가능성을 준다고 하는 식의 민주당의 허튼소리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한 모든 공문구는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를 기만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 남구현․이해영․최형익 등 세 분 ‘맑스주의자’ 교수에 의하면,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 좌익공론적․좌익소아병적임은 물론이고!


자, 남구현․이해영․최형익 세 분 교수님들!

대답해 보시지요.

아니, “환멸스러운 대중을 거론하였다” 운운하시면서 맘껏 야유해 보시지요.

그리고, 만일 이러한 나의 비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제발 ‘좌고우면’하지 마시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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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처음 시작이다

비가 오는데 이제 가을이 오나보네

어째든 첨이다. 이제 시작이다.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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