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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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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트윗에다 한 메모를 옮겨놓은 것임.

 

원수를 사랑하라(마5:44)는 이야기는 문맥을 보면 사적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혹은 비유대인-갈릴리인은 때로 비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가르는 선을 철폐하라는 말이다. 인종적 증오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같은 절의 '핍박자'는 단지 실제 핍박자만을 뜻하지 않는다. 로마가 핍박자라는 이유로 순혈유대인들은 이방적인 모든 것을 핍박자와 연결하여 증오했다. 저 말의 수신자는 그래서 피억압자가 아니라 순혈주의자들이다.

 

이를테면 1차대전에 패전한 독일에서 배후의 좌익이 칼을 꼽아서 외세에 졌다는 식의 담론이 유행했는데, 예수는 바로 그런 순혈주의 바리새들 - "하느님을 제대로 안 섬기는 저 갈릴리 사마리아 놈들 때문이다." - 에게 그것을 그만두라 한 거다.

 

그러니까 이 말씀 가지고 억울한 사람, 억눌린 사람보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 안 된다고!!!

 

용서라는 이름으로 억압된 분노는 다른 방향으로 터져나오기 때문이지. 네오나치가 대표적. 억눌린자는 정의로운 분노를 표출해야 하는 거지. 그게 '심판'이라는 종교적 세계관의 어휘로 번역될 수 있는 거고.

 

땅의 울음이 하늘에 닿았는데 하느님이 "야 원수를 사랑해" 하겠냐!

 

 

-약간 다른 맥락

 

예수가 무슨 이념적으로 비폭력주의자였던 게 아니다. 현실적인 폭력 수단이 없고 따르는 여자들과 아이들, 병자들의 무리를 배제하지  않으려면 다른 선택이 없는 거지.

 

이 모순이 얼마나 극심했냐면 겟세마네에서 제발 좀 내 잔 좀 옮겨 달라 기도 한 거다. 임박한 심판을 외치는데 수단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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