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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마음이 급해서인가, 시간은 가는데 하는 일은 별로 없다. 조급해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풍경을 찍을 겸해서 만항재라는 고개를 찾았다.
고한에서 영월 방향으로 가다보면 말 그대로 구불구불한 길을 만나게 된다. 만항재를 가기위해 정암사를 지나 조금 가면 같은 이름의 만항이라는 조그만 마을이 나온다. 열 가구나 될까? 길가에는 외지사람들을 상대로하는 듯한 식당이 몇 개 있다. 이곳까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가 싶지만, 차가 늘어만 만큼 사람들은 어디든지 가지 싶다.
만항에서 차를 몰아 얼마쯤 가면 만항재 정상에 다다르게 된다. 정상에는 조그만 가게가 있는데 이곳에서 맛있는 냄새가 살살 풍겨져 온다. 감자전을 굽는 냄새다. 감자를 유독 싫어하는 입성을 가졌지만 이상하게 감자전은 입에 착착 감긴다. 먹거리의 유혹을 참아내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의 맛난 먹거리의 유혹을 그 누구 참을 수 있단 말인가?
1인분에 5천원인 감자전을 시켰다. 두 손을 합친 크기 만한 감자전이 두 장 나왔다. 옆에서는 부부인 듯한 남녀가 감자전과 묵을 먹으면서 막걸리를 한 잔씩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를 남기고 가려 하기에 한 잔 얻어먹고 싶었지만... 차마 입밖에 내지는 못했다.
고한에 내려온 지 2주가 지났다. 그동안 동생과 아내가 다녀갔다. 혼자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외롭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혼자라는 것이 참 편하고 좋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까? 아직은 사람들과의 친분도 없고 겉돈다는 생각이 들지만, 점차 나아질거라 믿는다.
오늘은 공추위라는 단체에 가서 여러 얘기를 듣고 왔다. 감사 직책을 갖고 있는 분이 방송국이나 프러덕션에서 영상물을 만들자고 여러 번 왔었다고, 소재를 잘 잡아야 할거라고 충고를 했다. 영상에 대해 조금은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지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방송물이 많아서일까?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문제는 있지만 대안의 빈곤을 느낀다.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돈이 모든 것의 가치기준이 되는 것에 대해 아니다 라고 나는 얘기할 수 있을까?
언제나 가난했던 사람들에게 욕심을 가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지 않을까?
경제적 자립이 없는 지방은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가?
수 십 년 탄광촌으로서의 보상이 카지노라면 그 카지노는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하나?
카지노는 이곳 사람들의 희망일 수 있는가? 아니라면 대안은?
핸드폰이 울렸다. 아침 8시 30분! 서울에서는 한참 자고 있을 시간이다. 수도 공사 때문에 오신 분이 몇 번이나 전화를 했었단다. 이런! 간단하다고 한 공사가 오후 2시에야 겨우 끝이 났다. 벽에 구멍을 내고 수도관을 직접 연결하는 대공사(?)였다. 옆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일을 거들었지만 미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어젯밤 오줌이 급해서 물을 내릴 수 없는 변기에 볼일을 봤다. 생각보다 냄새가 심하게 났다. 공사하러 오신 분이 변기에 수도관을 연결하느라 힘들게 일하시는 것을 보면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미안한 마음에 담배 2갑을 사드렸다. 점심도...
공사가 끝나서 청소를 시작했다. 벽을 뚫어서 거실 바닥에 먼지가 그득했다. 쓸고, 닦고, 또 쓸고, 닦고... 싱크대를 제자리에 놓고, 물을 틀었다. 시원했다. 그런데 싱크대 아래에서 물이 나왔다. 싱크대 아래 문을 열어 보니 물이 빠지는 관이 빠져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물이 나오니 살 것 같았다.
짐을 풀었다. 쌀을 씻고, 밥을 했다. 준비해간 반찬 몇 가지를 놓고 밥을 먹었다.
'걸인의 찬, 황후의 밥상'(?)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적혀 있던 구절이 생각났다.
서울 생활은 늦은 기상에 밥을 거르기 일쑤였는데, 이곳에서는 밥 때를 챙기게 된다. 외로워서 그런가... 텔레비전이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책을 읽게 된다. 불편하진 않다. 오히려 더 좋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온 건지, 신선놀음을 하러 온 건지...
