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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그리고 몰락의 정치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이파르, 2011)에 실린 글입니다. 

 

홍대 앞 철거농성장 ‘두리반’과 청(소)년의 집합행동

 

나의 지구가 죽어간대   / 나도 월세 땜에 죽겠는데

나의 지구를 살려야한대 / 살릴 땅 한 평도 난 못 샀는데

북극곰 집이 녹아 사라진대 / 내 집도 재개발로 사라진대

하와이 섬들이 사라져 간대  / 하와이 한번 가보고 싶은데

자동차 배기가스가 문제래 / 나는 면허 없는 게 문젠데

해수면 높아져 큰일이 났대 / 난 휴가철에 해수욕도 못 갔는데

차라리 잘됐어 될 대로 되라지 / 어차피 이 세상은 내 것이 아냐

-갤럭시 익스프레스, <나의 지구를 지켜줘> 중

 

 

88만원 세대론부터 G세대론을 거쳐 ‘20대 개새끼’론까지. 최근 들어 활발하게 진행되어온 20대 담론은 어떤 식으로든 오늘날의 20대가 사회에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많은 논자들이 지적해왔듯이 그것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질문하기’가 아니라는 것, 현재 20대의 상황 자체가 하나의 ‘물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수많은 세대 담론들은 20대 자신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지금의 20대라는 물음 앞에 놓인 기성세대들의 대답에 가깝다. 그리고 그 대답이 향하는 곳이 정치 분야건, 상업의 분야건 ‘마케팅’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기 자신의 언어를 가질 수 없는 이들은 언제나 길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세대론 사이를 헤쳐나가는 20대들의 목소리는 그래서인지, 장황하다. 책을 많이 읽은 이는 잡다한 인문학의 개념어들을 통해서, 그렇지 않은 이들은 자신이 겪어온 인생 이야기를 통해서, 20대는 자신의 삶이 어떻게 그들의 세대론 속에 갇히지 않는 값어치를 갖고 있는지를 장황하게 이야기한다. 이런 목소리는 마치 <무한도전> 속 ‘하하’ 캐릭터의 절규 같기도 하다. “나 아니라구우! 그런 게 아니라니까아!” 장광설이든, 절규든 그것은 지혜로워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더 많이 말할수록, 혹은 더 외칠수록 그것은 진리-언어1 여기서 진리-언어란 도그마로 기능하는 언어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를 생산해내는, 혹은 그 생산을 설명하는 언어를 말한다에 닿지 못하고 세대론자들의 수많은 분석과 기획의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들의 언어를 대하는 신중한 감각이 요구된다.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 장광설이나 절규로만 보이는 이들의 언어 속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진리-언어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이러한 작업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단연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꼽는다. 이 책은 저자가 수년간 연세대 원주 캠퍼스와 덕성여대에서 강의하면서 만난 대학생들과의 대화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이 택한 방법론은 이들을 하나의 세대로 규정하여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저자 자신이 배우게 된 것을 기술하는 것이었다. 20대의 삶의 조건과 서사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이들을 만들고 있는/이들이 만들어 가는 세계를 발견 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여타의 세대 담론을 넘어선 성취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엄기호의 문제의식에 공명하여, 좀더 좁은 범위의 대상과 주제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홍대입구역 앞의 철거 농성장 ‘두리반’과 함께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청(소)년들이 그 대상이며, 주로 다룰 주제는 정치가 될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를 구성해 온 주류의 정치적 언어와는 다른 언어가 현재의 ‘싸우는 20대’2 이것은 지난 112일 두리반에서 열렸던 싸우는 20, 우린 어디로 가는가?” 토론회에서 따온 것이다. 물론 두리반 사람들 중에는 상당수의 ‘10가 존재하며, 이 글을 위해 인터뷰한 활동가들 중에도 두 명이 10대 활동가였다. 또한 두리반에는 청()년들만이 결합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매우 다양한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두도록 하자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풍경을 그려보려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철거민과 청(소)년들의 우연적인 혹은 필연적인, 만남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두리반’의 시작은 200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부터이다. 그 일대를 몽땅 사들이고, 세입자들의 연대를 분쇄하여 차례차례 헐값을 주고 내보낸 GS 건설의 유령회사 남전디앤씨는 계고장 하나 미리 보내지 않은 채 갑자기 용역을 동원해서 마지막까지 협상하지 않고 남아 있던 칼국수 요리집 두리반의 집기를 들어내고 펜스를 둘러 쳤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 안종려 사장은 극한의 두려움과 분노 속에서 그 펜스를 뜯고 가게로 다시 들어갔다. 점거 농성이 다른 철거 투쟁 현장과 조금 달랐던 것은 당사자 뿐 아니라 안 사장의 남편 소설가 유채림의 동료들인 작가회의 회원들이 일찍부터 농성에 연대하였다는 것이다. 

