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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오]노동자운동이 필요한 이유

80년대 중반에 청계천에서 야학을 했었다. 창신동 판잣집에 살면서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열여섯 살 시다, 중학교 마치자마자 시다 일을 시작해서 2년 만에 미싱을 탄 당찬 아이, 그런 아이들이 하루 종일 노동을 하고 야학이 있던 산꼭대기까지 힘겹게 걸어와서 노동자라는 게 어떤 존재인지, 어떤 권리가 있는지를 들었다. 야학 첫날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눈물바다를 이루고 내 한 학기 등록금의 1/5도 안되는 월급이라도 월급날이 되면 우리를 신당동 골목에 불러서 1인분에 500원하는 떡볶이일망정 배부르게 대접하고 얼굴이 잘생겼건 못생겼건 그래도 대학생 오빠라고 손이라도 잡고 길을 걸을라치면 손바닥에 진땀이 흘렀다.

보통 사무실 높이의 공장에 다락을 만들고 기계를 들여놓아 미싱에 앉아서 일하는 것 말고는 허리를 펼 수도 없는 공간에서 매일매일을 버티는 노동자들이었다. 옷감에서 풀풀 날리는 먼지들이 사람의 코나 입 말고는 빠져나갈 곳도 없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매일같이 집에서는 술취한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공장에서는 공장장이나 오야지에게 욕을 먹고 심지어 강간까지 당해도 어디 하소연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그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고 사회주의를 말하고 혁명을 말하면 비록 빨갱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겁먹은 얼굴을 하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곰곰이 자신의 처지를 되새겨보곤 했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고 노동자도 많이 변했다. 이제 노동자 중에서 고등학교 정도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최소한 80년대보다는 노동자의 삶이 나아졌다고 할 수 있고 노동자운동의 흐름도 바뀌었다.

수년 전 노동조합의 상근간사로 들어간 후배가 한 달만에 내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죠?”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오직 임금인상에만 관심을 쏟는 사람들, 자기들이 파업할 때는 ‘왜 제대로 연대 지원을 해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다가 다른 사업장에서 투쟁을 할 때는 모른 척 외면하는 사람들, 심지어 동료들이 해고되어 길거리로 쫒겨나는 판에 자기 일자리보전과 승진을 의식해서 상관의 눈만 쫒아 다니는 사람들, 자기는 수천만원의 연봉을 받으면서 상근 간사가 월 70만원을 제대로 받는 지 굶어가며 일하는 지에 대해 관심도 두지 않고 당연하게 저희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왜 헌신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환상은 현실에 부딪치면 쉽게 깨지기 마련이다. 만약 ‘노동자는 혁명적’이라는 환상을 갖고 노동자운동을 시작한다면 한달도 못가서 좌절할 지도 모른다. 현실의 노동자는 그다지 혁명적이지 않다.

자본주의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 7-80년대에 노동자를 노예처럼 마음대로 부려먹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자 이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새로운 무기로 내세웠다. 7-80년대에는 노동자에게 거창한 목소리로 ‘수출역군’, ‘산업역군’ 따위를 강조했다면 이제는 작은 목소리로 “네 처자식을 생각하라”고 속삭인다. 개인주의, 가족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가 현실의 노동자를 지배한다. 게다가 그 이기주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이기도 하다.

90년대에 사회주의가 패퇴한 이후 세상은 점점 더 발가벗은 자본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사회 전체가, 나아가 세계 전체가 ‘세상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잃고 더욱 참혹한 자본주의의 생존경쟁에 휩싸여 있는 판에 노동자들이 그 격류를 이겨내고 혼자 힘으로 희망을 만들고 자본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가능한 일이 아니다. 비록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기억 못할 수도 있겠지만 80년대에 운동을 배운 노동자들은 90년대에 사회주의가 몰락하자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던 수천 명 이상의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전망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썰물처럼 떼거지로 도망(?)쳐버린 그 배신을 기억할 것이다. 90년대에 노동자들은 사회주의를 말하는 사람들, 활동가들에 대한 불신을 배웠다. 노동자들이 혁명적이지 못한 것은 결코 노동자들의 탓이 아니라는 말이다.

최근 노동자운동이 점점 더 교섭의 타결에 목을 매고, 심지어 유럽 사민주의 식으로 노사정 교섭틀을 만들겠다고 주장한 사람이 민주노총 위원장이 되는 사태를 보면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노동자운동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관성이든 뭐든 노동자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또 ‘여전히 고통 받고, 그래서 여전히 투쟁적으로 보이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만 관심을 둔다.

나도 물론 비정규직 문제가 현재의 노동자운동의 가장 큰 화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이 필요한 이유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라. 여전히 열악한 노동조건에 의해 고통 받고 있으며 여전히 투쟁적인 노동자가 있다. 노동자운동은 여전히 유의미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타당한 논리가 될 수 없다. 그런 논리라면 만약 한국의 노동구조가 독일처럼 변한다면 ‘외국인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노동자운동의 필요성으로 제시할 것인가?

나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노동자운동이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맑스의 글 중에서 ‘헤겔 법철학비판 서설’을 가장 좋아한다.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던 그 시대에 투쟁적이지도 않던 노동자들을 혁명적 계급이라고 선언했던 이유가 그 글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맑스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얼마만큼 고통 받느냐, 당장 얼마만큼 투쟁적이냐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뒤엎을 힘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었다. 자본주의가 본성을 바꾼 게 아니라면, 그리고 특별히 누군가가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면 여전히 그 힘은 노동자계급에게 있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의 능력과 힘이 모자라면 노동자들이 현재의 상태에서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노동자들이 바뀔 것’이라고 확언하지 못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현재의 상태에 지레 겁먹고 ‘노동자운동은 맛이 갔으니 다른 운동을 해보자’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미래사회를 아무리 아름답게 그린다고 해도 세상을 바꿀 계획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세상 바꾸기를 포기한다면 나는 운동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착한 자본주의(?) 만들기’ 따위에 내 운명을 걸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이 자본주의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나는 노동자운동에서의 더 많은 활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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