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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자 관리'가 국가 장래다

[‘은퇴자 관리’가 국가 장래다]<5>한국에 남겨진 과제

《“무엇보다 은퇴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으면 해요. 하다못해 주유원이나 주차관리 같은 건 나이 들어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걸 젊은 사람이 다 해요. 젊은이들은 건설적이고 미래에 도움 되는 일을 해야 하는데….”(은퇴자 배모 씨·52)

“주변에 퇴직금으로 사업하다가 실패하거나 주식투자로 몽땅 날린 은퇴자가 많아요. 은퇴 이후 돈 관리 방법을 몰라 고민하는 친구들도 있고요. 은퇴자를 위한 재테크 교육이 있었으면 해요.”(은퇴자 김모 씨·56)

누구나 현역에서 은퇴하지만 은퇴 이후 삶의 질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일본 등 선진국들은 체계적인 연금시스템과 은퇴자 관리로 고령화사회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한국의 퇴직자들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은퇴를 맞고 있다. 국가 장래가 걸려 있는 은퇴자 관리는 정부 기업 개인이 ‘삼위일체’로 준비해야 한다. 각 부문의 역할과 과제를 짚어 본다.》

○정부-공공 일자리 늘리고 직업교육 강화를

국민연금 혜택을 보고 있는 수급자는 2월 말 현재 60세 이상 인구의 24.5%(201만 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1인 평균 수급액이 월 19만4000원에 그쳐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이 많다.

실직 등으로 연금 보험료를 못 내는 사람들은 연금 혜택마저 없다. 실제로 올해 3월 말 현재 국민연금 가입자 1778만 명 가운데 실직 등에 따른 납부예외자는 495만5970명에 이른다.

정부는 2008년부터 소득 기준 하위 60% 노인에 대해 기초노령연금으로 월평균 소득(국민연금 가입자 기준)의 5%(약 8만 원)를 지원할 계획이지만 이 역시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연금이나 공적부조를 통한 대안을 마련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국가 재정에도 부담이 되는 만큼 고령자를 위한 일자리 창출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한다.

LG경제연구원 조용수 연구위원은 “은퇴 시기가 갈수록 빨라지면서 은퇴 후를 준비할 기간이 짧아지는 것이 문제”라며 “연금으로는 부족한 만큼 가능한 한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다만 한국의 고령자 취업률은 낮은 편이 아니다.

최근 재정경제부가 발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07년 통계연보에 따르면 2005년 기준 한국의 55∼64세 고용률은 58.7%로 OECD 평균인 52%보다 높았다.

하지만 단순 일용직이나 아르바이트 등 고용의 질은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고령자고용촉진법이 있긴 하지만 ‘사업주가 근로자 정년이 60세 이상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권고 조항만 있을 뿐이다.

정부는 지난달 법안을 일부 개정해 2010년부터 채용, 승진, 퇴직 등에서 연령을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1억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기로 했다.

조 연구위원은 “공공부문부터 고령자를 위한 일자리를 만들고, 시장 수요에 맞춰 새로운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퇴직금 중간정산 대신 퇴직연금제로

선진국의 은퇴자들은 근로자와 회사가 일정액을 분담한 뒤 은퇴 이후 돌려받는 퇴직연금(기업연금)을 통해 노후자금의 상당 부분을 충당하고 있었다.

반면 한국은 2005년 12월 퇴직연금을 도입해 이제 막 한 걸음 내디딘 상태다. 퇴직금제에서 퇴직연금제로 전환한 사업체는 3월 말 현재 1만7984개사로 전국 5인 이상 사업장의 4.0%에 불과하다.

퇴직연금제가 환영받지 못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기업과 근로자들의 반응이 미지근하다. 기업은 중간정산으로 고액 연봉자에 대한 부담을 털어버릴 수 있어서, 근로자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든 목돈을 쥘 수 있어서’ 퇴직금제를 선호한다.

퇴직연금제 도입을 유인하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인센티브도 미미하다. 손비인정(기업)과 300만 원의 연말 소득공제(개인)가 전부다.

노동부 퇴직급여보장팀 김남용 사무관은 “퇴직연금제 확산을 위해 폭넓은 세제(稅制) 혜택 등 다양한 유인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정부도 인식하고 있다”며 “현재 보완책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퇴직연금제로 전환하더라도 지금처럼 대부분의 기업이 퇴직금 중간정산을 하면 퇴직연금제의 실효성이 떨어진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손성동 연구실장은 “중간정산은 퇴직연금 취지에 역행한다”며 “미래의 생활자금인 퇴직금은 중간정산하지 말고 퇴직연금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업은 퇴직연금제 확산과 함께 은퇴자들을 위한 일자리 재창출에 소매를 걷어붙여야 한다.

선진국들은 은퇴자들을 경제활동인구로 남게 해 세수(稅收)와 연금재정 확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 일본에서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퇴직을 앞둔 임직원에게 자회사나 하청업체 등에 재취업을 알선하는 전적(轉籍)제도가 활성화돼 있다.

은퇴자들이 재취업에 성공하면, 혜택은 기업들이 누리게 된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은퇴자들이 적극적인 소비 주체로 나서기 때문이다.

○가계-자녀 교육비에 소득 다걸기 말아야

“노후 준비요? 아이 교육비 마련이 더 시급하죠.”

대기업 입사 14년차인 이영종(39·서울 강동구 명일동) 차장은 아내가 맞벌이하면서 월평균 수입이 세후(稅後)로 700만 원에 이른다. 하지만 이 가운데 고작 20만 원(2.9%)만 노후자금 용도로 저축할 뿐이다.

그럼 나머지 수입은 다 어디로? 우선 매월 나가는 사교육비와 대출금 이자가 전체 지출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의 사교육비에 월 120만 원, 주택담보대출(1억7000만 원) 이자로 약 100만 원 등 총 220만 원(31.4%)이 뭉텅 빠져나간다. 이 차장은 “이 밖에 아들 학자금 마련 용도로 월 70만 원을 저축하고 있다”며 “노후 대비의 필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여력이 없다”고 했다.

많은 직장인이 노후 대비를 하지 못하는 이유로 사교육비를 꼽고 있다.

본보 취재팀이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에 의뢰한 은퇴자 대상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8.6%가 “교육비와 생활비 때문에 은퇴에 대비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은퇴 준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독한 마음’을 품고서라도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라고 주문한다.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강창희 소장은 “자녀에게 손 벌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현역 시절 소득의 상당액을 자녀교육에 ‘다걸기(올인)’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은퇴 문제’를 대하는 개인들의 느슨한 사고에 메스를 대는 의식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국투자자교육재단 박병우 사무국장은 “고령화사회에서 확실한 노후 대비는 평생 현역이라는 자세”라며 “노후 대비는 사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시작돼 죽는 순간까지 계속된다”고 조언했다.

장인협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명예교수는 “평균수명이 길어지는 만큼 고용이나 해고할 때 나이를 기준으로 차별하는 에이지즘(ageism)을 철폐해야 한다”며 “노인들도 무력감에 빠지기보다 일을 통해 자립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출처: 동아일보, 2007.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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