 

그때는 한국작가회의 분들이나 모교 민주동문회 후배들은 돌아가면서 번을 서줬었어요. 그날도 일상처럼 두리반에 들러줬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가기 전에 나한테 묻는 거예요. “형님 노동자는 어떻게 싸우죠?” “뭘 어떻게 싸워?” 그랬더니 “노동자의 방식으로 싸우겠죠.”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엔 “그럼 농민은 어떻게 싸워요?”라고 물어보더라구요. “농민의 방식으로 싸우겠지.” 했더니 “작가는 어떻게 싸워요.” 그 말을 하는 거예요. 제가 그때 정말, 홍두깨로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그렇게 ‘철거민’이라는 자각보다 ‘나는 작가였지’ 하는 게 먼저 왔어요. 그걸 느끼고부터 철거의 문제점, 우리의 억울한 사례들을 내 시선으로, 내가 겪은 그대로 쓰면 얼마나 더 호소력이 있을까 싶어서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쓰신 글이?) 한겨레에 썼던 칼럼이었어요. ‘아내의 우물 두리반’이라는 제목이에요. 그 후로 가능하면 모든 지면을 통해서 알리려고 노력을 했죠. 프레시안, 작은 책, 한살림 등등 계속해서 써나갔어요. -유채림, 「퍼슨웹」과의 인터뷰(http://www.personweb.com/articles/247)에서 

 

농성장의 이러한 성격은 두리반이 젊은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두리반을 낳은 상황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철거 재개발의 문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90년대 중반 이후 신촌 등의 지역의 비싼 임대료를 견디지 못한 젊은 예술가들과 클럽들이 모여들면서 시작된 소위 ‘홍대 문화’는 2000년대를 지나며 이 지역의 땅값을 엄청나게 올렸다. 이런 공간에 거대 자본이 눈독을 들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일. 최근 몇 년간 홍대 입구역 주변을 필두로 마치 강남 테헤란로를 연상시키듯 고층빌딩들이 계속 올라가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진행되었고, 공항 철도가 이 지역을 지나게 되면서 홍대에서 상대적으로 변두리에 있었던 동교동 일대까지 지구단위계획으로 묶여서 재개발이 시작된 것이다.3 현재는 두리반 뒤편의 걷고 싶은 거리일대까지 지하상가 등의 재개발이 예고된 상태이다. 포스코가 주도하는 이 곳 역시 법적으로는 지구단위사업계획으로 묶인 지역이며 이에 따른 갈등은 이미 표면화되고 있다. 개발 이익 중 얼마를 회수할 수 있는 마포구는 세입자들에 대한 어떠한 대안도 내놓지 않고 있다

 

지구단위계획에 따른 재개발은 세입자들에게는 악랄하기 그지 없는 폭력이다. 뉴타운이나 주거환경개선 등 공익사업의 경우 세입자들이 영업이익이나 이전비용을 어느 정도 보전받을 수 있는 반면, 지구단위계획은 민간개발이기 때문에 세입자들은 상가임대차보호법에 따른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홍대 앞의 문화와 상권을 만들며 이 지역의 가치를 올려온 건 땅주인들이 아니라 세입자들이었건만, 땅주인들이 시세의 열배가 넘는 평당 8000만원에서 2억원까지 받고 땅을 팔아 이득을 보는 동안 세입자들은 그나마의 월세 보증금도 소송비용으로 뜯기고, 마치 시혜를 베풀듯 주어지는 몇백만원의 이사비용만 받고 추방당해야 했다. 그리고 두리반의 안종려 사장은 그 시혜도, 추방도 거부하고 두리반을 지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돌입했다. 그의 요구는 이전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 

 

초기에는 사장 내외와 가까운 작가회의 회원들,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 전철연, 진보정당들이 이 싸움에 연대했다. 그리고 2월, 유채림 작가의 칼럼을 보고 인디 뮤지션인 정동민과 한받이 두리반을 찾아왔다. 이들은 농성 주체들의 사정을 듣고 ‘음악가의 방식’으로 연대를 시작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토요일 <자립음악회>의 시작이었다. 3월 12일에는 용산참사 현장에서 미디어 활동을 하던 활동가 조약골 등의 기획으로 금요 <칼국수 음악회>도 시작되었다. 음악회가 진행되면서 홍대 주변에서 활동하던 많은 인디 밴드들과 자립음악가들, 그리고 젊은 관객들이 농성장을 찾기 시작했다. 농성장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안종려 사장은 “작가들과 인디밴드들이 함께 한 다음부터 문을 잠그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젊은 음악가들과 두리반의 이런 연대는 5월 1일 노동절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세계노동절120주년기념전국자립음악가대회뉴타운칼챠제공파티 <51+>”가 열렸던 것이다. 처음에 술자리 아이디어어일 뿐이었던  ‘51개의 밴드가 참여하는 노동절 음악회’는 이날 하루 종일 두리반 지하와 3층, 뒷 공터의 야외무대까지를 65개의 밴드와 수천 명의 관객들이 가득 채우며 동교동 3거리 일대를 저항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현재까지 두리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 활동가들의 결합은 대부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51+>에 자원봉사나 관객으로 참여했던 10대, 20대 활동가들이 계속해서 두리반에 결합하게 되었고, 두리반에서 먹고 자며 상근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친구가 4월 말에 전화해서 홍대에 두리반이라는 데가 있는데, 여기서 5월 1일 날에 인디밴드들이 총 집결해서 공연을 한다고 연락을 했어. 그 중에 내가 엄청 좋아하는 인디신의 밴드들이 많아서 두리반에 대해 관심 갖고 조사를 해 봤지. ‘어 여기 재미있는 데다.’ 그리고 4월 20일 전후로 두리반에 오게 되었어. 그 때 청소년 인권운동가들이 꽤 많이 결합했었어. (여기에 매일 오잖아. 내가 ‘연대한다’라는 걸 넘어서 여기가 ‘내 투쟁이다’라고 생각하게 된 건 어떤 계기였어?) 어… 두리반이란 장소가 ‘대안공동체’라는 이미지를 가졌을 때? 여기가 자유롭고 평화롭고, 유쾌하기까지 하면서 또 진중한 투쟁의 현장이라는, 또 음악이 있고 춤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홍대에 있고. 그래서 어느 순간 두리반이 나다. 그렇게 생각을 했지. -청소년 활동가 A 인터뷰