푸른영상 사람들한테 쬐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는 행복하다.'^^
2005년 5월 30일.
여느 날처럼 화장실에 앉아서 담배를 물고 신문을 펼쳤다.
10여 분 뒤 1면에 난 기사에 나는 숨을 멈췄다.
(나는 신문이든 잡지든(책만 빼고) 일단 뒤에서 부터 읽는다.)
아는 얼굴이 신문 1면에 있었다. 부고 기사였다.
김형률.
나는 생전에 그를 두 번 만났다.
20004년 어느 여름, 그는 아버지와 함께 푸른영상을 찾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의 막바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를 만났었다.
원폭2세환우회 회장인 그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했다.
원폭 피폭자의 2세로 태어나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어했다.
나는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다.
권력과 자본의 영향을 받지않고, 공중파가 다루지 않는 이 세상 낮은 곳의 이야기,
그러나 꼭 필요한 이야기가 독립다큐멘터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전에 그는 여러 텔레비젼 보도프로에 출연하여 자신과 같은 원폭2세들의 문제에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갖기를 주장했었다.
나는 푸른영상이란 곳에 있다. 독립다큐를 만드는 곳.
<상계동 올림픽>과 <송환>이란 다큐멘터리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곳.
어지간히도 더웠던 2004년의 여름. 푸른영상을 아버지와 함께 찾아던 그의 모습은
나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내 나이 또래로 보였던(나는 신문기사에서 그가 내 동생과 같은 나이란 걸 알게 됐다)
그는 애처로움을 느낄 정도로 말라있었다.
작은 키에 삐쩍 마른 그는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이야기했다.
부산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원폭2세의 문제에 대해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이야기했다.
2005년 5월 30일 저녁 11시, 나는 카메라를 들고 부산으로 가는 막차를 탔다.
31일 새벽 4시 11분 나는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대학병원 영안실 입구에는 수무개 남짓한 화한이 놓여져 있었다.
새벽 5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라 영안실에는 조문객들은 없었다.
유족들이 영안실에 잠들어 있기에 나는 잠시 밖에서 담배를 피면서 기다렸다.
어색했고, 불편했다.
30분쯤 영안실 밖에서 서성이던 나는 조문을 하러 영안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문을 끝내고 아버님이 어디서 왔나고 묻기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푸른영상에서 왔습니다.
아버님의 눈에 가득 물기가 고였다.
불편했다.
영안실을 나와 조문객들이 식사하는 곳에 잠시 앉아있었다.
나는 왜 카메라를 들고 왔는가?
잠시 후 아버님이 나오셔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생전에 형률이가 다큐멘터리를 꼭 만들어 싶어 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무어라 답할 말이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 밖에.....
장례식을 찍어도 되냐고 여쭸던것 같다.
늦었지만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 지는 모르겠지만......
죄의식일지도.....
아버님은 찍어도 된다고 말씀하셨고, 이른 아침이라 조문객들도 별로 없기에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영안실 밖에서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영안실 안의 그의 사진도 촬영했다. 사진 옆에는 한 구절의 글이 있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숨이 막혀왔다. 카메라를 끄고 싶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일곱시가 가까워 오자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방송국 카메라도 오고......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뒤에만 있었다.
발인이 시작되었다.
여러 단체 사람들, 방송국 사람들,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나는 여전히 뒤에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화장장으로 가는 버스 안.
열려진 창문으로 바다냄새가 들어왔다.
그와 나는 같은 차에 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열심히, 정말 열심히 말하지 않는다.
서른다섯. 그는 더이상 말이 없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던 것을.....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이야기 했나 보다.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나는, 카메라를 든 나는,
내내 뒤에서만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찍었다.
부끄러웠다. 염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이야기했는데.....
더이상 말이 없는 그를 찍는 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더이상 말이 없는 그를 찍는 다는 것이 염치없었다.
사람들 뒤에서만 카메라를 든 나.
나에게 카메라를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전에 그가 준 책 두 권, 자료집 하나, 그리고 많은 메일이 남아있다.
유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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