 

어떻게 상근하게 되었냐면…… 사실 그 한 열흘 정도의 기억이 잘 안나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자연스럽게 여기서 자고 있더라고. 왜 상근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당연히 강제철거의 문제, 자본의 폭력 이런 거에 동감하고, 그걸 두리반에 와서 제대로 보게 되었지. [중략] 그리고 두리반에 오면서 두리반에서 형성된 문화들이 아주 좋았어. 내가 원했던, 안 좋은 것들에 대해 안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51+ 때 하자센터 쪽에 알던 친구들이 여기에서 연대해서 스텝을 한다고 해서 나도 행사 전날 와서 그 다음 날까지 한 숨도 잠을 안 잤던 것 같아. -청소년 활동가 B 인터뷰

 

인터뷰 속에서 나타나듯이 <51+>를 전후로 해서 두리반은 단지 철거농성장의 성격을 넘어서 홍대 앞의 대안적 문화공간이자 대안 공동체의 성격까지 함께 띠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두리반이 젊은이들의 문화적 코드에 맞는 행사를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리반에 연대하는 이들은 두리반의 상황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애초에 두리반에서 자립음악가 모임이 태동을 했구요, 그 때 모두가 가진 공통된 건 그거였어요. 두리반이 자본에 의해서 처한 상황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홍대 앞이 엄청나게 개발 바람이 불면서 이른바 중소형 클럽이 다 망해나갔어요. 이런 클럽에서는 지금 두리반 3층에서 하고 있는 거 같은 연주를 할 수 있었어요. 주인들도 어느 정도 마인드가 있었고. 그런데 임대료가 올라가고 세가 비싸지니까 쫓겨날 수밖에 없는 거에요. 아니면 빚을 내서 더 큰 공연장을 만들어요. 그런데 그러면 그 공연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메이저를 불러야 하는 거죠. 최소한 사람들에게 이름은 알려졌고, 티켓값을 오천원 만원 받을 수 있는 밴드를 불러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빈익빈 부익부가 되는 거죠. 유명한 애들은 계속 유명해지고, 안 유명한 애들은 아예 이제 공연할 장소조차 없어요. 근데 그 상황이 되게 심해졌고,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두리반이라는 공간을 만났을 때 이건 심정적인 연대가 아니고 정말 나의 미래를 위한 싸움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20대 활동가 C 인터뷰

 

자립음악가들은 두리반 이전부터도 이러한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해오고 있었다. 몇몇 음악가들은 나름의 조직을 구성해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자본금을 마련해서 공동작업실과 공연장을 마련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지지부진했던 이러한 노력은 두리반이라는 물리적, 상징적 ‘장소’를 만남으로써 좀더 확장된 기획과 “자립음악가 생산자모임”이라는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음악가들은 두리반을 통해 자립음악가로서 필요한 자질과 기술(음향, 연주, 공연기획, 홍보 등)을 집합적으로 연마할 수 있게 되었고, ‘돈이 되지 않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리반 역시 음악가들의 결합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의 모습을 갖게 되고, 또한 문화적 스펙트럼이나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활용도가 높은 젊은 세대의 활력을 통해 많은 활동을 벌이며 다양한 매체가 주목하는 공간이 될 수 있었다. 현재는 음악회 뿐 아니라 문학포럼, 낭독회, 강좌, 영어/일본어 모임, 다큐 상영회 등을 통해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두리반에 드나들고 있다.  

 

자립음악가 단편선은 음악가들의 결합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단위로서의 ‘음악가’의 시민권을 선포하는 정치행위라고 평가한다. 음악가들은 분명 일정한 노동을 바탕으로 사회에 비물질적 생산물을 생산하며 기여하고 있는 존재이지만 다른 직능 단위가 누리고 있는 4대 보험 등의 사회적 권리를 갖지 못한 존재이다. 음악가들의 저항은 그런 점에서 자신들이 ‘사회적 존재’임을 가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지 못하는 몫의 분배를 요구하는 정치적 투쟁이 된다. 그는 이것이 단지 어떤 특정한 주체의 투쟁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투쟁은 ‘몫 없는 자들’이라는 부정적 규정에 의해 구성된 보편적 계급 모두의 싸움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연대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는 것이다.4 단편선, “자립의 조건 : 두리반의 경우”, <플러그 토크쇼: 자립의 음악, 음악의 자립>(광주프린지페스티벌 부대행사) 발표 원고, 2010.10

     

두리반에서 형성된 이러한 연대는 이렇게 철거 투쟁 자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여전히 두리반은 영업손실과 이전비용을 보전 받고 근처에 새 가게를 낼 수 있게 해달라는 특정 철거 사업장의 요구를 내걸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이들 젊은 세대를 비롯하여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추방을 겪고 있는 이들 상징적 요구가 된 것이다. 단지 상징만이 아니라 두리반 사람들5 두리반의 투쟁주체들과 음악가들, 또 이런 저런 모양으로 두리반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심지어 두리반의 의사결정기구라 할 수 있는 반상회는 그 참가 자격을 두리반 투쟁에 공감하는 모든 사람들로 하고 있다. 나는 종종 이들을 뭉뚱그려 두리반 사람들이라고 부를 것이다. 은 실제로 기륭전자나 홍대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투쟁에 활발하게 연대하기도 하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나 카페 등에서 기본소득이나 비정규직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의제화함으로써 추방당한자들의 연대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이제 우리 부부의 맺힌 것 풀고, 원하는 것 쟁취하고 그게 다가 아닌 싸움이 되어버렸어요. 상징 싸움이 되어서 인근 어딘가에 반드시 두리반을 차려야만 해요. 그래야 상징 싸움으로 성공한 것이 되거든요. (문: 다른 사람들이 철거 싸움을 시작할 때 너희가 원하는 게 뭐냐고 했을 때 두리반처럼 해달라는 거다. 라고 제시할 수 있는 모델이 생긴 거네요.) 그렇죠. 철거되기 전에도 두리반처럼 싸우면 가게 안 뺏길 수 있으니 싸워보자는 용기를 심어주는 상징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두리반들이 많이 생겨나면 결국은 상가임대차보호법이나 도시정비개발법을 만들어낸 국회가 개정 운동을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 꼭 이겨야겠어요. 근데 이러면 오래 가거든요. 지금 난감해요.(웃음) - 유채림, 「퍼슨웹」과의 인터뷰

 

새로운 운동권?

 

‘작가는 작가의 방식으로 싸운다’고 말한 유채림의 이야기는 두리반의 다른 활동에도 영감을 주어, 음악가는 음악가의 방식으로, 사진사는 사진사의 방식으로, 청소년은 청소년의 방식으로, 잉여는 잉여의 방식으로 각각의 활동을 구성하고 실행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러한 각각의 구체적인 활동의 서사들이 엮여서 두리반이라는 하나의 정치적 상징을 건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운동을 묶어낼 수 있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액티비즘(activism)’이라 할 수 있다. 두리반 투쟁은 흔히 ‘아나키즘’이라고 (주로는 비판적인 뉘앙스로) 불리곤 하는데, 나는 이러한 운동이 — 맑스주의와 더불어 이념적 성격이 강한 언어인 — 아나키즘 보다는 그 형식에 주목하여 ‘액티비즘’으로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개념을 나는 최근에 뉴욕을 매개로 한 도시 운동이나 대항지구화 운동을 분석하고 있는 고소 이와사부로의 『뉴욕열전』을 읽으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이념보다도 활동의 ‘형식’에 강조점을 갖는 ‘액티비즘’이라는 개념은 내용의 측면에서 지배적인 ‘사상’이 없음에도 적극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오늘날 일군의 사회운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적실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소는 액티비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대 액티비즘은 예전의 운동과 비교해 볼 때, 모든 의미에서 유연하며 유동적인 ‘실천형태’ 속에 관계되어 있는 개개인의 정열과 의지와 힘에 맞춰 그 어디까지라도 개입해 갈 수 있는 미정(未定)의 가능성을 지닌 운동이다. 생활형태, 신체성, 정동, 인간관계, ‘가치’를 형성하는 총체적 변혁에 이르기까지 미정의 가능성을 지닌다. [중략] 이러한 가능성과 미결정성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치를 세우고 있는 이상사회를 ‘바로 지금 이 운동단체’ 속에서 실현하는 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예시적 정치’의 원리에서 기인하고 있다. 

 

미래의 총체적 해방의 상보다는 지금 여기에서의 행동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율적인 활동가들의 수평적인 네트워크 형태가 군사적이거나 행정적인 조직의 형태를 대체하는 액티비즘의 특징은 두리반 활동의 여러 측면에서 발견된다. 그것을 가장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활동은 ‘반상회’이다. 반상회는 보통 한 달에 두 번 정도 열리며 두리반의 모든 활동과 살림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이다.6 두리반에는 반상회 외에도 여타의 철거현장과 같이 철거당사자와 진보신당, 민노당 마포구 위원장 등으로 구성된 철거대책위원회가 있지만 대책위는 의결기구로서의 반상회에 종속되어 있으며, 단지 외부적으로 두리반을 대표하는 기구로 기능한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두리반 투쟁에 연대하고, 지지하고,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이다. 참석과 의견교환, 활동의 구성이 어떤 결정된 구조보다는 두리반 사람들의 자율에 맡겨져 있는 셈이다. 반상회에서는 참가자 누구의 의견이든 기본적으로 존중받으며, 반대로 당사자인 유채림, 안종려 두 사람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보류될 수도 있다. 두리반에서 어떤 기획을 실행할 경우, 반상회에서 간단하게 기획을 공유하고 참가자들의 동의만 받으면 누구나 공간에서 자신의 기획을 추진할 수 있다.7 단편선, “‘농성으로서의 두리반, 그리고 삶의 방식으로서의 두리반”, “싸우는 20, 우린 어디로 가는가?” 토론회 원고. 두리반에서 진행되고 있는 활동이나 행사는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반상회는 뚜렷한 의사결정 절차나 강한 구속력을 가진 회의가 아니기 때문에 때로(특히 초창기) 어떤 결정이 비민주적으로 이루어지거나 결정된 사항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반상회는 단지 어떤 일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보다도 두리반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여서 미스-커뮤니케이션의 문제나 감정적인 앙금을 해소하는 기능 역시 한다8 앞의 글.는 점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할 것이다. 

 

반상회 뿐만 아니라 두리반의 일상적인 실천과 문화 역시 그렇게 이루어진다. 두리반의 활동에 결합하면서 처음에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두리반 사람들의 상당수가 나이와 상관없이 반말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주도적으로 여러 활동을 기획하는 이들끼리는 거의 전적으로 반말로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활동가들은 이것이 나이나 경력에 따른 위계 없이 수평적인 활동이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반말 문화에 대해서는 정말 동의하고 맞는 거라고 생각해. 정말 간단한 이유고, 근데 심지어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형 누나 꼭 붙이고, 나이 어리다고 (일방적으로 반말하고) 그러잖아. 난 그런 사람들이 싫고, 누가 왜 나보고 "너 왜 반말해?"라고 말한다면 나는 솔직히 다 말할 수 있어. 내가 왜 반말하는지.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고. -B 인터뷰

 

이러한 문화나 운동방식은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활동이 옳다”라는 탈권위주의적 당위나 아나키즘적인 이념에 의해 형성되었다기보다는 구체적인 운동의 필요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채림 작가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이었다고 말한다.

 

 지금도 공연하는 음악가나 영화 찍는 감독, 문화 활동가들, 우리 두리반 식구들에게 누누이 하는 얘기가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치적으로는 굉장히 진보적이다. 그런데 문화적으로는 터무니없이 보수적이다.” 우리 애들이 담배 피는 꼴도 처음에는 굉장히 거북했어요. (인디밴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어요. 이를테면 그때까지 제가 알고 있었던 인디 밴드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였냐면 ‘상업 자본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예비 주자들.’ (웃음) (문: 문화적으로 그렇게 보수적인데 인디밴드를 받아들인 이유가 있으시겠죠?) 농성 초기에는 두리반에 항상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급했어요. 그래야만 용역들이 못 들어올 테니까. - 유채림, 「퍼슨웹」과의 인터뷰

 

‘누군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 받아들인 ‘맞담배를 피우는’ 젊은 음악가들이나 활동가들은 기대 이상으로 성실하게 농성장을 지켰고, 주도적으로 활동을 구성했다. 끊임없이 사람이 있어야 하고, 활동을 통해 그 존재를 알려야 하는 농성장에서 이들의 활동은 존중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두리반이  통상적인 운동단체같은 수직적인 분업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나이나 경력에 따른 위계가 존재했다면 두리반 활동이 지금처럼 구성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농성장’이라는 조건 속에서 활동가들 각각이 자율적으로 활동을 구성하고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것은 그 어떤 방식보다 더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빨리 끝나야 하는’ 농성장의 특성상 장기적인 프로젝트보다는 짧은 호흡의 기획들 위주로 활동이 이루어 져야 했다는 점 역시 이러한 문화를 만든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용역과의 폭력적 대치 상황 등 조직된 물리력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을지 물음표를 던지는 활동가들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마포구청 점거농성이나 지난 11월에 시도되었던 용역의 침탈 시도가 있었을 때 두리반 사람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기민하게 움직임으로써 많은 연대를 끌어모을 수 있었다. 

 

물론 두리반의 이러한 활동이 그저 자유분방하게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활동의 이면에는 유채림 작가와 상근자들의 성실한 환대의 노력이 있었다. 아침마다 건물 전체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드나드는 모든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이들의 노력은 ‘자율’과 ‘수평적 소통’ 만큼이나 두리반 활동에 있어서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지도부는 문건을 만들고 하위 활동가들은 몸을 쓰는 방식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터뷰에 참여했던 활동가들은 이러한 두리반의 문화나 운동방식이 기존의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 와서는 이전의 사회운동의 방법이 잘 안 먹힌다는 건 분명해요. 그게 되게 무서운 거에요. 일상화되는 거. 근데 지금 우리나라 자본가들이나 정부에 있어서 으쌰으쌰하는 물리적 방법은 익숙해요. 이거는 이런 식으로 통제하면 되겠다 하는 걸 알아요. 두리반을 어떻게 잘 못하는 게 아직 얘네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 같아요. 음악가 얘네들이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음악도 이상해. 근데 얘네 음악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고 막 자유분방하고 얽매이지 않고 있으니까…… 이런 게 필요하다는 생각 두리반 보면서 많이 생각해요. -20대 활동가 D 인터뷰

 

10대 활동가들은 기존의 정당이나 단체들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집회 현장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모 정치조직의 경우 ‘사람은 많은데 뭐 하는지는 잘 모르겠고, 판이 벌어지면 나타나서 똑같은 피켓을 만들어 뿌리고, 자신들이 주도권을 갖고 유명해지려는 단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런 단체나 정당이 이들의 평가처럼 활동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은 이들 조직의 운동 방식이 이들의 감각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학생운동을 예로 들자면, 1학년 때는 선배들을 따라다니면서 허드렛일을 하고, 2학년이 되면 대자보를 쓰고, 3학년이 되면 문건을 작성하고 선거에 출마하는 위계적인 구조나, 구체적인 현실 분석 없이 구성원들이 전부 커다란 대의나 교조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모습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때는 학생운동이 저랑 맞지 않는 것 같았어요.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뭔가 되게 '종교' 같았어요. 깊게 고민하고 그걸 자기의 뭔가 진짜 경험 내지는 자기가 꿈꾸는 다른 삶이라든지 그런 걸로 연결하기보다는 당위성에 몰입하는 그런 느낌이라 굉장히 불편했죠. 무슨 말만 하면 단계가 정해져 있어요. 모두가 다 똑같은 패턴으로 똑같은 결론을 향해 달려가요. 근데 두리반에서 만난 사람들(학생운동 출신이나 정당 활동가) 같은 경우는 달라요. 이 사람들은 각자 주관이 있고, 그 주관에 의해서 그 정당을 택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그 정당을 왜 지지하고 비판도 할 수 있다고 다들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점에서 제가 진보정당들을 막 까고 그래도 토론이 되는 거죠. -C 인터뷰

 

활동가들은 두리반에 참여하는 이유에 대해 “재미”라고 말한다. 재미있고, 유희적인 것이 최근 젊은 세대의 중요한 유인동기가 되고 있다는 것은 여러 논자들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재미”란 단지 두리반에서 공연을 하고, 영화를 상영하며, 술 마시고 즐겁게 노는 것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선다. 사실 두리반보다 더 좋은 사운드의 공연을 볼 수 있고, 더 재미있는 영화를 볼 수 있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는 공간은 홍대 주변에 널려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재미를 느끼는 측면은 소비적인 측면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 활동을 직접 구성하고 있다는 데 있다.  두리반에 오기 전에도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한 참가자는 그런 운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이나 지식이 현장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 것이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에 계속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9 C 인터뷰 심지어 “바보 동네 형과 백수 얼간이”나 “애주가 혹은 주당”의 방식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두리반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으로 기능하며 “잘 났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것이라고 이들은 이야기한다.10 단편선, “한 찌질이로서. 내년에도, 열심히 노래하고 술 마시겠습니다”, 두리반 농성 1주년 기자회견문. 즉 이들의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엄숙한 진정성이나 대의가 아니라 ‘깨알같은’ 구체적인 활동과 재미에 있는 것이다. 

 

나는 두리반 운동 속에서 80-90년대를 지나며 만들어진 한국의 사회운동 진영의 흐름과 일정하게 구분되는 ‘새로운 운동권’의 부상을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운동권’이라는 단어는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는 넓은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보통은 ‘학생운동’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실제로 현재 대부분의 운동이 인적 구성이나 운동 프레임의 차원에서 80년대의 학생운동권을 그 자원으로 하고 있다. ‘새로운 운동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러한 계보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적 구성과 프레임, 운동 방식이 오늘날의 청(소)년들 속에서 대두하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이러한 경향의 운동이 두리반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90년대 후반 ‘두발 자유’로 상징되는 청소년 인권운동이나 2002년~2008년 사이의 촛불집회는 현재의 ‘싸우는 20대’의 전사(前史)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촛불집회 등이 그 시작은 청(소)년들의 저항으로 시작했다가도 이내 기성의 운동 패러다임이나 조직에 의해 장악되었던 것과는 달리 두리반 운동은 이 저항을 끌어가는 주요 동력이 계속해서 젊은 활동가들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물론 두리반이 이러한 경향의 모든 운동을 대표한다거나, 기존의 정치조직이나 사회운동 단체를 대체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두리반 활동가들 중 몇몇은 기성 정당이나 사회운동단체의 회원이기도 하며, 이러한 기성 조직의 연대 없이 두리반 투쟁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두리반 투쟁에서 기존의 운동 언어나 방식이 헤게모니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진보 정당 등의 활동은 두리반 운동에 있어서 주도적이기 보다는 보조적인 역할이나 측면지원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 두리반 운동의 기획이나 실행은 모두 철거 당사자와 젊은 활동가들이 주도해서 이끌어가고 있다. 또한 그동안 통상적으로 파편화되어서 수행되었던 새로운 세대의 여러 사회운동이 두리반이라는 계기 혹은 장소를 통해 한데 모이고 있다는 점11 두리반에서는 두리반의 활동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평화연대의 모임이나, 진보신당 청년활동가 모임 주최의 토론회, ‘우리동네 자립과 공존을 위한 벼룩시장등 다양한 단위의 활동이 활발하게 구성되고 있다. 이 밖에도 두리반의 공간을 빌려서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노래를 녹음하기도 하고, 때로 활동가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하는 등 크고 작은 활동이 벌어진다에서 이것을 새로운 ‘운동권’의 시작으로 ‘경향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들이 수행하는 정치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앞에서 설명한 ‘액티비즘’은 그 정치의 ‘형식’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내용(혹은 언어)은? 과연 두리반 투쟁에 유의미한 정치적 내용이 있는가? 나는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20대가 오늘날 한국의 정치 사회를 구성하는 능동의 언어세계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이들에게 고유한 정치적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기존의 정치공간 속에서 작동하는 언어들 속에서가 아니라 그 바깥에서 모종의 방식으로 들려오는 것이며, 그 바깥이 가시화됨으로써야 비로소 우리는 이들의 ‘정치’를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공간의 언어는 80년대에 세팅된 두 개의 진보 담론 — 선진화와 민주화 — 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87년 이후 한국의 정치는 사실상 이 두 담론 세력 간의 전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둘은 정치세력으로서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또한 서로의 담론을 참조하는 방식을 통해 집권에 성공했다. 이것은 민주화와 선진화라는 이 두 담론이 사실상 ‘진보’라는 똑같은 형식을 가진 담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위대한 한민족이 가난과 독재를 딛고 오늘날 최첨단 IT문명과 자유로운 자기표현과 소비를 구가하게 되었다는 서사는 선진화와 민주화라는 두 담론이 모두 공유하는 진보의 역사서사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보를 이루기 위해 피땀흘려 노동해온 생활인들과, 자기를 희생해 민주화를 이룩한 투사들이 이 역사의 ‘주체’로서 그려진다. 이들은 수많은 위기를 헤쳐가며 지금의 한국사회를 만들어 왔던 것이다. 억눌린 이들, 투쟁했던 이들의 역사적 기억은 이 진보의 서사 속에 기입됨으로써 국가 혹은 시민사회에 의해 기념된다. 

 

우리는 이런 서사가 쉽게 수많은 것들을 은폐해 왔음을 알고 있다. 수많은 생활인들이 이전보다 더욱 피땀흘려 살아도 생활의 어떤 진보도 바랄 수 없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해가고 있으며, 한 켠에서 부동산을 통한 불로소득으로 엄청난 부가 축척되는 동안 다른 한 켠에서는 땅과 집을 갖지못한 자들이 여전히 <상계동 올림픽>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 등. 민주화와 선진화의 담론은 이러한 은폐 위에서 그 육신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정치신화로서, 페티쉬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이 은폐되는 것들의 목록에 청(소)년들의 정치적 삶을 통째로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20대 투표율과 청소년 투표권을 둘러싼 지난 10여년 간의 담론은 20대가 어떤 정치적 언어 속에 놓여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대의 정치의제란 오직 투표율밖에 없었던 것이다. 20대의 정치운동이란 것도 온통 투표율 제고를 위한 캠퍼스 투표소 설치운동 같은 것 뿐이었다. 선거가 끝나면 20대는 진보적인 ‘어른들’에게 언제나 투표하지 않는다는 욕을 처먹었고, 가끔씩 ‘민주개혁 세력’이나 ‘진보 세력’이 승리한 선거에서는 20대의 투표가 세상을 바꾸었다는 찬사를 들었다. 그러나 그 찬사에는 어떤 내용도 들어 있지 않았다. 20대는 오직 정해진 ‘진보의 의제’에 표를 던지는 거수기로만 여겨졌을 뿐이다. 그것은 정당운동을 하는 20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열심히 활동을 했는데, 뭔가 결정하는 지점에서는 ‘젊은 시절부터 자기를 희생해서 밑바닥 현장에서 지금까지 활동해온’ 사람들에 의해서 모든 게 결정되더라구. 일 있을 땐 그렇게 자주 전화를 하는데, 막상 ‘당의 진로’라든지 그런 걸 이야기할 때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나는 뭐랄까 아주 작은 한 명? 나는 진지하게 어떤 활동에 대해 반론이나 의견을 제시한 건데 저쪽에서는 그게 NL이냐, PD냐야. 자꾸 그런 틀에서 내 이야기가 필터링 되는 거지. 결국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주로 젊은 당원들은 현실적인 의사결정 구조 밖에서 피켓팅하고, 키워질 하고 뭐 그런 거밖에 할 수 없는 거지. -전 민노당원 D 인터뷰 

 

어쩌면  20대의 낮은 투표율이야말로 이들의 목소리가 정확하게 들려오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목소리는 더 이상 ‘진보’의 언어가 아니다. 이미 민주화된 사회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오늘날의 청(소)년들에게 ‘진보’는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것이며, 오히려 선진화되고 민주화되었다는 이 사회에서 그들이 맛보고 있는 것은 깊은 불안과 절망이다. 이들은 낮은 투표율로 민주개혁이나 진보의 20대 마케팅을 거절한다. 물론 이것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단지 정치에 대한 냉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자신들의 냉소를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냉소마저도 문제시하는 ‘몰락’의 언어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편선 개인의 흐름 속에서 두리반을 ‘무능의 종착지’라고 했어요.) 아, 그거요.(웃음) 그건 제가 ‘무능’하다는 의미에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두리반에 잉여들이 많다고 하는데, 우리들한테는 일종의 ‘망했다’는 의식이 있어요. 이 나라에서 자본주의적인 성공은 할 수 없다는 인식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20% 안쪽에 들지 못하면 80%로 가는 건데, 그 80%는 더 망하거나 덜 망하거나 망하는 건 똑같다고 생각해요. 두리반에 있는 애들은 최소한 내가 남들보다 일찍 망했구나 하는 건 알고 있는 애들인 거죠. - 단편선, 퍼슨웹 인터뷰(http://www.personweb.com/articles/256)

 

 이러한 태도를 상징하는 단어가 ‘잉여’이다. 오늘날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기 시작한 청(소)년들은 “정치는 어차피 바뀔 수 있는 게 아니니 열심히 취직 준비를 해서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라는 냉소적이고 속물적인 태도마저 불신하며, 그것을 통해 오늘날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몰락시킨다. 두리반에서 이러한 몰락의 언어는 좀 더 분명하게 정치적 맥락 속에서 나타난다.  앞서 언급했던 “싸우는 20대” 토론회는 상당히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그 기획자는 열심히 준비해서 치룬 행사를 ‘실패’로 규정한다. 

 

기획자 중 한명으로서, 어제의 <싸우는 20대, 우린 어디로 가는가> 집담회에 대해서 자평해보자면, 한 마디로 일축해서 “좆 to the 망”입니다. 그간 기획자들, 그리고 패널들이 들인 노력과는 별개로 (진보신당 홍원표 연구원을 제외한) 모든 참여자는 (제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전혀 핀트를 맞추지 못했으며, 당연히 유의미한 토론으로 이어질 수 없었습니다. 다만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있었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늘 (아무 남은 것도 없이) 완전하게 실패하는가?’에 대해 3시간이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상연했다는 점 정도일 것이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토론회 자리는 종종 어떤 ‘경외감’ 내지는 ‘숭고의 감정’을 불어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그것이 ‘불쾌’와 직접적으로 연관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이것이 현주소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질 못했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만, 이번 토론회의 실패는 실패로서의 가치가 생깁니다. - @danpyunsun의 트위터

 

이런 글이 개중 점잖은 글일 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끊임없이 불신하거나 조롱함으로써 의미를 부여한다. 이들의 이런 ‘개드립’12  애드립(adlib)과 폄하의 의미를 가진 의 합성어상대방이 (정도가 심한)터무니없는 말을 하거나 진실되지 못한 발언을 할 때 ()드립이라고 표현하곤 한다.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어휘는 ‘망했다’이다. 이것은 정치나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관료들이 외치는 진보대통합은 전체운동 자체가 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죽은 운동세대의 힘을 연장하기 위해 젊은 운동가들의 피를 내어 먹이려는 거겠지. -@seouIdecadence 의 트위터

 

지금 이대로 꾸준히 해나가다 보면, 패착을 거듭하면서도 조금씩 남는 것들이 쌓여가겠죠.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더디게 가다보면,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에 수명이 끝나서 안타깝습니다. -@kimstcat_bot 의 트위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운동 바깥에서 정치와 운동을 냉소하는 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이나 두리반 투쟁, 정당운동 등을 누구보다도 열성으로 수행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조롱의 언어를 통해 오늘날 일상이 되어버린 진보 정치의 언어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을 조장한다. 이들의 언어 속에서 진보 정치 일반은 이제 역사의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이 되며, 더 이상 추방당한 이들, 배제당한 이들을 대의하고 있지 않은 환상의 정치가 된다. 두리반에 모이는 젊은 활동가들은 진보의 서사 속에 기입될 수 있을 어떤 긍정적인 정치적 비전의 언어 대신 이 서사 전체의 이미지를 몰락시키는 방식으로 고유의 ‘정치’를 발생시킨다. 

 

그것은 곧 오늘날 “망한 것들”의 직접적인 가시화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발터 벤야민의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예외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13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8테제는 진술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14 발터 벤야민,『일방통행로』의 독일의 인플레이션을 가로지르는 여행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함께 읽어볼만 하다: 이미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안정된 상태가 궁핍의 고정화를 의미할 뿐인 사회 계층이 존재하고 있었다. 몰락은 상승보다 결코 덜 안정된 것도, 더 놀라운 것도 아니다. 오로지 몰락에서만 현재 상황에 대한 유일한 분별력이 생긴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매일 반복되는 일에 대해 놀라지 않는 둔화 상태를 벗어나 다음과 같은 생각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즉 몰락의 현상들은 전적으로 안정된 것이며 구원은 유일하게 거의 기적과 신비에 가까운 어떤 특별한 일로부터만 기대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 따라서 최후의 파국에 대한 부단한 기다림 속에서 유일하게 구원을 가져다줄 비상한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외에는 대책이 없다. 진보의 서사 속에서는 포착될 수 없는 이 ‘상례화된 예외상태’는 그 진보의 이미지를 부수는 저들의 ‘개드립’ 속에서 드러난다. 결국 이들의 정치가 향하는 방향은 어떤 ‘정상적 상태’로의 진보나 회귀가 아니라 “진정한 예외상태를 도래시키는 것”일 수밖에 없다. 

 

(정치적인 활동에 참가하는 이유는 뭐야?) 내가 많이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했어. 민주시민으로 태어났으니까 의무를 다 해야지. 이런 게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이 드는 생각은 나의 현재가 되게 눌려져 있고, 억압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좀 벗어나고 싶다. 그런 거? 집회나 시위에 나가면 그 순간 벗어날 수 있잖아. 투쟁할 수 있고. 그게 너무 좋았어. 그게 확장되어서 용산도 가고, 기륭도 가고. 두리반에도 이렇게 오고. 사실 학교에서는 뭘 적극적으로 행동을 하지는 못해. 말 그대로 억압받고 있어. 그냥 욕하고 하는 정도일 뿐이지. 학생회도 어용이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A 인터뷰)

 

물론 나는 여기서 심한 도약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진정한 예외사태’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혁명적인 봉기는 전혀 멀게만 보인다. 두리반 사람들은 여전히 이 한국사회에서 한 줌도 안 되는 ‘망해가는 것들’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예외상태를 겪고 있는 두리반에서 이들이 ‘진정한 예외상태’를 작게나마 실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곳에서 예외상태를 겪는 이들의 연대가 조직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에게는 우리에 앞선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15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2테제, 강조는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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